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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미뤄뒀던 숙제 (119/225)

그동안 미뤄뒀던 숙제

아베 노부유키 총리대신과 아오키 가즈오 대장 대신, 하타 슌로쿠 육군 대신,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 대신, 노무라 기치사부로 외무대신 등 내각회의 참석자들은 모두가 당황한 표정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아베 노부유키 총리대신은 내각을 만들고 나서 그동안 의회주의를 표방하던 민정당과 정우회의 협조를 받아서 전쟁으로 치달아만 가는 세계정세에 대응하고자 했으나, 군국주의적 분위기로 치닫던 의회가 도리어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키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본의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격화되고 있던 지나와의 전쟁을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리고, 만약 나치 독일과 군사동맹을 맺게 되면 미국이나 영국과의 관계가 나빠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유럽의 전쟁 불개입 방침을 내세웠지만, 군부가 이를 지지하지 않고 의회와 협력하기 시작하자 결국 1940년 1월 총리대신직을 사임했다.

* * *

주코프의 소련 극동군 사령부의 할힌골 전투를 배후에서 지원하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출격을 강요받았던 광복군 항공대는 할힌골 전투가 일단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오랜만에 휴식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상 더 이상 전투는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았고 만주국과 몽골의 국경선에서는 소련군과 관동군은 서로 마주 보면서 대치만 하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관동군 내에서는 소련 국경을 넘어가서 전멸한 23사단의 복수하자는 미친놈들이 몇 명 있었고 실제로 두 개 사단 정도의 병력을 국경선 근처까지 이동을 시키기도 했지만, 소련군에게 다시 한번 처발리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다들 주둥아리로만 떠드는 소리였을 뿐이었다.

“박 소령, 이제 우리 항공대가 중국 전선에서 해야 할 일은 어느 정도는 마무리를 지은 것 같다. 그러니까, 맥아더 군사고문단장과 약속한 대로 필리핀 항공대 조종사 교육 훈련단을 시간에 맞춰서 필리핀으로 보낼 준비를 해라.”

내가 주코프의 소련군을 돕느라 예정보다는 시간이 많이 지체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제는 맥아더와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 시간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대장님. 지시하신 대로 고참 조종사부터 차례대로 보내면 되겠습니까?”

“그래. 그동안 고생들 많이 했는데 잠시라도 쉴 수 있게 고참들부터 후방으로 돌리자.”

“그런데, 대장님. 우리 항공대가 중국 전선에서 빠져나가면 중국군의 항공 우세가 일본군 쪽으로 넘어갈 텐데 이대로 빠져나가도 괜찮을까요?”

박하성 소령의 걱정은 기우였다.

지금 일본은 일본 국내와 조선의 소요 사태와 폭동 사태를 수습하기도 힘든 상황이었고 갑작스러운 전쟁으로 경제는 엉망인 상황이라서 중국 전선에 군사력을 집중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아니야. 내가 보기에는 당분간은 일본군도 더는 여력이 없어서 전선을 팽창시키지는 못할 테니까 괜찮다. 이 상태로 전선이 굳어져서 앞으로는 양쪽 모두가 지루한 소모전만 이어갈 것이다.”

“그럼 큰일이네요.”

“뭐가 큰일이야?”

“대장님,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인민들의 삶이 망가질 테니까 말입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중국이나 일본이나 둘 다 병신같은 정치가들과 그들을 지지한 사람들이니까 뒷감당도 그들이 스스로 해야지. 어차피 모든 것은 전부 자업자득이다.”

“하긴 그렇습니다. 중국인은 전쟁이 나면 살아남겠다고 무조건 도망부터 치고 일본인은 전쟁을 벌이면 더 잘살고 돈을 번다고만 생각하고 있으니….”

“그래서, 인민들 다수의 생각과 사상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 인민들도 이번에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는 썩은 정치가들과 깨어나지 못한 인민들이 나라를 어떻게 망치는지를 온몸으로 경험했으니까 독립하면 아마 잘할 거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 다시는 나라를 잃지 않고 남들에게 떵떵거리고 사는 인민들의 모습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우리 인민들을 믿는다.”

