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우리는 할 만큼 했습니다
“그럼, 조지, 내가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나?”
일본과 갑작스러운 전쟁 발발로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 태산같이 많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붙잡고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이 자리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바로 알아들을 수 있게 간단하게 정리해서 그의 동의를 받아내야만 했다.
“대통령 각하, 약속을 하나만 해주십시오.”
“약속? 무슨 약속을 말하는 건가?”
“대통령 각하! 이번에는 미국의 이익만을 위해서 조선인들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 하나만 해주십시오. 조선인들이 또 배신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없이 스스로 힘으로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자랑스럽게 일본과 싸울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 이 말은 솔직히 나로서는 크나큰 모험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자칫 잘못 받아드린다면 내가 그동안 루스벨트 대통령과 쌓아왔던 신뢰의 관계가 한꺼번에 깨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이봐. 조지, 조지 자네와 내가 아무리 친분이 있고 내가 조지 자네를 신임한다고 하지만, 나는 지금 미합중국의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네. 그런데, 그런 내가 지키지 못할 수도 있는 약속을 미리 해달라는 건가?”
“아닙니다. 각하께서는 이미 영국의 처칠 수상과 함께 대서양 헌장을 발표하지 않으셨습니까? 대서양 헌장의 제2조와 제3조, ‘영토 변경은 당사국 국민의 의사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모든 민족은 자결권을 가지고 있다.’ 이 약속만큼은 꼭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시면 됩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친분이 두터운 내가 나중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약속을 강요하자 난처한 표정을 지은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어쩌면 이번 기회를 빌려서 나를 손절할 수도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아시아인 출신의 유능한 후원자들은 나 말고도 많이 있었다.
특히, 돈 많은 중화민국 출신의 후원자들은 나 하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런 아시아인 후원자들의 의견과 주장을 모두 들어줄 수 있는 형편은 아닐 것이고, 사실 무역과 투자를 해야 하는 유럽보다 돈이 되지 않는 아시아에는 별로 관심도 없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모든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라도 최소한의 약속을 받아 내고 싶었다.
“조지,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서명한 대서양 헌장을 어길 생각은 없네. 이제는 됐나?”
“감사합니다. 대통령 각하! 저는 각하께서 약속하셨으니까 제가 후원하는 조선인들에게 1879년 이전으로 모든 것이 되돌아간다고 말하겠습니다.”
내 대답이 끝나자 루스벨트 대통령의 얼굴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1879년? 조지, 그건 또 무슨 뜻이지?”
“각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아시아는 1879년부터 일본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우리 조선 민족 이외의 다른 아시아 민족들에게도 모두가 민족 자결권이 있다면, 모든 것은 반드시 1879년 이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시아 민족들에게 선전함으로써 일본과의 전쟁에서 동료를 하나라도 더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선언을 하듯이 1879년 이전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표정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바뀐 채 1879년의 의미를 되물었다.
“1879년에 아시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는 건가? 그리고, 내가 그렇게 선언함으로써 일본과의 전쟁에 도움이 된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야?”
역시나 루스벨트 대통령의 질문을 보아도 미국 대통령들에게 있어서 아시아 일은 그들이 그다지 중요한 생각하는 일이 아니었다.
“각하! 오키나와가 1879년 3월 11일에 일본에 합병이 됐습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서 분리가 된다면 일본은 전쟁에서 무조건 패배합니다.”
“오키나와?”
“예, 각하.”
“오키나와의 일본합병이 1879년이라는 말이지?”
“예.”
루스벨트 대통령은 1879년에 오키나와가 일본에 합병됐다는 말에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는지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고, 오키나와 사람들이 조선인들처럼 독립을 위해서 본격적으로 일본과 투쟁을 시작한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머릿속으로 그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미소를 살짝 지으면서 나를 쳐다봤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모든 것을 1879년 이전으로 돌리겠다고 확실하게 대답해줄 수는 없네. 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그 사실을 기억하겠다는 것은 자네한테 약속하지.”
“감사합니다. 각하.”
루스벨트 대통령이 기억하겠다고 대답한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었다.
누군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왜 약속받지 못 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현재 상태에서는 전혀 기대할 수가 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미국은 절대로 우리나라를 위해서 공짜로 일해 줄 나라가 아니다.
우리가 미국을 위해서 뭘 하나라도 도움을 주고 대가를 바래야 하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미국을 위해서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며칠이 지나면 미국은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이라는 존재를 제대로 알게 될 일이 생길 것이다.
그때부터는 우리 민족의 요구를 하나씩 주장할 생각이었다.
* * *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고 난 후 나는 중국에 머무르는 동안 직접 살피지 못했던 뤄리리-하둔 재단의 자금 운용 상태를 살폈고, 루스벨트 대통령의 행정명령 9066호에 대비해서 주미 동포들이 일본인으로 취급받아서 피해를 보지 않게 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리고, 미래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주미 동포들 가운데 사업에 성공한 사람들과 만남을 가졌다.
“김호 사장님, 조만간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인들의 통제를 위해서 행정명령을 발동할 것 같습니다. 대한인국민회는 그에 대해 대비를 해야 할 겁니다.”
