< 17화 - 훼방 >
“다운.”
익숙한. 그러나 최근에는 거의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다. 목소리가 위치한 곳으로 고개를 돌린 다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이게 누구야! 조나 파인트!”
“다운.”
조나 파인트는 다운이 에이전트였던 시절 5년 이나 맡았던 선수다. 다운이 에이전트가 된 이후 가장 처음으로 단독 담당했던 선수이기도 했고, 가장 잘 된 선수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찐한 포옹을 나눈 다운이 웃으며 물었다.
“요새······”
‘어떻게 지내? 이제 FA 선언할 타이밍 아니야?’라고 물어보려던 찰나, 전에 읽었던 기사가 떠올랐다.
‘아차!’
하마터면 간만에 만나서 큰 실례를 범할 뻔 했다.
“······ 상황은 좀 어때?”
다운의 질문에 파인트가 씁쓸하게 웃었다.
“하하······ 뭐 힘들죠.”
“소송은?”
“아직 결과 나오려면 몇 달 남았어요. 그래도 잘 해결될 것 같아요.”
“다행이네.”
그의 상황이 아니기에 완전히 공감해서 그를 위로해줄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다운이라서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었다.
“잘 해결될거야. 날 봐 조나. 인생이 내려가는 순간이 있으면 올라가는 순간도 있는거야. 난 네가 사이영을 탈때만해도 네 인생의 최고점인줄 알았거든? 그런데 또 이렇게 내려가는걸 보니, 네 최고점은 아직 오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들어.”
다운의 진심어린 위로에 파인트가 슬며시 웃었다.
“고마워요 다운.”
“도와줄 수 있는게 있다면 얼마든지 이야기하고.”
“아, 그럼 염치없지만······”
파인트는 머리를 긁적이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윈터미팅 마지막 날에 쇼케이스를 할 예정인데, 혹시 와줄 수 있을까요?”
다운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다른 것도 아니고 네가 쇼케이스를 한다는데 가서 봐야지.”
7년이 지났어도 똑같은 다운의 행동에 파인트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고마워요.”
“꼭 갈게. 내 번호 알지? 거기로 장소랑 시간만 넣어놔.”
“네.”
홀가분한 표정으로 떠나는 파인트의 모습에 안타까운마음이 일었다.
“불쌍한 자식······”
그 일만 아니었다면 성적이 떨어질 일도 없었을 것이고, 구단에서 방출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찬란한 커리어를 보냈을 놈인데.
식사를 마치고 헤드쿼터로 돌아온 다운은 곧바로 회의를 소집했다.
“프런트라인 급 선발은 영입하기 힘들 것 같아.”
밥을 먹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생각을 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프런트라인급 선발을 채우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면 내부에서 올릴 생각이십니까?”
“일단은 룰 5 드래프트를 노리자.”
룰 5 드래프트는 40인 명단에서 제외된 선수들을 일정 금액을 내고 데려갈 수 있게 해 놓은 제도였다.
구단들이 잠재력 있는 선수들을 마이너에서 썩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로 은근히 괜찮은 선수들이 풀리곤 했다.
로베르토 클레멘테, 요한 산타나, 조시 해밀턴, 호세 바티스타, R.A. 디키 등이 룰 5 드래프트의 수혜를 받은 선수들이었다.
비록 드래프트로 데려온 선수는 부상당하지 않는 이상 26인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무조건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조항으로 인해서 컨텐딩 팀들은 이를 활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긴 했다.
하지만 레이스와 같이 리툴링을 하는 구단 입장에서는 이것만큼이나 큰 부담없이 선수층을 채울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우리도 클레멘테 하나 뽑아보자고.”
“그러면 좋겠네요.”
“남은 시간에는 다른 팀 명단에서 제외된 선수들 위주로 다시 명단을 짜봐.”
“선발로 채울까요?”
“아니. 그냥 풀린 선수 중에서 가장 좋은 선수를 데려와. 정 선발이 없으면 그냥 내부에서 올리는 방향으로 하자고.”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미키의 옆에서 로벨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저희가 일하는 동안 단장님은 뭐하시려고요?”
이에 다운이 마주 웃었다.
“훼방.”
***
대런 스타인브레너는 팀에 부족한 빅게임 피쳐를 영입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미세스······ 아니.”
