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그리고 끝나지 않은 전쟁 (1)
1944년 10월 20일 12시.
경성의 종로 거리에는 각자가 그려서 급하게 마련한 엉성한 태극기를 손에 든 한국인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3.1 운동 이후로 태극기를 모조리 압수당한 지 벌써 25년이 지난 상황이었고, 대한제국 시기를 경험했던 나이 많은 노인들이나 중장년층들은 어렴풋한 기억으로 태극기를 그리고 청년층 아래로는 생전 처음 태극기를 보는 상황이었다.
애당초 태극기가 완전한 형태로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제의 강제 합병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광복 당시의 태극기 문양은 다양한 모습이었다.
종로에 모인 한국인들은 확성기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히로히토 일왕의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짐은 깊이 세계의 형세와 제국의 현상에 비추어보아 특단의 조치로서 시국을 수습하려고 하여, 이에 충성스럽고 선량한 그대들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국에 대해 그 공동성명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게 했다. --중략--, 모름지기 온 나라 한 집안 자손이 서로 확실히 전하여, 하늘이 주신 땅이 불멸을 믿고,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이고, 도의를 두껍게 하고, 지조를 공고히 하리라 선서하고 국체의 정수를 앙양하고, 세계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을 것을 기대한다. 그대들 신민은 짐의 이 뜻을 꼭 마음에 두고 지켜라.’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방송은 끝이 낫지만, 히로히토의 라디오 방송에서는 항복한 것인지 아닌지 모를 너무나 애매모호한 말뿐이어서 방송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종로 거리에 모인 인민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만세를 외쳤어야만 하는 순간을 놓치고 있었다.
“뭐야? 저게 항복을 한다는 소리야? 뭐야?”
“오늘 히로히토가 항복한다고 하지 않았어? 아…! 저 새끼가 창피하니까 혹시 항복한다고 말을 못 한 것 아닐까?”
“아무튼 이제 전쟁은 끝났지? 그럼, 이제 우리나라는 확실하게 독립을 한 거지?”
“그렇지 않을까?”
“그럼 다들 뭐해? 만세를 외쳐야지. 대한민국 만세!”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방송을 듣고 자기들끼리 결론 내린 사람들은 엉성한 형태의 태극기를 양손에 들고 하늘 높이 치켜들면서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어…. 어, 대한 독립 만세!”
“만세! 만세! 대한민국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만세!”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을 듣고 만세를 외치는 대한민국 인민들을 보면서 임시정부가 적은 인원에 바쁜 것은 이해하지만 좀 더 인민들을 위해서 신경을 써 주지 못한 모습에 조금은 아쉬웠다.
“아직 태극기의 형태를 하나로 통일하지 못한 상황이어서 그런 건가? 이왕이면 임시정부에서 인민들의 광복 축하 행사를 좀 준비해주지….”
“대장님, 지금 임시정부는 그럴 여력이 없을 겁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지금 그럴 여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그래도 미련이 남았다.
“일단 중앙청으로 먼저 가서 김구 주석을 만나고 광복군 사령부에 들러서 김경천 사령관을 만나보자.”
“예, 대장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마땅히 사용할만한 건물이 없어서 조선 총독부 건물을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하고 있었다.
“주석님, 미국 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아…! 조지 대장, 미군이 한반도를 장악하기 위해서 상륙하기 전까지, 더는 광복군의 군사적인 활동을 하지 말라고 하고 있어요.”
“그래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파견되는 미군은 누구라고 합니까?”
“아무래도 맥아더 장군의 남서 태평양 사령부 소속의 병력인 것 같아요. 내가 보기에는 미군도 일본의 항복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급해졌는지 대처하는 것이 영 아닌 것…. 아무튼 우리나라에는 맥아더 장군 휘하의 병력이 들어올 것 같아요.”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맥아더 휘하 사령부의 육군 병력이 한반도를 관리하기 위해서 파견되는 것 같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 정부와 내부적으로는 한반도에 진입하는 미군과 해당 없이 독자적으로 행정을 유지하기로 약속은 했지만, 숫자가 너무 적은 광복군의 병력으로는 수십만의 일본 관동군이나 소련군을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국의 관리를 받는 것처럼 위장할 수밖에 없었다.
“주석님, 국내 행정이나 국내 정치 문제에는 미군이 절대 개입하지 않는 것으로 확실하게 정리가 됐죠?”
“그래요. 그것 때문에 미국에 있는 김규식 외교부장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미군은 바로 간도로 진주할 거예요. 간도에 주둔하면서 소련의 극동군을 감시하고 일본 관동군의 무장해제를 할 생각인 것 같아요.”
“아! 그래요? 그거 진짜 잘됐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광복군의 병력이 너무 적어서 어떡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이제 국내 정치 상황은 미군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럼, 옛날처럼 이놈 저놈 나서서 난리를 치던 해방 정국과는 달리 임시정부의 통제 아래서 차분하게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 참, 혹시, 주석님, 국내 정치 세력들이 접촉해오지는 않았습니까?”
내 질문에 김구 주석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피식 웃었다.
“하하, 조지 대장의 걱정은 항상 그거구먼. 일제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는 상황인데, 누가 남아 있다고 정치세력을 구축하려고 하겠어요?”
