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니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조금 멀었다 (98/225)

아니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조금 멀었다

12대의 광복군 항공대 B-17 플라잉 포트리스 폭격기 전대는 나가사키 오오무라의 카사라스 항공대를 풀 한 포기 남지 않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폭격을 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연달아 두 번에 걸쳐서 바다를 건너는 무리한 폭격 작전은 아무리 광복군 항공대의 조종사들이 베테랑이라고 해도 다들 힘겨워했다.

“우와! 확실히 나이가 드니까 연달아서 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힘드네.”

“많이 힘드십니까?”

함께 오오무라 기지를 폭격하고 돌아온 박하성이 걱정하는 얼굴로 물었다.

“응, 좀 힘드네. 이제는 나도 나이가 벌써 마흔이다. 슬슬 현역에서 물러나야 할 때가 되기는 했지만, 히로히토의 대가리만큼은 내가 직접 날려 버리고 싶어서 지금 버티는 거다.”

“하하. 그럼, 대장님께서도 운동이라도 좀 하시면서 체력관리를 하십시오.”

“운동이야 항상 하는 거지만 전쟁이 좀 더 크게 일어나야 할 텐데….”

지금도 일본과 한창 전쟁 중인데 그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박하성이 나를 쳐다봤다.

“이 정도 전쟁으로는 일본이 쉽게 망하지는 않는다. 일본이 끝장날 정도의 전쟁이 벌어져야 한다.”

“지금도 많이 힘겨워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으로는 끝나지 않는다는 겁니까?”

“아니야. 일본과 중국, 둘만이 전쟁을 계속한다면 언젠가는 일본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현재 중국과 일본의 상태는 사람 숫자를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일본의 확실한 우위였다.

항공 전력, 기갑 전력, 병사와 장교들의 수준, 경제 수준 등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일본이 압도적이었다.

만약, 미국과 소련이 중국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장제스는 진즉 일본에 항복을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제스는 독일 군사고문단장이었던 팔켄하우젠의 충고를 믿고 미국과 소련의 지원을 끌어들여서 끝까지 버티는 중이었다.

* * *

광복군 항공대가 힘겨운 일정 속에서도 우한과 난창을 노리는 일본군의 배후를 두들겨 패면서 중국군을 돕고 있을 때, 내가 쓸데없는 짓이라고 그렇게 말렸음에도 쑹메이링이 기필코 헛짓거리를 하고 말았다.

편대장 서영승의 지휘하는 소련제 SB-2 폭격기 2대가 두 달간 폭격 훈련을 받은 6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충칭에서 출격했다.

그리고, 저녁에 한커우 비행장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다시 출발하여 달빛 아래 중국 상공을 횡단해서 한밤중에 폭격을 위해서 규슈의 구마모토 상공에 도착했다.

그런데, 쑹메이링 항공 위원장의 명령으로 중국공군이 구마모토에 떨어뜨린 것은 폭탄 대신 아시아의 평화를 주장하는 삐라와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만행을 비난하는 100만 장의 삐라였다.

“조지 대장, 어때요? 우리 중국공군도 이런 성과를 보여줄 수 있다고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나를 찾아온 쑹메이링을 보면서

“구마모토에 삐라 좀 뿌리고 오니까 갑자기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 기분이라도 드십니까?”

동맹국의 영부인인 쑹메이링에게 이런 식의 말투를 쓰면 안 되지만, 철딱서니 없는 쑹메이링의 행동에 이미 화가 난 상태인 나는 자제를 하지 못했다.

“위원장님 생각에는 중화민국 공군이 그렇게 하면 미국이 좀 더 많은 지원을 해줄 것 같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나는 우리 중화민국 국민에게 전쟁에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그럼, 삐라 대신 폭탄을 떨궜어야죠? 삐라에 맞고 사람이 죽습니까? 지금도 일본군의 폭격으로 중국인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왜? 일본군의 보복이 두려워서 삐라를 뿌리는 것으로 정한 겁니까?”

중화민국 항공 위원장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격지심과 미국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서 좀 더 많은 지원을 얻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어쩌면 이렇게 철딱서니가 없는지….

