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제거해야 하나? (3)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을 갈등과 폭력만으로는 해결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큰 갈등이 있어도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타협하면서 사는 것이다.
이번 한 번은 다이리가 사실을 털어놓고 협조를 요청한다면 나는 기꺼이 도와줄 생각이 있었다.
“다이리 국장, 우리 서로 까놓고 이야기합시다. 뭐가 불만입니까? 나는 그래도 이번 미국 조사단에 중국 공산당을 조심하라고 말하면서까지 국민당의 편을 들어 주었는데?”
내가 약한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하는지 다이리는 어느새 처음과 같은 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지금까지 우리 중화민국 정부의 의견을 전달했잖습니까? 그런데, 뭘 더 이야기합니까?”
‘하! 역시, 중국 놈들한테는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것이었어.’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가만히 서 있자 김구 주석이 다이리에게 대신 대답을 했다.
“다이리 국장, 잘 알겠소. 그럼,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화민국에서 철수하기로 하겠소. 그런데, 우리가 언제까지 철수를 하면 되는 거요?”
다시 한번 생각해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바이중으로 옮긴 것은 잘한 일 같았다.
만약, 충칭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다면 다이리의 통보를 받는 순간 여러 파벌이 대한민국 독립이라는 대의 명제 때문에 간신히 봉합하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파벌별로 갈라져서 벌써 난리가 났을 것이다.
“철수 시기는 정부의 결정이 정해지면 그때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뵙죠.”
다이리는 우리를 협박하는 것이 목적이었는지 대답하기 애매한 순간에 작별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주석님, 정말로 중국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떠날 수 없다고 해도 떠나겠다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않겠어요? 이대로 국민당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다 보면 우리가 조선 시대 때 사대하던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강대국에 사대하다 망했다고 생각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는 절대로 그럴 순 없다는 얼굴이었다.
나도 김구 선생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대책을 생각했다.
“주석님, 광복군의 모든 해군을 동원하고 수송선을 좀 임대하면 철수작전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대비해서 준비할까요?”
“조지 대장, 그것보다 미국 정부에서 우리를 받아 줄까요?”
“일단 교섭을 해봐야만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미국 정부와의 교섭에 실패하면 영국 정부와도 교섭해보겠습니다.”
“아니에요. 영국 정부와의 교섭은 내가 맡을게요. 지금 영국 대사관에 우리 동포가 일하고 있으니까 조지 대장보다는 내가 더 나을 거에요.”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내가 중화민국 충칭을 찾은 표면적인 이유는 미국 조사단을 돕기 위한 것이었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첫째 목적은 그동안 훈련한 광복군 1개 연대 병력을 새롭게 전선으로 이동시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새로 개발된 무기 성능을 직접 살펴보고 미국 정부와 딜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계획한 일들은 아무래도 며칠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며칠 동안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의 랜드리스 물품의 불법 유용 사태를 조사하고 다녔던 COI의 찰스 레머가 뭔가 실마리를 잡았는지 나를 찾았다.
“조지 씨, 아무래도 우리 정부는 그동안 배고픈 쥐새끼들에게 식량을 제공한 것 같습니다.”
찰스 레머의 말은 외교적으로 보자면 상대국을 엄청나게 비하하는 발언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발언을 한다는 것은 랜드리스 지원물자들이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냈다는 것이었다.
“레머 씨, 무슨…. 문제점이라도 찾아냈습니까?”
“우리가 지원한 물자 중에 무기와 탄약을 제외한 다른 모든 물자가 국민당 정부를 통해서 시장으로 팔려나가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럼, 비전투용 물자를 전부 시장에 팔았다는 말입니까?”
“예, 내가 조사한 결과는 그렇습니다.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는 그래놓고도 우리한테 물자가 부족하다고 매일 징징거렸습니다.”
“혹시, 뭔가 오해가 있는 것은 아니고요?”
“오해는 없었습니다. 나도 조사를 하면서 설마 전부를 다 풀었을까 하는 마음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중화민국 국민당에 대해서 좋게 포장을 했던 나만 실없는 사람이 돼버렸다.
그런데, 찰스 레머의 표정을 보아하니 진짜로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COI 도너번 국장에게 어떻게 보고할 생각입니까?”
“나는 있는 그대로 보고를 할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더는 국민당 정부만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미국 조사단을 돕기 위해서 함께 온 내 입장에서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조지 씨, 조금 있다가 공산당의 저우언라이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때 함께 만나주시겠습니까?”
“예, 내가 중화민국에 온 이유가 바로 레머 씨의 일을 돕기 위한 건데 그렇게 하시죠.”
“알겠습니다. 그럼 30분 후에 봅시다.”
중국 역사를 좀 바꿔놓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미국이 중화민국 국민당과 공산당을 처리하는 문제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오랜만입니다.”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청하는 자신감 넘치는 저우언라이의 얼굴을 보니까 이미 이 자리에 오기 전에 COI와 어느 정도 접촉을 통해서 이견을 조율한 느낌이었다.
“예, 저우언라이 위원장, 오랜만입니다.”
확실히 저우언라이는 국민당 쪽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회담 상대를 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우리 중국 공산당 홍군은 그동안…. 전투에서 일본군 병력을…. 이렇게 우리 중국 공산당 홍군은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서로 간의 인사를 끝내고 자리에 앉자마자 저우언라이는 그동안 공산당 홍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어떤 전과를 올렸는지 있지도 않은 사실을 날조하면서 장황하게 설명하기 바빴다.
