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연락이 왔다. 모두 이동 준비해라
북쪽과 남쪽으로부터 동시에 마닐라를 공격하겠다는 일본 제14군의 ‘M’ 계획에 따라 모리오카 스스무 중장이 지휘하는 제16사단은 1941년 12월 17일에 류큐 제도의 아마미오시마를 떠나서 링가옌 만에서 남동쪽으로 360km 떨어진 라몬만을 향해 6일간의 항해를 시작했다.
일본 제14군 라몬만 상륙부대는 링가옌만의 상륙부대에 비하면 전력이 많이 약했다.
전투부대는 제16사단(보병 제9 및 제33연대 감편)의 보병 3개 대대, 야포병 2개 대대를 중심으로 약 7,000명뿐이고 그 외에는 약간의 지원부대뿐이었다.
라몬만 상륙을 준비 중인 제16사단은 마우반, 아티모난, 시아인 등 동시에 3곳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일단 상륙한 부대는 후속하는 지원부대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내륙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일본군 제16사단의 주력은 1번 도로를 따라 진격하여 카비테를 점령하고 이어서 남쪽에서 마닐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겨우 7,000명 정도밖에 안 된다는 일본군의 상륙을 막아내지 못해서 저렇게 쩔쩔매는 것을 보고 있자니 진짜 한심하다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저런 실력으로 미국이 진짜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는 있을까요?”
필리핀 공략의 주력 병력인 링가옌만 상륙 병력을 괴멸시키고, 맥아더 사령관을 돕기 위해서 라몬 만으로 병력을 이동시킨 광복군 장교들은 맥아더 사령관의 지휘를 받는 미국 극동군 사령부 직할 4개 사단 병력의 전투 장면을 보면서 혀를 찼다.
광복군과 필리핀 레인저 연대는 겨우 두 개 연대 병력으로 링가옌 만에 상륙한 일본군 1개 사단 이상을 물리쳤는데, 이쪽은 반대로 4개 사단 병력이 겨우 여단급 일본군 병력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일단, 여기 라몬 만을 정리하면 일본군의 후속 상륙부대가 올 때까지는 좀 조용하겠지.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잠시 쉬면서 대기해라. 나는 일단 맥아더 사령관을 만나고 오겠다.”
김경천 대령이 보기에도 한심한 미군의 상태를 지켜보면서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런 말들이 미군들의 귀에 들어가면 서로 관계가 불편해질 수 있어서 입단속을 시켰다.
“연대장님, 웬만하면 이곳 전투만큼은 미군들에게 끝까지 책임지라고 하십시오. 싸움도 계속해봐야만 실력이 늘어납니다.”
“나도 잘 안다. 그러니까 괜한 말들을 해서 미군과 서로 사이가 벌어질 일 만들지 말고 다들 애들 입단속을 좀 시켜라.”
“예, 알겠습니다.”
김경천 대령의 말에 광복군 지휘관들은 더는 무능하고 실력이 없는 미군을 비난하지 않고 자신들이 지휘하는 병사들 곁으로 흩어졌다.
“김 대령, 어서 와. 고생했다는 말 들었어요.”
현재, 김경천 대령의 광복군이 명확하게 미국 육군 극동군 사령부의 지휘를 받는 군대가 아니기 때문에 서덜랜드 참모장은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김경천 대령을 애메모호한 말투를 써서 반갑게 맞아 줬다.
하지만, 서덜랜드 참모장과는 다르게 맥아더 사령관은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없어서인지 김경천 대령을 보고도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전투 상황판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링가옌 만에 상륙한 일본군 48사단은 대부분 정리했고, 도망친 일본군 잔여 병력은 필리핀 레인저 연대가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래? 링가옌 만에 상륙한 병력을 깔끔하게 정리해줘서 정말 고맙네.”
그리고, 맥아더 사령관의 눈치를 살피더니 김경천 대령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고 속삭였다.
“김 대령. 정말 고맙네. 만약, 링가옌 만에서 막아내지 못했다면 우리는 바탄반도로 쫓겨 들어갔을 거네.”
