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다시 뭉친 사람들
김경천 대령의 설명에 맥아더 사령관의 지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광복군 지휘관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김 대령님, 그럼 우리 광복군 전체가 하와이로 이동합니까?”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네.”
“그렇다면 미국은 더는 필리핀을 지킬 생각이 없다는 거군요?”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아닌 것 같아. 맥아더 사령관은 지원만 제대로 해준다면 필리핀을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한 모양이야.”
“하하, 정말입니까? 정말로 맥아더 사령관이 그렇게 상부에 보고를 했답니까?”
실제로 일본군과 전투를 해봤던 육군과 항공대 지휘관들이 비웃음을 지으면서 정말로 맥아더 사령관이 그렇게 보고를 했는지 묻자, 김경천 대령은 그저 희미하게 미소를 짓더니
“진짜로 맥아더 사령관이 워싱턴에 그렇게 보고를 했다고 하더군.”
“미쳤군요. 우리가 보기에는 미군 10만이 있어도 일본군 1개 사단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할 것처럼 보이던데.”
“그만들 하게. 필리핀은 이미 우리 손에서는 떠난 일이네. 그러니까 더는 맥아더 사령관을 모욕하는 일은 없기를 바라네.”
김경천 대령의 일침에 광복군 주요 지휘관들은 맥아더 사령관과 미국 극동군의 전투력에 대한 비웃음 거뒀다.
“저, 연대장님. 그럼, 우리는 하와이에 가서 뭘 하는 겁니까? 설마, 하와이섬 경비나 서라고 우리를 부르지는 않겠죠?”
“우리도 이번에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 같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마, 태평양 함대와 함께 일본군의 허를 찌르는 작전을 계속해서 진행할 확률이 높다.”
김경천 대령의 말에 지휘관 대부분은 일본군의 허를 찌르는 작전이란 것이 어떤 작전을 말하는 것인지 다들 눈치를 챈 모습이었다.
“앞으로는 진짜 많이 죽거나 다치겠군요?”
“아마 그렇겠지….”
* * *
광복군 지휘관들이 불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미국 극동군 사령부와 필리핀 국방군은 다행히도 라몬 만에 상륙한 일본군 16사단을 어찌어찌 막아냈다.
그리고, 미국 합동참모회의에서 내려온 명령에 따라서 광복군 항공대는 B-17 폭격기를 나눠타고 모두 중화민국 쿤밍을 향해서 날아갔고, 광복군 육군은 광복군 해군 함정과 태평양 함대의 지원함들 이용해서 일단 오스트레일리아로 철수를 했다.
광복군 항공대와 광복군 육군이 필리핀에서 빠져나간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미국 합동참모회의는 태평양 함대로 하여금 항공모함으로 전투기와 조종사들의 배달을 명령함으로써 도쿄 폭격 작전은 온전히 중화민국에서 출격하는 작전으로 바뀌게 됐다.
“유자명 정보 대장님,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도쿄 폭격 작전에 차출된 광복군 항공대는 박하성 소령의 지휘 아래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출발해 쿤밍을 거쳐서 충칭으로 다시 돌아온 상태였다.
그런 박하성 소령에게 미국 합동참모회의에서는 미군 항공대를 이끌고 도쿄 폭격 작전을 지휘할 새로운 지휘관이 곧 도착할 테니까 그때까지는 중화민국 정부의 관료와 군인들과의 만남을 일절 자제하고 도쿄 폭격에 대한 언급은 절대 하지 말라는 명령문이 전달됐다.
“박하성 소령, 그 명령문은 이렇게 해석하면 될 거예요. 일단, 기본적으로 미국 정부는 중화민국의 장제스 정부를 믿지 않습니다.”
“유자명 정보 대장님, 저는 정치는 잘 모르지만 지금 미국보다는 중화민국이 더 치열하게 일본군과 맞서 싸우고 있는 것 아닌가요?”
“맞아. 하지만, 미국 정부가 봤을 때 중화민국은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말이겠지. 그것이 아니라면 이번 기회에 잠재적인 경쟁국의 힘을 빼놓을 생각일 수도 있고.”