저우언라이의 모습은 마치 하청 업체가 원청 업체에 자신들의 실적을 부풀려서 계약을 따내기 위해서 선전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 지금 홍군의 전력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 홍군은 지난날의 아픔을 뒤로 하고 빠르게 전력을 회복해서 현재는 100만 명의 병력을….”
저우언라이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 같아서 중간에 내가 나서서 끊었다.
“그냥 현재 실제로 전투가 가능한 병력의 숫자만 알려주면 됩니다.”
“병력은 100만 명이 넘지만, 무기와 장비가 부족해서 실제 전투가 가능한 병력은 20만 명 정도입니다.”
“이야! 정말 대단하네요.”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몇 년 동안 끝장을 보는 심정으로 다 두들겨 잡아서 마지막에는 5천여 명에서 1만 명 정도가 남았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 불과 몇 년 전인데 그사이에 이렇게 숫자가 불어나 있었다.
‘조만간 중국은 어떤 형태로든 다시 내전이 벌어지겠구나. 만약, 이 상태에서 미국의 지원까지 받게 된다면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국민당이 큰일 나겠는데’
“그래서 저우언라이 위원장, 일본군과 몇 번이나 전투를 한 겁니까?”
“좀 전에 내가 말했잖습니까?”
“에이…. 그건 홍군에서만 주장하는 것이고 일본군 전투 기록을 내가 다 알고 있는데….”
COI의 극동 담당인 찰스 레머가 조사단장으로 혼자서 왔다면 저우언라이의 말에 속아 넘어갔겠지만, 중국 공산당에게는 불행하게도 내가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었다.
“저우언라이 위원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정보대에서는 현재 중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전투 상황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
“그러니까 웬만하시면 사실대로 말씀해주십시오. 처음부터 상대를 속이기 시작하면 속은 상대는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절대 상대를 믿지 않게 됩니다.”
“크흠…. 사실은 우리 홍군은 무기와 장비가 부족해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규모 전투는 할 수가 없었고 자잘한 게릴라 전투밖에는 치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미국이 제대로 지원만 해준다면 지금부터라도 일본군과 본격적인 전투를 치를 겁니다.”
그때부터 저우언라이는 사실에 입각한 자료를 가지고 찰스 레머와 지원 협상을 하기 시작했다.
적극적인 자세로 중국 공산당과의 협상에 임하는 찰스 레머의 태도를 보아하니 미국은 중화민국 국민당에 실망을 많이 한 것 같다는 것이 느껴졌다.
‘중국 공산당이 미국이 지원한 무기로 일본군과 싸울 일은 없을 텐데, 이제는 진짜 국공내전까지는 멀지 않았구나.’
저우언라이 뒤에서 저우언라이를 호위하듯이 지키고 서 있는 리커눙 중국 공산당 조직국장을 쳐다보면서 다가올 냉전의 시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위한 최선일까?’
미국은 전후 중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국민당 정권을 지원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미국의 경제 지원 우선순위에서 대한민국은 뒤로 밀려나게 된다.
그럼, 대한민국의 발전은 분명히 더뎌질 것이다.
그렇다고 국민당 정권을 나 몰라라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중화민국이 공산화가 돼버린다면 미국은 우리나라는 공산화를 막는 최전선으로 설정하고 일본을 우리나라를 지원하는 후방 기지로 만들 것이다.
‘우리나라가 독립하더라도 취약한 산업 기반을 닦을 시간이 필요한데…. 아무리 못해도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데 어떡해야 할까?’
딜레마였다.
국민당 정권이 중국 본토에서 오랜 시간 동안 버티는 것이 좋은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너무 빨리 무너지는 것도 우리나라에는 하등 좋을 이유가 없었다.
다만 한가지, 국민당과 공산당이 오래도록 싸우는 것이 우리나라에는 유리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양쪽의 정보 총책임자들이 사라지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국민당은 단번에 타격을 받겠지만 공산당은 저우언라이가 있어서 어느 정도는 커버가 되겠지? 리커눙을 제거할까?’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리커눙을 반드시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저우언라이와 찰스 레머의 협상을 끝까지 지켜봤다.
“조지 씨, 당신이 지금까지 봐왔던 중국 공산당은 어떻습니까?”
“이번에도 미국은 쥐새끼들에게 식량만 제공해 준 꼴일 겁니다.”
“그럼, 왜 말리지 않았습니까?”
“중국 공산당을 지원함으로써 중화민국 국민당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을 테니까요.”
내가 왜 말리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게 된 찰스 레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하더니
“그렇다면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은 최소한으로 제한을 해야 하겠군요?”
“미국이 아무리 많은 지원을 해도 중국 공산당은 일본군과 싸우지 않을 겁니다. 그들의 최종 목표는 중국을 공산화하는 것이 목표일 뿐입니다.”
“음….”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충고 하나 하자면 COI 현지 요원들은 이미 중국 공산당과 어느 정도는 커넥션이 연결된 것 같습니다. 중국 파견 요원들을 교체하든지 아니면 조직에서 내보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FBI의 에드거 후버 국장의 공격을 받을 겁니다.”
“흐음….”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의미를 깨달은 찰스 레머는 신음을 흘리면서 인상이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