그리고, 일본군의 보복 공격이 두려워서 겨우 삐라나 뿌릴 생각을 하는 걸 보고 중화민국이 어째서 내전에서 졌는지 알 수 있었다.

중화민국은 아직도 족벌에 휘둘리는 봉건 국가였다.

“쑹메이링 위원장님. 지금, 중국인들은 하루에도 수천 명씩 죽어가는데 아시아의 평화를 외치면 일본이 ‘아!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하면서 사죄하고 물러날까요?”

“이봐요! 조지 대장! 말이면 단 줄 아세요?”

“지금 쑹메이링 위원장님께서 하실 일은 제대로 된 조종사를 양성하는 겁니다. 미국과 소련이 아무리 중국을 돕고 싶어도 사람까지 돕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모르십니까?”

“모르는 것이 아니고 더 많은, 더 확실한 지원을 받기 위해서 그런 게에요.”

뭔가 칭찬을 기대하고 왔는데 나한테 구박만 잔뜩 받은 쑹메이링은 나를 노려보고는 몸을 돌려서 한커우 비행장을 떠나 버렸다.

“대장님. 저대로 쑹메이링을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나와 쑹메이링 간의 설전을 옆에서 지켜봤던 박하성은 쑹메이링이 혹시 앙심을 품고 해코지나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안 괜찮을 건 또 뭐가 있냐? 지금까지 중국 정부가 우리를 위해서 기름 한 방울을 지원한 적 없다. 지금까지 모두 내 돈으로 내 노력으로 일본군과 싸우고 있어.”

“그건 저희도 잘 압니다. 그래서, 다들 대장님을 존경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광복군 항공대를 위해서 내가 한 노력을 말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현재의 광복군 항공대의 모습을 갖출 때까지 중화민국 정부가 도움을 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당장 B-17 플라잉 포트리스만 해도 우리 광복군 항공대 조종사가 테스트 조종사가 되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테스트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아놀드 준장의 주선으로 공급받은 것이다.

“뭐라고 하면 우리는 이 전쟁에서 빠지고 다음을 준비하면 된다. 내가 너희들의 희생이 눈에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도 전쟁에 참여한 이유는 기량이 녹슬까 봐 걱정돼서다.”

“그건 잘 알지만, 중국인들은 워낙 콩 한 구석이 있어서 걱정입니다.”

“만약 그런 짓을 하면 모든 광복군은 철수해서 다음 작전지로 이동할 생각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모두 중국에서 철수할 수도 있다는 내 말에 박하성은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이라서 놀란 눈치였다.

“우리는 중국에서 끝까지 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아니. 내가 중국에 머무는 이유는 단 하나, 우리 광복군 병사들의 숫자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손원일이 돌아오면 그때는 그런 눈치도 볼 필요 없다. 본토에서 바로 병사를 모집할 생각이다.”

“예? 정말입니까?”

“지금, 김원봉의 해병대가 무슨 훈련을 하는 줄 아나?”

“아니요. 저는 항공대를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상륙 훈련을 매일 하고 있다. 그리고, 홍범도 장군의 지휘로 윤봉길의 경보병 대대는 국내 침투 훈련을 하고 있다.”

길게 이어진 내 설명에 박하성의 눈빛에는 흥분이 가득했다.

“이야! 대장님! 이젠 진짜로 국내 진공을 위한 훈련이 시작됐군요.”

“아니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조금 멀었다.”

* * *

“언니들 오늘은 바다도 잔잔하고 바람도 좋으니까 어서 서둘러서 물질하러 갑시다.”

제주 대정의 해녀 김순복이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고 돌아다녔다.

“그러자. 그러나저러나 저것들은 또 뭐 한다고 저렇게 크게 공사를 한다니?”

이른 아침부터 물질을 하러 나가는 해녀들의 눈에 거대한 건물이 건설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언니. 저거 냉동 창고래요.”

“냉동 창고?”

“예, 우리가 잡은 것들을 저기서 보관했다가 내지에서 가격이 오르면 그때 보내서 이익을 남긴다고 하더라고요.”

“아니, 우리가 잡는 것들은 생물일 때가 가격이 좋은데, 그런 미친 짓을 왜 한 대?”