“참모장님, 아닙니다. 일본군은 어차피 우리 광복군의 적이잖습니까?”
“아니야. 그래도 고맙네. 그리고, 여기는 잠시 휴식하고 기운을 차리면 그때 부탁을 좀 하겠네.”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극동군 4개 사단이 일본군 1개 여단도 막아내지 못한다면 그건 우리 명예가 걸린 문제네.”
불감청 고소원이라고 김경천 대령은 막상 지원을 오기는 왔지만, 사실 전투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링가옌만의 전투에서 광복군 사상자가 여럿이 발생한 상황이어서 더는 의미 없는 희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맥아더 사령관이 입을 열면서 서덜랜드 참모장이 어째서 광복군의 전투 참여를 막았는지 알 수 있게 됐다.
“이봐! 김 대령. 조지가 워싱턴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가?”
“예?”
선글라스를 쓴 맥아더 사령관의 눈빛을 알 수는 없지만, 말투가 그리 좋지 않은 것을 봤을 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야?”
“저는 사령관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야?”
“예.”
“그럼, 조지, 이 자식이 내 뒤통수를 친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맥아더 사령관이 저러는 걸 보니까 조지 씨가 말했던 대로 미국 정부와의 협상이 성공했나 보군.’
사실, 조지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광복군을 지휘해야 하는 김경천 대령에게는 미국에 가서 자기가 하려는 일을 미리 알려줬었다.
“광복군은 앞으로 모든 전투에서 배제한다.”
“예? 사령관님 어째서 갑자기 그런 명령을 하시는 겁니까?”
“광복군이 원했던 것이 이것이 아니었나? 그래서, 워싱턴에까지 가서 조지가 공작한 것 아닌가?”
“사령관님,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흥! 일단, 광복군의 전투 참여는 없다. 그리고, 광복군은 모두 부대이동을 준비해.”
“예?”
“뭐가 ‘예’야? 너희들이 원하는 것이 이거잖아?”
맥아더 사령관의 입에서 막말 비슷한 것이 나오는 것을 봤을 때 조지가 워싱턴에서 벌인 일이 크게 성공한 것 같았다.
그리고, 맥아더 사령관은 서덜랜드 참모장을 보면서
“서덜랜드, 앞으로 광복군은 전투에서 배제하고 부대이동을 준비시켜. 그리고, 태평양 함대에서 연락이 오면 내 눈에서 빨리 치워버려.”
‘개새끼! 지가 필요할 때는 우리를 이용해 먹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더니 막상은 남의 손에 우리가 넘어가니까 아예 모르는 척을 하겠다는 거네.’
김경천 대령은 맥아더 사령관실에 더 있어 봐야 서로 마음만 상할 것 같아서 문을 열고 나왔다.
그렇게 문을 열고 나가는 김경천 대령을 서덜랜드 참모장이 따라 나왔다.
“이봐! 김 대령. 사령관님의 말을 너무 마음에 두지 말게.”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워싱턴에서 어떤 연락이 왔길래 맥아더 사령관이 저러는 겁니까?”
“워싱턴에서 광복군을 태평양 함대 소속의 지원군으로 분류를 했어.”
“태평양 함대 소속이요?”
“그래, 김 대령은 워싱턴 일을 정말로 모르고 있었던 것인가?”
“예, 도대체 워싱턴에서 무슨 명령에 내려왔길래 맥아더 사령관이 저렇게 노발대발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김경천 대령은 대충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지만, 조지가 자세하게 설명해준 것은 또 아니었다.
“김 대령, 혹시, 광복군에 잠수함 전단도 있었던 거요?”
“우리 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으로 각각의 군별로 따로 운영되기 때문에 해군이 어떤 전력을 가졌는지는 육군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거야 우리 미군도 마찬가진데…. 아무튼, 워싱턴의 결정은 광복군은 앞으로 태평양 함대를 지원하라고 하니까 맥아더 사령관님은 화를 내시는 거요. 지금까지 광복군을 보호하고 지원한 것은 우리 미국육군 극동군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너희 극동군이 우리를 보호하고 지원했다고? 나는 서덜랜드 참모장은 그래도 좀 나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군.’