“참! 그런데, 박 소령. 우리가 필리핀으로 떠나기 전에 미뤄뒀던 숙제는 하고 가야지?”

작년부터 유자명이 그렇게 요청해왔던 일을 이제는 처리해야 할 때가 됐다.

“무슨 숙제 말입니까?”

“유자명 선생이 죽여달라고 부탁했던 놈들을 이번에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떠나자.”

“아! 그 쓰레기 새끼들요?”

“그래. 그 개새끼들을 이번에 정리하자.”

간도특설대는 만주국 수도 신경에서 도문에 이르는 경도선의 철도역이 있는 안도현 명월구에 있었다.

창설 요원은 장교로는 김상찬 대위(군수관), 마동악 대위(군의관), 강재호, 이원형, 박경조, 김백일, 신현준 소위이며, 하사관으로는 대부분 국경감시대 출신인 김대식, 방관득, 홍청파 상사 등 10명이었다.

“이번에는 우리 항공대 전원이 출격한다. 모두 가서 간도특설대 자리를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할 땅으로 만들자. 조선인이 독립을 위해서 노력하는 조선인을 때려잡으면 어찌 되는지 모든 조선인에게 알려주자.”

“예, 대장님.”

* * *

부대원들의 야간 점호를 마친 신현준 소위는 자신의 상관인 김상찬 대위의 사무실로 보고를 하러 들렸다.

김상찬 대위는 군의관인 마동악 대위와 함께 사무실에서 커피를 한잔하고 있었다.

“부대대장님, 부대원들에게는 별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요즘 들어서 계속된 폭격으로 혹시나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부대대장님,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 모인 부대원들은 모두가 제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조선인들이 아닙니까?”

“그래도 계속된 폭격으로 마음이 흔들리는 병사들이 나올까 걱정을 했다. 만약, 탈영하는 병사라도 나온다면 오코시 대대장님께 내 체면이 말이 아니잖냐?”

그때, 옆에서 커피를 마시던 마동악이

“설마, 제국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똘똘 뭉친 부대원들이 그러기야 하겠습니까? 문제는 노몬한의 전황이죠.”

“마 대위님! 누가 듣는데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맙시다. 부대원들이 알면 동요가 심할 테니까 의무대장님도 말조심하십시오.”

간도특설대 부대대장인 김상찬 대위는 마동악 대위의 입을 서둘러 막고 나섰다.

“왜요? 부대대장님, 소련군과의 전투 상황이 좋지 않습니까? 설마 천하무적 대일본 황군이 로스케에게 밀리기라도 합니까? 저번에 벌어졌던 하산 전투는 저희가 승리하지 않았습니까?”

작년 장고봉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말하는 관동군 수뇌부의 조작된 선전을 철석같이 믿는 신현준 소위는 절대로 일본군이 질 리가 없다고 의문을 표시하자

“신 소위!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라. 우리 황군은 지금까지 전쟁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신의 군대다.”

“부대대장님, 저도 항상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소련군의 저항이 좀 심한 모양입니다?”

“뭐….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신 소위도 이제 그만 가서 당직을 서야지?”

“예, 그래야죠.”

“신 소위! 여기서 들은 소리는 어디 가서 하지 말고.”

“예, 부대대장님, 알겠습니다.”

신현준 소위가 보고를 마치고 나가자 김상찬 대위는 마동악 대위를 보면서

“부하들이 있는 곳에서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오.”

“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그냥….”

“지금 노몬한의 전황이 말이 아니랍니다. 1개 사단이 진짜로 전멸했고 지원하러 갔던 부대들도 반 이상이 사라졌답니다.”

“이거…. 혹시…. 우리가 줄을 잘 못 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만주 곳곳을 폭격하고 다니는 것들이 광복군이라는 불령선인이라면요?”

“예, 그런데요?”