메이저리그 최초의 여성 단장인 킴 응은 마담이라던가 Mrs라는 수식어를 싫어한다. 거기까지 올라온 그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한다나 뭐라나.
“응 단장님.”
[대런. 당신도 막시 로페즈를 노리고 온건가요?]
“네.”
[대가가 만만치 않을거라는 것은 알고 계시겠죠?]
“물론이죠. 막시 로페즈에 대한 값을 제대로 치를 수 있는 구단은 저희 양키스밖에 없다고 자신합니다.”
막시 로페즈는 현재 트레이드 시장에 풀려있는 다른 어떤 투수들 보다도 빅게임에서 강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두 경기를 뛰면서 17.1이닝 동안 1실점 38K로 다저스의 강력한 타선을 막아내는 미친 활약을 보여준게 바로 막시 로페즈였다.
바로 지난 시즌 양키스의 우승을 가로막은 그 다저스의 타선을 상대로 말이다.
그게 바로 다른 어떤 투수들 보다도 로페즈를 데려오려고 했던 이유였다. 만약 월드시리즈에 다시 한 번 가게 된다면, 그리고 그 상대가 빌어먹을 다저스라고 할지라도, 막시 로페즈라면 그들을 철벽처럼 막아줄테니까.
[호호. 한 번 들어나 보도록 하죠.]
의미심장한 킴 응의 웃음에 쎄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우리 말고 다른 구단에서도 제안을 받은건가?’
하긴 로페즈를 노릴 구단은 많았다. 당장 2020시즌 그에게 막혔던 다저스부터 시작해서, 다저스를 누르고 대권을 노리는 파드레스. 모아온 유망주들이 하나 둘씩 터지기 시작하며 동부지구의 패자로 떠오른 브레이브스.
아메리칸리그에서는 자신들이 하는 일이라면 매번 끼어들어 훼방을 놓으려는 레드삭스. 마크 트레인이 전성기에 있는동안 우승을 한 번은 이루고 싶어하는 에인절스.
당장에 떠오르는 팀들만해도 다섯 팀이 넘어갔다.
‘그래도 우리 제안보다는 못할거다.’
대런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로페즈를 영입하기 위해 최고의 패를 내줄 준비를 하고 왔다.
“토마스 애커슬리와 앤서니 브루어를 드리죠.”
토마스 애커슬리는 양키스 팜 내 2위, 메이저리그 전체 12위에 랭크되어있는 3루수. 앤서니 브루어는 5위, 메이저리그 전체 21위에 랭크된 우완 투수였다.
간보는 식으로 제안을 점점 높여나갈수도 있었지만, 로페즈를 얻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시작부터 최고의 제안을 내미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두 명 더 얹어드리겠습니다. 이게 저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제안입니다.”
우리 제안이 이렇게 좋은데 거절할 생각이야? 설마?
트레이드 카드를 제안한 대런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킴 응의 답을 기다렸다.
[음······]
“역시 저희의 제안이 최고······”
[생각보다 그렇게 좋지는 않네요.]
“네?”
대런은. 아니 대런을 포함한 양키스 직원들은 모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킴 응이 미친건가?’
모두의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문장. 대런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다잡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새, 생각보다 좋지 않다고요?”
[호호. 네. 양키스에게 전화가 오기 전에 다른 곳에서 전화를 받았는데 그곳의 제안보다는 좋지 않은걸요?]
‘대체 어떤 빌어먹을 자식이!’
끓어오르는 혈압을 꾹꾹 눌러담으며 물었다.
“혹시 어떤 제안을 받았는 지 알 수 있을까요?”
[그것까지 알려드리기는 힘들겠네요.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정보는 같은 지구의 어떤 팀에서 팀 내 2, 3, 8순위 유망주를 제안했다는 것 정도가 되겠네요.]
“대체 어떤 미친 팀이······”
터져나오는 대런의 말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평온한 목소리로 킴 응이 물었다.
[그건 알아서 생각하셔야죠.]
맞는 말이다. 킴 응이 대런에게 어떤 팀이 제안했는지까지 알려줄 의무는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신 것 같으니 다시 전화오시는 걸 기다리도록, 아니지. 늦으면 로페즈가 없을수도 있답니다? 호호호!]
