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5, 조금만 더 참아보자
필리핀 마닐라 호텔 최상층 펜트하우스,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의 숙소이자 집무실로 주로 사용되는 곳으로 필리핀에 주둔 중인 미국 극동군 사령부 소속의 주요 지휘관들이 모두 모였다.
맥아더 사령관은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필리핀 방어 작전 계획대로 휘하 부대들이 전혀 움직이질 못하는 것이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극동군 사령부 휘하의 지휘관들을 질책하는 것으로 작전회의 시작을 열었다.
“정신들 안 차리나? 이렇게 다들 허둥대기만 하다가 마닐라와 필리핀을 일본군에 넘겨줄 생각인가? 지금, 귀관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맥아더 사령관의 호출로 모인 주요 지휘관들은 맥아더 사령관의 질책에 변명하기도 싫다는 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 맥아더 사령관의 얼굴만을 노려봤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거야? 왜? 다들 방어 작전대로 움직이지 않는 거야? 나한테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아냐?”
맥아더 사령관의 짜증 섞인 질책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주요 지휘관들은 더는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지 해군 사령관인 하트 제독이 대표로 나섰다.
“사령관님, 여러 가지로 혼선이 생기면서 방어 작전은 계획대로는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하트 제독은 어떤 혼선이 생겼다는 거지?”
“사령관님이 부재중이실 때 태평양 사령부에서는 일본 해군을 발견하면 교전을 해도 된다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최종 확인을 해줘야 하는 사령관님이 안 계셔서 해군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일본 항공대의 공격을 받게 됐습니다.”
하트 제독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모든 것은 네 탓이라고 좀 알아들으라는 듯이 돌려 까기를 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령관님께서 타이완의 일본군 항공대에 대한 반격 명령을 내리지 않으셔서 지금도 계속해서 일본 항공대의 공격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하트 제독! 우리가 처음 만든 방어 작전 계획에는 필리핀 밖으로 반격하는 것에 대한 작전은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작전 계획은 계획일 뿐입니다. 사령관님이 만드신 방어 작전 대로 하자면 우리는 필리핀을 점령하기 위해서 몰려드는 일본군들에게 앞으로 계속 끝도 없이 두들겨 맞고만 있어야만 합니다.”
해군 소속의 하트 제독이 총대를 메고 맥아더 사령관에게 지금 벌어지는 불리한 상황 전개는 모두 네가 제대로 못 해서 그런 것이라고 돌려서 말하자 맥아더 사령관의 눈이 살짝 돌아갔고 눈동자가 뒤집혔다.
“하트 제독! 그러니까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말인가?”
“....”
모든 것은 맥아더 사령관의 잘못이 맞았다.
필리핀의 비행장에 대한 일본군 항공대의 공습이 시작되는 순간, 자리를 지키고 제대로 명령만 내렸다면 루손섬 외곽의 비행장들을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바로 타이완이나 일본 해군에게도 반격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시간에 맥아더 사령관의 부재는 극동군 사령부 지휘부의 혼선을 불러왔고 반격의 시간도 놓치게 하고 말았다.
“저…. 두 분, 다른 지휘관들도 있는데 이쯤에서 그만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서덜랜드 참모장은 필리핀 국방군 사령관과 광복군 선임 지휘관까지 있는 자리에서 미국 극동군 육군과 해군의 최고 지휘관들이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둘을 말렸다.
맥아더 사령관과 하트 제독은 서덜랜드 참모장의 말에 주위를 돌아보면서 말다툼으로 격해진 감정을 잠시 추슬렀다.
“맥아더 사령관님! 저는 지금부터라도 방어 작전대로 움직인다면 충분히 필리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여 있던 주요 지휘관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우리 극동군은 지금도 충분히 일본군의 침략 따위는 격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타이완의 일본군 항공대에 대한 보복도 할 수가 있습니다.”
김경천 대령은 이대로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이다 보면 반드시 광복군의 무의미한 희생만 뒤따르리라 예상하고 먼저 선수를 치고 나갔다.