“불령선인들이 소련이나 지나 그리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뭔가가 있으니까 소련이나 미국이 도와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닙니다. 광복군은 이용 거리에 불과할 뿐이겠지요. 내가 보기에는 기껏 해봐야 한 줌도 안 되는 불령선인들입니다.”

김상찬 대위의 말에 마동악 대위는 아직도 김상찬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지금 조선과 내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줄 아십니까?”

“왜? 무슨 난리라도 났답니까?”

“예. 난리가 났답니다. 제국에 충성을 다하던 귀족들과 경찰들이 무장한 불령선인들한테 모두 죽임을 당하고 있답니다.”

“예? 그게 정말입니까? 아니, 제국에 지극정성으로 충성을 다하던 귀족들을 총독부가 나서서 보호하지 않았다고요?”

“예, 모두가 폭탄 공격을 받아서 시체마저도 불타고 갈기갈기 찢겨 져서 장례도 치르기가 힘들 정도였답니다.”

그제야 마동악 대위가 어떤 뜻으로 말을 꺼낸 줄 눈치를 챈 김상찬 대위는

“그럼, 우리 같은 쫄짜들은 어디서 뭘 하다가 죽어도….”

“내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줄을 잘 못 선 것 같습니다. 만약, 이대로 정말 해방이라도 된다면….”

마동악 대위 입에서 절대 나오면 안 되는 소리가 나오자 김상찬 대위가 급하게 말렸다.

“쉿! 의무대장님은 진짜로 입을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아! 미안합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이 돼서…. 내가 이러려고 죽어라 공부해서 군의관이 된 것이 아닌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대일본제국은 신의 나라입니다. 절대, 전쟁에서 지지 않을 겁니다.”

“나도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진짜 이렇게 가슴이나 졸이고 살려고 공부해서 의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 충성을 다하는 자들의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모두가 자기만 잘 먹고 잘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의’ 그딴 것은 이들에게 있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단어였다.

이들이 가진 생각은 오로지 ‘나의 욕망의 성취와 내 욕심의 만족’ 뿐이었다.

나만 잘 처먹고 잘 살면 그것으로 내 인생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들을 징벌할 300여 대가 넘는 전투기와 폭격기가 안도현 명월구 간도특설대 연병장 하늘 위로 몰려왔다.

“빅 보스다. 전술 브리핑 때도 이미 이야기했지만 다들 너무 욕심들 내지 마라. 기체당 딱 세 명까지 허용하겠다.”

“대장님….”

“대장님 너무 하십니다.”

“조용! 야! 민족의 배신자 새끼들 900명을 때려잡겠다고 300기가 넘는 전투기와 폭격기가 여기로 출동했다. 우리 솔직히 인간적으로 사이좋게 나눠 죽이자.”

“하하…. 알겠습니다.”

“에스, 써.”

“나부터 먼저 돌입하겠다. 딱 세 명까지만이다. 알겠지? 딱 세 명이다. 간다!”

“예, 대장님.”

“고! 고! 고!”

300여 기가 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항공대는 일반 소학교보다 조금 큰 크기의 간도특설대 주둔지에 100t 가까운 폭탄과 기관총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디져! 개새끼들아!”

“투 두 두 둥!”

“타 다다 다당!”

“내세에는 절대 쪽발이의 개로 태어나지 마라! 잘 가라!”

“꽝!”

“꽈 광!”

“꽈 과 광!”

간도특설대에 대한 광복군 항공대의 폭격 소식은 소리 없는 발을 달고 만주, 중국, 조선 그리고 일본으로까지 퍼져나갔다.

만주인들과 몽골인 그리고 중국인들에게는 조선사람, 대한민국 사람들이 얼마나 민족의 배신자들을 미워하고 싫어하는지 알게 해준 사건이었고, 소련과 일본에는 대한민국 광복군이라는 존재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군사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줬다.

그리고, 국내의 조선인들과 친일 매국노들에게는 일본에 협조하고 충성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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