약올리는 듯한 웃음과 함께 킴 응이 사라졌다.
“젠장할! 대체 어떤 놈이지? 일단 우리 지구라고 했으니까 레드삭스나 블루제이스인가.”
“두 팀 모두 선발이 필요한 팀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레드삭스에서 저희가 로페즈를 노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훼방을 놓기 위해 딜을 넣었을 확률이 가장 높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블루제이스는 현재 상위권 유망주들이 다들 메이저리그에 자리를 잡은 상태죠. 팜에 있는 팀 내 2, 3, 8순위 유망주라고 해봤자 킴 응의 구미를 당기지는 못했을겁니다. 분명 보스턴 자식들의 행패가 틀림없습니다!”
하여간 레드삭스 놈들은 평생 도움이 안되는 녀석들이다.
“레드삭스 2, 3, 8순위들은 BA 랭킹이 어떻게 되지?”
“각각 13, 16, 30위입니다.”
한 놈은 순위가 낮지만 한 놈은 높다. 게다가 30위에 해당하는 선수까지 생각한다면 양키스에서도 그 정도 대가는 지불해야한다는 뜻이었다.
“막시 로페즈가 필요한가?”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물은 대런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필요하다. 아니지, 적어도 레드삭스 저 놈들한테 넘길 수는 없어.”
분노에 찬 듯 하면서도 냉정한 대런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서라면 무조건 로페즈는 데려와야합니다!”
“2년이나 쓸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유망주 하나 정도는 더 소모해도 될 겁니다!”
직원들의 지지 발언에 자신감과 확신을 얻은 대런이 다시 킴 응에게 전화를 연결했다.
전화를 연결하던 비서가 대런에게 말했다.
“5분만 기다려달랍니다.”
보스턴 촌놈들이다.
하지만 단장에 대런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레드삭스와의 딜이 협의되지만 않았길 비는 것 말고는 말이다.
억겁과도 같은 5분이 지나가고 양키스 회의실 가운데에 있는 전화가 울렸다.
“응 단장님. 두 사람에 더해서 6위 이하에 있는 유망주들 중 원하시는 유망주 하나를 더 드리겠습니다.”
[그럼 총 셋 인가요?]
그녀의 말투에서 레드삭스는 세 명의 선수를 제안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왔다.
“거기에 10위 이하 유망주 한 명을 더 끼워드리죠. 로페즈 정도의 선수라면 4명은 되어야 급이 맞지 않겠습니까?”
[호호! 그도 맞는 말이네요. 좋습니다. 딜 하시죠.]
“이름만 불러주시면 바로 사무국에 트레이드 협의서 보내겠습니다.”
***
같은 시각 말린스의 헤드쿼터.
“어떻습니까 킴벌리. 제가 말한대로 됐죠?”
“호호! 그렇네요. 다운 덕에 괜찮은 유망주 하나를 더 챙기게 됐네요.”
“뭐 제 덕이랄 것까지 있나요. 저도 대가를 받고 하는 일이잖습니까.”
양키스에게 훼방을 놓기로 마음먹은 다운은 곧바로 말린스 헤드쿼터로 찾아갔다.
‘대런이 여러 선수들을 노릴 것 처럼 연막을 쳐놓긴 했지만, 그 놈 성격상 데려오려고 하는 선수는 딱 정해져있어.’
바로 직전시즌 자신을 물먹였던 다저스에게는 저승사자와도 같았던 막시 로페즈.
말린스 헤드쿼터를 찾아가 킴 응과 독대한 다운은 그녀가 혹할만한 제안을 했다.
“로페즈로 최대한의 이익을 보셔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킴 응은 기준치를 밑도는 간보기에 지친 상황이었다.
“좋은 방법이 있나요?”
“있죠. 제가 10위 안에 들어가는 상위권 유망주 셋을 말린스에 안겨드리겠습니다. 대신 남은 한 명의 유망주. 저희에게 넘겨주시죠.”
“대가는요?”
“현금 10만 달러. 혹은 저희 팀에 맞지 않는 유망주 하나와의 맞교환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협업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후후! 프레드 올라루스. 이 선수로 하죠.”
이 트레이드 소식을 알게 된 뒤 일그러질 대런의 얼굴을 생각하니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 17화 - 훼방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