김경천 대령의 속마음을 모르는 서덜랜드 참모장은 워싱턴의 결정에 맥아더 사령관이 반발하는 이유를 은근히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서덜랜드 참모장은 하는 짓이 확실히 아이젠하워하고는 달랐다.
“그래서, 우리 광복군에게 도대체 뭘 하라는 겁니까?”
“극동군 사령부 앞으로 따로 자세한 명령이 내려온 것은 없어요. 그저 광복군을 더는 전투에 투입하지 말고 대기시키고, 항공대 조종사들은 특히 건강 관리에 신경을 쓰라는 것 빼고는….”
‘조지 대장의 예상처럼 진짜 도쿄를 대대적으로 폭격하기로 한 모양이구나. 좋았어! 그럼, 이제 우리 힘으로 국내로 진공도 정말 가능하겠구나.’
“워싱턴에서 그런 명령이 내려졌다고 해도 언제든지 우리 전력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십시오. 어차피 일본군은 우리 광복군의 적이자, 원수입니다.”
“김 대령, 말이라도 고마워. 상륙한 일본군은 겨우 1개 여단인데 저것도 방어하지 못하면 안 되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가서 쉬어요.”
일본과 전쟁이 터지면서 미군은 계급을 최소 두 단계 많으면 몇 단계를 한 번에 진급을 시키는 바람에 얼마 전까지 비슷한 계급이었던 두 사람은 지금은 계급 차이가 갑자기 벌어지면서 서덜랜드 참모장의 말투가 상당히 어색했다.
* * *
김경천 대령은 맥아더 사령관과 서덜랜드 참모장을 만나고 돌아와서 광복군의 모든 지휘관을 모이게 했다.
“자, 다들 많이 궁금할 테니까 먼저 맥아더 사령관과의 면담 내용부터 알려주겠다.”
광복군 육군과 해군 그리고 항공대의 모든 지휘관의 시선이 김경천 대령에게 향했다.
“우리는 워싱턴의 결정으로 당분간 전투에서 배제됐다.”
“예? 연대장님. 그럼, 라몬 만에 상륙한 일본군은 어떡합니까?”
“그것은 미국 극동군과 필리핀 국방군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다. 혹시,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우리가 출동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너무 퍼지지는 말고 다들 어느 정도 긴장감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한다.”
“항공대도 마찬가지입니까?”
“항공대는 특별히 더한 명령이 내려왔어. 앞으로 전투에는 절대 참여하지 말게.”
“정말로 마닐라시를 방어하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미군이나 필리핀군은 믿을 수가 없는데.”
“정 힘들겠다 싶으면 우리가 주둔하는 지역만 방어해주게.”
“알겠습니다. 우리도 웬만하면 쉬고 싶은데, 미군과 필리핀군이 도저히 믿을만한 실력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아네.”
김경천 대령이 걱정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필리핀에서 광복군 전력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 십중팔구 맥아더의 극동군 사령부와 필리핀 국방군의 전력으로는 다음에 들이닥칠 일본군을 절대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맥아더 사령관 역시도 잘 알고 있어서 조지가 워싱턴에서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고 길길이 날뛰는 것이었다.
“김 대령님, 그럼, 우리는 휴식을 취하고 그다음에는 무엇을 합니까?”
방공 구축함대장인 최선학 중령이 다음 작전은 어찌 되는지 물어왔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절대로 비밀을 엄수해야 합니다.”
“........”
김경천 대령은 지휘관들의 얼굴을 일일이 한 번씩 쳐다보면서 비밀을 지킬 것을 다짐할 건지 확인을 하고 입을 열었다.
“조지 대장의 예상대로 우리 항공대는 도쿄를 공습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광복군 육군과 해병대 그리고 해군은 미국 태평양 함대를 지원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