“레가스피에 상륙한 일본군은 필리핀 국방군 레인저 부대가 나서서 마닐라로 접근하는 도로를 차단하고, 하트 제독님과 브레러튼 사령관님이 레가스피를 지원하는 일본군 해군과 항공대의 지원을 끊으면 됩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레이다 시설을 충분히 이용해서 일본 항공대의 접근을 조기에 파악해서 루손섬 외곽에서부터 철저하게 차단하면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한번은 반드시 타이완의 가오슝과 쑹산 등의 비행장을 공습해야 한다고 판단됩니다.”
지금 모인 극동군 주요 지휘관들이 공통으로 가진 생각을 김경천 대령이 나서서 맥아더 사령관에게 건의 형식으로 말했다.
“일본군 본대 상륙은 어떻게 막을 생각인가? 이미, 우리의 방어 작전 계획은 많이 어그러졌어.”
“루손섬 상륙을 처음부터 저지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것은 필리핀을 지켜 내시고 계시는 미군 최고의 영웅이신 맥아더 사령관님께서 대책을 만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꼽고 추접스러웠지만, 김경천 대령은 광복군의 안전을 책임진 선임 장교였다.
맥아더 사령관에게 잠깐의 아부로 광복군의 희생을 줄일 수 있다면 김경천 대령 역시도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역시, 맥아더 사령관은 맥아더 사령관이었다.
필리핀 전투에서 가장 많은 활약을 하는 광복군 선임 지휘관이 나서서 자신을 떠받들 어주자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면서
“좋아! 다들 모여봐!”
서로 간에 거리를 두고 말다툼을 벌이던 극동군 주요 지휘관들은 맥아더 사령관의 말에 따라서 다들 전투 상황판 앞으로 모였다.
“하트 제독, 내가 보기에는 일본 본대의 상륙 예상 지점은 두 곳인데 우리 아시아 함대가 막아줄 수 있겠어?”
“사령관님, 전쟁 전 아시아 함대는 만약에 대비하면서 필리핀 곳곳에 흩어져 있어서 다시 모이려면 시간이 걸려서 저희 단독으로는 힘들 것 같습니다.”
하트 제독이 난색을 표명하자 맥아더 사령관의 시선이 브레러튼 항공대 사령관에게로 향했다.
“브레러튼 사령관! 항공대는 아시아 함대를 돕기 위해서 출격할 수 있나?”
“저희는 언제나 출격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희의 실력이 워낙 변변치 않아서….”
“괜찮아! 함대와 항공대가 동시에 상륙 지점에 나타난다면 일본군 상륙 본대도 쉽게 상륙하기는 힘들 거야. 함대와 항공대가 상륙을 완전히 막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방해만 해줘.”
“사령관님, 그래도 되겠습니까?”
“괜찮아. 방어 작전대로 나머지는 우리 육군과 필리핀 국방군이 방어할 수 있을 거야.”
“사령관님! 제 생각에도 처음에 세워뒀던 방어 작전대로 움직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사령관님께서 만드신 방어 작전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지 대장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엔 광복군 지휘관들에게 당부한 것은 너무 튀지 말고 광복군의 지위와 거취가 결정될 때까지 조금만 참기를 바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외교적으로 확실하게 인정을 받고 동맹국으로 미국과 함께해야 하지만 조지 대장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조지 대장은 광복군 주요 지휘관들이 맥아더와 괜히 척진 채 사이가 벌어져서 혹시라도 재수 없이 폴란드 망명 군단 이끌었던 시코르스키처럼 암살당하는 것을 막고 싶어 했다.
“김경천 대령이 봐도 그렇지?”
“예, 저희 광복군 전차대대와 포병대대가 별동대로 투입돼서 필리핀 국방군을 지원한다면 일본군 본대의 상륙은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아! 바로 그거야. 만약, 일본군 본대의 상륙을 막아내면 그 후에는 타이완을 치자고, 미리 정찰기들을 보내서 타이완의 일본 항공대 기지들을 정찰하고.”
