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동상이몽
1943년 11월 22일- 11월 27일 이집트 카이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 영국의 처칠 수상은 각국의 군사, 외교 전문가들과 함께 북아프리카에서 회의를 마치고 다음과 같은 선언이 발표됐다.
그동안 우리는 수차례에 걸친 군사 관계자 회의에서 일본을 상대로 한 앞으로의 군사작전 등에 관해서 상호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우리 세 연합국은 잔인무도한 우리의 공동의 적인 일본을 해상과 육지와 그리고 영공을 통한 지속적인 압박을 가하기로 결의했다.
우리 세 연합국은 현재 일본의 침략을 제지하고 응징하기 위해 이 전쟁을 치르고 있다.
우리 세 연합국은 우리 각국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며, 또한 영토 팽창을 위한 야심도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우리 세 연합국의 목적은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래로 일본이 강탈했거나 점령해 온 태평양의 모든 섬을 몰수하는 데 있으며, 또한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탈취한 모든 영토, 예를 들면 만주, 타이완, 펑후 제도 등을 중국에 반환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폭력과 탐욕으로 탈취한 모든 다른 영토들도 모두 원상회복할 것이다. 우리 세 연합국은 한국민이 현재 일본에 의해서 노예적인 상태에 놓여있음을 상기하면서 한국을 적당한 시기에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만들 것을 굳게 다짐한다.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 세 연합국은 일본과 싸우고 있는 다른 국가들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가면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는데 필요한 진지하고도 장기적인 군사 행동을 지속적으로 감행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카이로 회담에 이어서 이란의 테헤란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 서기장이 독일과 전선에 대한 협의를 진행했고 여기서도 몇 가지 합의 사항이 도출됐지만, 대외적으로는 선언이나 발표는 없었다.
1943년 11월 28일- 12월 1일 이란 테헤란.
테헤란 회담에서 각국 정상들은 미, 영, 소 삼국이 협력해서 독일을 항복시키거나 독일을 완전히 점령할 때까지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한다는 합의를 봤다.
다만, 이를 위해서 미국과 영국은 그동안 독일군의 주요 전력을 붙잡아 뒀던 소련에 많은 것을 양보해야만 했다.
소련이 발칸반도 일대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만드는 것을 허용해주어야만 했으며, 폴란드와 소련 사이의 국경선을 전쟁 발발 직전보다 약 250km가량 서쪽으로 옮기는 것에도 동의를 표해야만 했다.
그리고, 유럽의 제2 전선 형성 문제에서는 다소간의 의견 충돌이 발생했다.
1941년 전쟁 초창기 때부터 스탈린은 처칠과 루스벨트에게 제2 전선을 유럽 어딘가에 형성해서 소련의 부담을 줄여 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었고 처칠과 루스벨트 역시 제2 전선의 형성 자체에는 동의했다.
다만 세부적인 사항에서 양측 사이의 의견 충돌이 존재했는데, 1943년 이내로 상륙작전을 시행할 것을 요구했던 스탈린에게 처칠과 루스벨트는 선박, 병력의 부족을 근거로 난색을 보였다.
그리고, 스탈린이 프랑스 북부 해안에 상륙할 것을 요구했던 것과 달리 처칠은 지중해 일대에 상륙할 것을 원했다.
이런 치열한 논의 끝에 절충이 이루어졌고 제2 전선은 1944년 5월 프랑스 북부 해안에서 상륙작전을 실시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무조건 항복하라고? 우리 일본 제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라고 하지 않느냐?”
히로히토 일왕도 어디서 얻은 정보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카이로선언의 내용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히로히토 일왕을 설득하기 위해서 찾아온 스즈키 간타로 추밀원 고문과 기도 고이치 내대신은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무조건 항복하라는 것은 내 목숨도 내놓으라는 소리지 않느냐? 응? 왜? 말들이 없느냐?”
죽기는 싫었던 히로히토 일왕은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두 명의 대신들을 추궁했다.
“폐하! 일단 고정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고정을 하게 생겼느냐? 내가 그렇게 전쟁을 말렸건만….”
히로히토 일왕은 말을 하다 말고 자신이 한 번도 전쟁을 말린 적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입을 닫았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걱정은 했지만, 히로히토 일왕이 직접 타국과의 전쟁과 침략 자체를 말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폐하! 진정하시고 저희의 말을 조금만 들어봐 주십시오.”
“크흠…. 그래 알았다. 이야기해봐라.”
발작적인 반응을 보이던 히로히토 일왕은 그래도 자신의 충신인 두 사람의 의견은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폐하, 현재 우리 제국은 총체적인 난국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동맹으로 함께했던 이탈리아는 연합국에 항복했습니다.”
“그건 나도 이미 알고 있다.”
히로히토 일왕이 자세를 고쳐 앉고 말을 들은 자세가 되자 스즈키 간타로가 목소리를 낮게 강하게 깔아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폐하께서 모르고 계시는 것들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잘 들어 보시고 심사숙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 알았으니까 어서 말을 해 보거라.”
“폐하, 먼저 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뭣이라고 군의 움직임이 이상해?”
혹시라도 또 쿠데타의 움직임이라도 있는 건지 걱정이 된 히로히토 일왕은 몹시 놀란 표정이었다.