“대통령 행정명령이라면 어떤 식의 행정명령입니까?”
“일본인이라면 이민 1세대 2세대 3세대를 가리지 않고 모두 수용소에 수용될 것 같습니다.”
“수용소요? 아니, 그게 미국에서 가능한 일입니까?”
“아시지 않습니까? 아시아인은 유럽인이 아닙니다.”
“허….”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동등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 투쟁해 나가야 하겠지만, 지금은 일단 일본인으로 몰려서 피해를 보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객지에서 고생하는 동포들인데 일본인으로 몰려서 수용소로 끌려갈 수는 없죠.”
“예, 다들 피해 보지 않게 카운티 사무소에 찾아가서 조선 출신이라는 것을 증명해 놓으라고 하십시오.”
또 일본 덕분에 고생하게 된 동포를 걱정하면서 한숨을 내쉬는 김호 사장과 유일한 사장을 보면서 준비한 이야기를 꺼냈다.
“김호 사장님, 그리고 유일한 사장님, 이제 두 분은 조국이 해방되고 나면 산업의 기반이 될 사업들을 지금부터 미리 준비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로 우리나라가 곧 해방되기는 됩니까? 전쟁 중이라서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의 독립은 진짜 몇 년 남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국가 지도부는 승승장구하는 독일의 국력과 전력을 과대평가했고 반대로 영국과 미국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작은 문제에 강한 일본의 국가 지도부들은 역사가 생긴 이래로 언제나 이런 식의 외교적인 오판을 자주 했다.
그래서, 급변하는 상황에서 전시 외교에 실패했고 국가와 국민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는 영국과 미국의 도움을 받아 겨우 이겼으면서 마름 주제에 주인 격인 영국과 미국을 적으로 돌린 것이다.
더구나 전쟁을 일으킬 당시 일본은 석유 등 중요한 전략물자의 수입은 전적으로 미국 회사에 의존하고 있었다.
거대한 중화민국을 침략하고 있는 와중에 더 거대한 강대국들과 전쟁을 벌였다는 것은 망조가 들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영국과 미국이 두려워할 만한 전력을 가진 연합함대를 가지고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연합함대를 앞세워 전쟁을 일으키면서 스스로가 패망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제발, 어서 그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날이 이제 머지않았습니다. 그리니까 우리는 우리 인민들 모두가 같이 잘 살아갈 수 있게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조지 사장, 우리가 가긴 자금이 풍족하다면 뭐든지 할 수 있지만, 우리가 가진 자금은 그리 많은 것이 아닙니다.”
“뤄리리-하둔 재단이 가진 자금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 주십시오. 그리고, 조선 내의 후라카와 그룹의 공장은 사실은 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예? 조지 사장님! 그게 정말입니까? 아니, 어떻게 일본의 침략 전쟁을 돕는 회사를 조지 사장님이 만들 수 있습니까?”
“괜한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후루카와 그룹이 지금은 일본의 침략 전쟁을 돕고 있지만, 해방 후를 생각하고 미리 지은 공장들입니다. 우리가 당장 해방되더라도 우리나라를 도와줄 나라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일본과 독일의 힘을 빌려서 공장을 미리 지어 놓은 겁니다.”
사실, 돈이 있다고 해도 현재 상태에서 대한민국이 단기간에 산업 발전을 이룰 수는 없었다.
외국의 지원과 차관으로 공장과 기계를 수입해 들일 수는 있지만, 그것을 운영할 기술자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본이 패망하기 전에 일본과 독일 기술자들의 힘으로 공장을 지은 것이고 독일과 일본인 기술자들의 힘을 빌려서 조선인 기술자들을 교육하고 있었다.
* * *
며칠을 대한인국민회의 김호 선생과 그리고 유일한과 대한민국 경제 재건 프로그램을 만들고 김규식 선생과는 영국 정부를 상대할 방법을 의논하고 있는 도중에 백악관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나를 다시 만나자고 불렀다.
‘필리핀에서 미군이 승리했구나. 정말 다행이다. 그런데, 우리 광복군은 이번 전투에서 또 얼마나 피해를 보았을까?’
이제부터는 우리도 미국 정부에 뭔가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겠다는 생각과 그 요구를 하기 위해서 희생된 광복군 장병들의 얼굴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백악관 2층 대통령 집무실 옆의 작은 회의실.
항상 그랬듯이 오늘 밤에도 나와 김규식을 마중해준 사람은 해리 홉킨스 보좌관이었다.
“홉킨스 보좌관님, 오늘도 늦게까지 일하고 계시는군요?”
“두 분 어서 와요. 아! 대통령 각하께서 아직 업무가 끝나지 않아서 말입니다.”
김규식과 해리 홉킨스는 그동안의 친분 때문인지 서로의 건강을 챙기는 인사까지 나누고 나서야 루스벨트 대통령이 기다리고 있는 회의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서 오게. 조지.”
“각하, 건강을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전쟁 때문이라고 하지만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 보이나?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가 없네. 먼저, 자리에 앉게. 오늘은 새롭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네.”
루스벨트 대통령의 말처럼 여러 명이 앉아 있어서 좁게 느껴지는 회의실 안에는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인물들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