“예, 사령관님.”
김경천 대령은 맥아더 사령관의 강압적인 명령에 따라서 광복군이 희생될 바에는 차라리 먼저 치고 나가서 맥아더 사령관이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방법을 택했다.
* * *
일본 대본영의 필리핀공략 작전인 ‘ M ’작전이 반은 성공하고 반은 실패하자 일본 육군 14군은 필리핀 공격 선발대가 점령에 성공한 바탄섬과 디바오 그리고 레가스피를 이용해서 선발대가 점령하지 못한 이파리와 비간에 대해서 추가 공격대의 공격을 통해서 점령을 시도했다.
“적입니다.”
“저놈들 똥줄이 제대로 탔군. 시대 때도 없이 기어들어 오는 것이….”
“맥아더 사령관이 타이완 폭격 명령만 내려 줬어도 저놈들은 여기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시발 누가 그걸 모르냐? 하지만 어쩌겠냐? 까라면 까야지.”
“어떡할까요? 전처럼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일까요?”
“그러는 것이 편하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그럼, 만의 안쪽으로 유인을 하겠습니다.”
“그래, 유인해서 전차대대와 함께 쓸어 버리자.”
“예.”
바탄섬을 점령한 일본은 타이완에 주둔했던 항공대를 바탄섬 기지로 이동시켜서 선발대가 점령에 실패한 이파리와 비간을 계속 정찰하면서 호시탐탐 점령하려고 노렸다.
그러나, 이미 필리핀 레인저 부대와 광복군이 주축이 된 방어 병력에 의해서 서너 번 격퇴를 당하자 선발대에 의한 비행장 점령 작전을 포기하고 작전을 바꿨다.
“함장님, 정체불명의 수상함 다수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거리는?”
“북쪽 50km 밖입니다.”
“타이완에서 출발한 상륙 병력인 것 같군.”
“함장님, 이번에도 그냥 보냅니까?”
“우리 잠수함 전단은 최대한 노출을 자제하기로 했다. 특별히 광복군의 구원요청이 없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그럼, 이번에도 조종사들 구출 임무만 맡겠군요?”
“우리 항공대의 조종사 수색, 구출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그러나?”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서 저것들을 잡아 버린다면 항공대 친구들이 굳이 고생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우리 마음대로 되겠냐? 이번 한 번만 더 참자.”
그리고, 드디어 결단을 내렸는지 일본 제14군은 ‘M’ 작전 계획에 따라서 주공인 제48사단은 마닐라 북쪽의 링가옌만으로, 조공인 제16사단은 마닐라 남서쪽의 라몬 만에 상륙시켰다.
라몬 만에 상륙할 제16사단(보병 제9 및 제33연대 제외)은 11월 25일에 오사카를 떠나 12월 3일에 류큐 제도의 아마미오시마에 도착해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링가옌 만에 상륙한 제48사단(다나카 및 가노 지대 제외)은 12월 6일까지 펑후 제도의 마공과 대만의 가오슝 및 지룽에 미리 집결했고 수송선들이 도착하자 승선을 시작했지만 일본 해군이 보조 선박을 등한시하는 바람에 수송선이 모자라서 1평당 평균 7명이 배정되어 콩나물시루 같았다.
병력의 집결과 승선은 극도의 보안 속에 이루어졌으며 계획의 전모를 아는 장교는 겨우 몇 명 정도에 불과했다.
사실 일본 제14군은 개전 이후 타이완의 항구에 집결한 수송선에 대한 미군의 공습을 두려워했으나 맥아더 사령관의 타이완 폭격 작전 거부로 미군에 의해서 폭격을 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2월 22일 새벽 1시 40분에 제48사단을 태운 수송선 76척과 해군수송선 9척이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6척, 그리고 다수의 수뢰정, 소해정 및 부설함, 초계정, 그리고 기타 함정들로 이루어진 강력한 호위 함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링가옌만으로 들어와 닻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