“그거야 나도 잘 모르죠. 우리는 가격만 잘 쳐주면 좋은 것 아니겠어요?”

제주도 대정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근처에는 일본 굴지의 재벌인 후루카와 그룹의 수산회사가 만든 거대한 냉동 창고가 건설되고 있었다.

후루카와 수산은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수산 가게들을 초토화해버리고 제주도에서 유일한 수산물 관리 회사로 자리를 잡았고, 제주도민을 위한 커다란 병원도 만들어서 해녀들의 건강까지 관리를 해줬다.

“우리는 후루카와 수산이 들어와서 좋으면 끝이 아닌가요? 병원도 지어주고 가격도 후하게 쳐주고요?”

“세상에서 제일 믿을 수 없는 놈들이 일본 놈들이다. 벌써 잊었냐? 우리가 그때 어떻게 당했는지?”

“그래도 이놈들은 좀 다른 것 같아서….”

“믿지 마라. 일본 놈은 일본 놈일 뿐이다.”

1932년 1월 12일, 신임 제주 도사이자 어업조합장인 다구치 데이키가 초도 순시를 하려고 세화리에 도착했을 때 구좌면 동부의 해녀 1천여 명이 일본인 수산 업자들의 담합에 의한 부당한 착취를 근절시켜 달라고 항의 시위를 벌였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다구치 데이키는 일단 알았다고 들어 주겠다고 해 놓고는 일본 경찰이 무력을 앞세워 시위 주동자인 부춘화와 김옥련 등 20여 명을 연행하자 해녀들은 물질 도구인 비창까지 들고 다시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신임 도사이자 어업조합장이었던 다구치 데이키는 약속을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고 일본 경찰에 잡혀갔던 시위 주동자들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반병신이 되어 돌아왔다.

“언니들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후루카와 수산은 좀 다른 것 같던데요?”

“그런 호의가 언제까지 갈지 모르지. 왜놈들이 하는 짓이 뻔하다. 저희끼리 경쟁하느라 지금은 잘해줘도 나중에는 온갖 핑계를 대면서 가격을 후려칠 것이다.”

“앞으로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면 알겠죠. 그런데 저 비행장은 이제 안 쓰나 봐요? 그럴 거면서 왜 사람들을 그렇게 고생을 시켰는지 모르겠어요?”

아직은 나이가 어린 김순복은 그래도 후루카와 수산의 호의를 믿고 싶은지 조심하겠다고만 말을 하고 한창 건설 공사를 하는 중인 거대한 냉동 창고 옆으로는 알뜨르비행장이 황량한 모습을 보면서 지나갔다.

“일본 놈들이 중국을 거의 다 차지했다고 하던데 정말인가 보지.”

“일본 놈들이 이제는 중국까지 차지하면 우리는 영원히 독립을 못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네요.”

“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들 말아. 얼마 전에, 광복군 항공대가 일본을 폭격했데.”

김순복이 조선이 앞으로 독립하기 힘든 것은 아니냐고 걱정을 하자 그녀와 같은 해녀 동맹의 큰 언니인 고영인이 진실을 알려줬다.

“언니, 그건 어디서 들었어요?”

“쉿! 일본 놈들이 알면 내가 잡혀가니까 다들 입조심들 하라고.”

“그러니까 언니 그게 정말이냐고요?”

“너희들, 내 동생이 나가사키에서 공부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알지?”

“그건 언니가 가족 중에 하나라도 공부해야 한다고 유학을 보낸 거잖아요?”

“그래. 그런데, 동생이 이번에 와서 하는 말이 나가사키 비행장을 광복군이 날아와서 쑥대밭을 만들고 갔데.”

“진짜요?”

“일본 놈들이 쉬쉬하지만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고 하더라. 나가사키뿐만 아니라 대만도 폭격했데.”

“우와! 우리 제주도에도 어서 광복군이 들어오면 좋겠네요.”

“언젠가는 그럴 날이 반드시 오겠지. 객지에서 독립을 위해서 피나게 싸우고 있는 광복군을 돕고 싶어도 도울 방법이 없어서 마음이 아플 뿐이다.”

“저도 그래요.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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