“예, 이번엔 사이판을 잃고 연합국이 우리 제국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면서 내부적으로 이상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어떤 움직임?”
“해군은 연합국과의 항복 협상을 어떻게 해야 할지 사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군은 소련과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해군은 항복을 준비하고 육군은 소련을 접촉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요?”
일본 육군은 소련이 앞으로도 계속 동맹으로 남아준다면 중화민국과 현재 확보한 영토를 끝까지 지킬 자신이 있었고, 일본해군은 이미 뚫려버린 절대 국방권을 보면서 미국 해군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항복을 준비했다.
이런 육군과 해군의 움직임을 스즈키 간타로는 하나도 숨기지 않고 히로히토 일왕에게 보고했다.
“경들의 생각은 어떤가? 육군이 맞는 거냐? 아니면, 해군이 맞는 거냐?”
“폐하, 육군도 해군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폐하의 안위와 제국의 영속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폐하의 의중이 중요합니다. 폐하께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진짜 충신인 스즈키 간타로의 진심 어린 걱정에 히로히토 일왕은 마음 한편으로 든든하기는 했지만 뭐라고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자신의 목숨이 위험에 처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겠다. 내가 어찌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
“폐하, 이탈리아 왕국의 왕은 연합국에 항복하고도 전범으로 몰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왕국도 해체되지 않았습니다.”
“그거야 현재 독일과 전쟁 중이기 때문에 연합국 쪽에서 일 처리를 잠시 미뤄 둔 것이 아니냐?”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도 이탈리아 왕국처럼 최대한 연합국에 협조한다면 이탈리아와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을 경이 어떻게 장담한다는 말이냐?”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이나 일본보다 일찍 항복했고 1943년부터 연합군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패전국 취급을 받지 않았고 전범재판도 열리지 않았다.
식민지였던 리비아에서 식민지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에티오피아에서 로돌포 그라치아니 같은 전범은 암살 기도가 있었다는 이유로 기독교인 3만 명을 쳐 죽이고 사람들 수천 명을 강제 수용소로 보냈지만, 감형을 받고 풀려나서 종전 이후에도 목숨을 보전했다.
그리고, 전후에 잃은 영토도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 비교하면 상당히 적었다.
물론 추축국이었던 대가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고 UN에 1956년에야 가입할 수 있는 등의 약간의 페널티를 받았다.
“폐하! 항복을 할 거라면 독일보다 먼저 항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이탈리아 왕국과 같은 대우를 받습니다. 만약, 독일이 전쟁에 패배하고 나서 항복한다든지 아니면 끝까지 혼자서 전쟁을 치른다면 제국의 미래와 폐하의 안녕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우리는 처음부터 미국과의 협상을 원해서 전쟁을 시작한 것이 아니냐? 그런데, 경의 말대로라면 우리를 너무 가혹하게 대하는 것이잖아?”
“폐하! 그것은 오로지 우리 제국의 생각일 뿐입니다. 카이로선언 내용을 보면 우리 제국은 이미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여기서 더 잃을 수 있는 것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폐하입니다. 독일보다 먼저 항복하지 않으면 연합국의 다음 목표는 바로 폐하가 됩니다.”
“연합국의 다음 목표는 나라는 말이지?”
“예, 폐하! 일본에서 더 빼앗을 것이 뭐가 남아 있습니까? 마지막 남은 제국의 자존심인 폐하밖에 더 있습니까?”
아무리 스즈키 간타로와 기도 고이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들 앞에서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추태를 보일 수 없었다.
그래서, 히로히토 일왕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떻게 해야 제국이 온전하겠느냐?”
“폐하! 지금까지 제가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최대한 협상을 잘해서 항복하고 버릴 것은 미련을 두지 말고 깨끗이 포기해야 합니다. 작은 것에 미련을 두다가 가장 큰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스즈키 간타로 추밀원 고문은 히로히토 일왕이 마음 정하는 데 확실하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도고 시게노리가 보여줬던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이건 무엇이냐?”
“우리 제국이 항복을 하지 않으면 미국이 우리 제국을 공격할 방법이라고 합니다. 이것만 봐도 우리는 독일과는 또 다른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겁니다.”
“이것이 진정 사실이냐? 어떻게 사람이 같은 사람에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이냐?”
수십만 아니 수백만, 수천만 명이 죽을 수 있는 결정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렸던 히로히토 일왕은 미국의 공격계획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랐다.
“모두 내년부터 시작될 미국의 공격계획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우리 일본 제국은 독일과는 또 다른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질 전쟁이라면 최대한 빨리 항복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스즈키 간타로와 기도 고이치의 설득에도 히로히토 일왕은 선 듯 결정을 하지 못했다.
“경들이 봤을 때 이 전쟁은 도저히 승리할 가망이 없다는 소리냐?”
“폐하! 폐하께서는 지금까지 속고 계셨습니다. 육군도 해군도 대본영도 패전의 소식을 폐하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뭣이라고? 그게 사실이냐?”
“그렇사옵니다. 폐하.”
마지막 심리적 저항선이 무너진 히로히토 일왕 그때부터 스즈키 간타로와 기도 고이치와 함께 항복을 위한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대본영 회의 소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