“중화민국이 미국의 잠재적인 경쟁국입니까?”
“박 소령, 내가 미국 정부의 생각을 어떻게 알겠나? 하지만, 미국이 소련과 영국을 대하는 것을 보면 가끔 그렇게 판단이 될 때도 있네.”
박하성 소령이 전달받은 명령문에는 제임스 둘리틀 중령이 이끄는 미군 항공대가 조만간 도착할 것이고 그들이 도착하면 바로 도쿄 폭격 작전을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중일전쟁은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결정적인 배경이 되는 전쟁으로 무타구치 렌야라는 훌륭한 분의 멋진 판단이 있지 않았다면 중일전쟁을 시발점으로 일본의 패망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로도 욕심 많은 일본의 지도자들은 이솝우화의 그 미련한 원숭이처럼 끝까지 중화민국에 대한 영토적 야욕을 포기하지 못했고, 그 덕분에 일본 육군 절대다수의 병력은 중국과 만주 전선에 묶여 있어야만 했다.
누구나 다 알듯이 중일전쟁은 일본 육군이 주도해서 일으킨 전쟁이었고, 태평양 전쟁은 일본 해군이 주도한 전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 육군의 주된 관심사는 중국과 만주 일대였다.
일본 육군의 관심 대상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머나먼 태평양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들이 전혀 아니라는 소리였다.
태평양 전쟁 초중반, 일본 해군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지상군 병력이 있어야 하는 전장에 대해서도 일본 육군은 그다지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태평양 방면의 병력 파견 규모도 작전 구역의 면적에 대비해서 생각해 보면 중국과 만주에 투입된 병력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처음 해군과 협력한 태평양 전쟁 개전 직후를 제외하고는 미군 지상군과 맞붙은 전장에서 일본군의 지상군 병력이 미군 지상군 병력을 수적으로 능가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이로 인해 태평양 전쟁에서의 지상전 양상은 대부분 '밀어붙이는 미군과 밀리는 일본군'이라는 구도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전투는 대개 패배로 이어졌고 패배한 지역 일대의 제해권, 제공권의 영구 상실로 이어지면서 일본의 빠른 패망으로 이어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마디로 중화민국의 저항이 없다면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상당히 많이 힘들 텐데도 미국은 중화민국을 지원하고 돕는 것에 굉장히 인색했다.
“박 소령,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닙니다. 저는 우리도 이런 취급을 받을까 봐서 두려운 겁니다.”
“음….”
“이번에 필리핀에서 맥아더 사령관이 하는 짓을 보고 많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미국만을 전적으로 믿고 있다가는 나중에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하성 소령은 그동안 필리핀에서 있었던 일들을 유자명에게 이야기를 해줬다.
그리고, 박하성 소령의 이야기를 들은 유자명의 표정은 점점 심각하게 변해갔다.
“결국은 조지 대장이 예상한 대로군.”
“정보 대장님께는 조지 대장님이 뭔가 이야기를 해주신 것이 있습니까?”
“아! 혹시, 박 소령도 국내 진공 작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나?”
“예, 이번에 필리핀을 떠나기 전에 김경천 대령님께서 앞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진행할 수도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미 박하성 소령이 국내 진공 작전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유자명은 나머지 이야기를 해줘도 되나 잠시 고민을 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지금 국내에서는 윤봉길 유격대장과 백정기 정보 대장이 광복군의 국내 진공에 대비해서 청년들을 훈련시키고 있네. 앞으로 2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최소한 각 지역의 경찰서 정도는 장악할 수 있게 조직을 만들고 있네.”
“일본 경찰이 두 눈을 시뻘겋게 뜨고 있는데 그것이 가능합니까?”
“자네가 필리핀에 있는 동안 조선 내에서도 일들이 좀 많았네. 조선인 순사들을 우리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였더니 이제는 목숨이 아까워서 아무도 순사를 하려고 하질 않으니까 일본 경찰과 총독부의 정보 조직이 무너진 상태네.”
“겨우 그것으로 청년들이 군사 훈련을 받는 것을 감출 수가 있었습니까?”