“주석님, 나는 항상 그놈들이 걱정입니다. 나는 그놈들만큼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작정이거든요. 모든 대가를 다 치르고 난 다음에, 그때도 정치를 하겠다면 그때는 어쩔 수가 없지만,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인민들의 앞에 서서 민족의 지도자라도 되는 양 나서서 꼴값 떠는 것만큼은 절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알았어요. 그것은 나도 조지 대장과 같은 생각이니까 절대로 그렇게 되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지금 지방 쪽은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 때문에 난리도 아니라고 하더군요.”
내가 광복군 정보대를 장악하고 있지만 대한민국 지방 곳곳까지 힘이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지방의 행정과 치안을 통제하는 조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부 조직이었다.
“왜요? 지방에서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지방에서 살고 있던 일본인 지주들이나 친일 매국노들에게 착취를 당하고 살아왔던 인민들이 이제는 일본이 전쟁에서 졌고 우리가 독립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동안 참아왔던 분노를 터트린 모양이에요.”
조선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올해 초여름부터 광복군의 국내 수복 작전에 일본군이 쫓겨날 때까지만 해도 설마설마하다가 임시정부의 한반도 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그제야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일본으로 도망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때부터 일본인들은 황급히 재산을 팔아 치우고 일본으로 밀항을 하는 등 일본으로 탈출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고, 몇몇 조선 출생 일본인들이나 처분할 재산이 너무 많은 일본인은 조선 땅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걸 오히려 포기하기도 했다.
그것은 친일 매국노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땅에서 사는 것이 두려웠던 사람들을 서둘러 재산을 팔아넘기고 일본으로의 도주를 선택했고 그따위 것은 전혀 신경 안 쓰는 사람들은 지금 성난 인민들에게 고통을 겪고 있었다.
임시정부에 의해서 지방의 치안이 유지는 되고 있었지만, 조선에 거주하는 모든 일본인과 친일 매국 조선인들을 보호해 줄 수는 없었다.
“주석님, 지방의 연통부 간부들에게 조선에서 살던 일본인들과 친일 매국 조선인들을 굳이 나서서 보호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혹시라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조선에 남아 살고 싶다면 그 정도 일은 감수하고 살든지 아니면 일본으로 가라고 하십시오.”
“나도 일본인들이 우리 땅에 남아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재일 조선인들과 빠르게 교환을 할 생각입니다.”
‘아! 재일 조선인 문제도 있었네. 돈을 벌려고 일본으로 간 재일 조선인과 일본이 좋아서 살려고 간 놈들하고 구분해야 하는데…. 우리 정보대는 그럴 만한 여력이 없는데….’
“주석님, 대한민국으로 입국을 원하는 재일 조선인들의 입국 신청을 받을 때, 나중에 친일 매국 반민족 행위자로 밝혀지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꼭 말해주십시오. 그것은 지금 간도를 통해서 입국하려는 재중국 조선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은 유치하게 보이겠지만 나는 끝까지 친일 반민족 매국노들만큼은 찾아내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정말로 조지 대장은 친일 매국노들을 끝까지 추적해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군요?”
“예, 그런 놈들은 우리나라에 단 한 놈도 없어야 합니다. 이미 한 번 배신해본 인간들이기 때문에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라도 더 일본을 찬양하고 조국을 배신했던 행동을 정당화시키려고 노력할 겁니다.”
모든 일은 처음 한 번 하는 것이 어렵지. 전에 해봤던 일을 두 번 세 번 다시 하기는 정말 쉽다.
그것은 민족을 배신하는 짓도 마찬가지다.
“조지 대장, 나도 그것만큼은 최선을 다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국내 문제는 임시정부를 믿고 나는 내일만 신경을 쓰겠습니다.”
“그래요. 조지 대장도 수고하세요.”
* * *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마땅히 일할 건물이 없어서 조선 총독부 건물을 사용하듯이 대한민국 광복군도 마땅한 건물이 없어 용산의 일본군 기지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조지 대장님, 일이 좀 웃기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예, 어디 일이 웃기게 돌아간다는 말입니까?”
유자명 선생의 표정이 심각한 것 같기는 한데 약간의 웃음기도 보여서 도대체 무슨 일인지 더 궁금해졌다.
“이번 히로히토의 항복과 암살은 각지에 파견된 방면군 사령관들에게는 청천벽력이었던 모양입니다.”
“아마, 그랬을 테지요. 그런데, 웃긴 일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일본 대본영은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 대신이 할복하면서 스기야마 하지메 참모총장이 최고 지휘권자가 됐는데 스기야마 하지메 참모총장의 명령이 먹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그렇게 될 줄 예상하지 않았습니까?”
“아니요. 그러다 보니까 해외 파견 각 방면군 사령관들이 따로 놀고 있습니다. 관동군은 소련과 접촉하면서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고 있고, 지나군 사령부는 국민당 장제스와 협상을 진행 중입니다.”
“예…? 그럼, 중국 내전에 일본군이 뛰어들었다는 말입니까?”
“아마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소련의 스탈린은 그냥 만주의 이권을 차지하는 것이 훨씬 나을 텐데…. 그럼, 중국 공산당의 내전 시작은 스탈린의 지시가 아니었고 마오쩌둥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관동군과 협력이었구나…. 이건 완전히 신의 한 수 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