“일본 경찰과 총독부의 정보 조직이 건재할 때는 상관이 없었겠지만 일단 조직이 무너진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빈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네.”
“국내에 계신 분들도 고생이 많으시군요?”
“국내도 국외도 다들 힘들지. 나라를 잃으면 이렇게 고생한다는 것을 나라를 다시 찾으면 두고두고 잊지 않게 만들어야지.”
“정말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두 번 다시는 나라를 잃으면 안 됩니다.”
* * *
루스벨트 대통령의 독촉과 함께 미국인들의 분위기 반전이 시급하다고 느낀 미국 합동참모회의의 윌리엄 리히 제독의 명령으로 제임스 둘리틀 중령과 함께 50여 명의 베테랑 조종사가 B-17 폭격기를 몰고 버마-쿤밍-충칭 항로를 통해서 도착했다.
“둘리틀 교관님, 충칭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박하성 소령은 캘리포니아 윌로우스 항공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제임스 둘리틀 중령과는 인연이 깊었다.
“그래, 박 소령은 잘 지냈나?”
“예, 교관님께 잘 배운 덕분에 지금까지 안 죽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박 소령, 아무리 죽음이 곁에 있어도 죽음을 입에 담지 말게. 그러다가 진짜 죽음을 만날 수 있네. 알겠지?”
“예, 교관님.”
“참! 우리가 만난 지가 벌써 10년이 넘은 건가?”
“예,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우리가 10년 만에 다시 만나서 자네들의 소원을 함께 이뤄주겠군.”
“생각해 보니까 정말 그렇군요. 10년 전에 우리의 소원이 히로히토의 머리 위에 폭탄을 떨구는 것이었는데 드디어 교관님과 함께 그 소원을 이루겠군요?”
“이번 일을 같이 멋지게 해치우자고.”
“예, 둘리틀 교관님.”
도쿄 폭격대 대장인 둘리틀 중령은 박하성 소령과 함께 충칭에서 도쿄로 향하는 항로를 세심하게 점검했고 임시 비행장과 보충 유류의 양도 충분한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작전 당일 기상은 어떻게 예상된다고 하던가?”
기상은 인간 생활 여러 곳에 많은 영향을 준다.
특히, 전쟁 상황에서는 기상 상황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면 크게 낭패를 보거나 전투에서 패배를 할 수도 있었다.
“출격 당일 기상은 다행히 나쁘지 않다고 합니다.”
“나쁘지 않다는 것은 맑고 쾌청한 날씨는 아니라는 소리지?”
“예.”
“그나마 다행인 건가? 일본 상공의 기상은?”
“일본 상공의 기상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기류는 봄이라서 그런지 변동이 심하다고 합니다.”
“고공 폭격은 물 건너갔군,”
이 당시까지만 해도 미군 항공대는 대부분이 교범에 실린 대로 고공에서 폭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저…. 둘리틀 교관님, 우리 항공대는 고공 폭격을 할 줄 모릅니다. 고공 폭격은 폭격의 정확도가 너무 떨어져서 우리는 금지했습니다.”
“폭격의 정확도가 떨어지는 것이 폭격 조준기 정밀도 때문은 아니고?”
“아닙니다. 고공에서는 기류 변화가 워낙 심해서 폭격 조준기가 있어도 정확한 폭격 지점에 폭격하기는 어렵습니다.”
“흠…. 그렇다는 말이지….”
둘리틀 중령이 미국 항공대에서 이름을 날리는 유명한 곡예 조종사지만 실제 폭격은 박하성 소령이 훨씬 더 경험이 많았다.
둘리틀 중령은 박하성 소령의 경험을 믿기로 하고 저공 정밀 폭격을 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박 소령, 확실히 일본군은 레이다를 운용하지 않는 것이 맞나?”
“어제도 제가 직접 확인을 했습니다. 우리 폭격대가 도쿄를 가는 동안 일본군 초계기에 노출되지 않는 이상 이 폭격 작전은 절대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박하성 소령의 얼굴을 보면서 둘리틀 중령은 마지막에 비상 탈출하는 조종사들이 전원 구조만 된다면 이 작전은 절대 실패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