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총독에서 중국 총독으로?
1930년대부터 일본군이 갖기 시작한 망상 중의 하나가 군인이 국가의 최선봉에 서서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일종의 삐뚤어진 엘리트 의식으로 육군 소년병학교를 나와서 육군 사관학교를 나오고 육군대학을 졸업한 대다수의 육군 장교들 거의 모두가 가진 생각이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국가 지도부에 있었다면 절대 있을 수 없었던 진주만 공격을 결정한 이면에는 바로 군부 전체에 깔려있던 이런 망상들 때문이었다.
이미, 만주와 중국 본토에 100만 명이 넘는 병력이 투입된 상황에서 자신들보다 12배나 경제력이 크고 훨씬 더 공업화된 미국을 공격할 생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될 대로 돼라.’라는 식으로 군부의 암살 위협과 군부의 난동에 시달리면서 더는 군부를 통제하는 것을 포기한 일왕과 정치인들의 잘못과 ‘우리가 하면 무조건 된다.’라는 헛된 망상을 꿈꾸는 일본 군인들이 만든 결과물이었다.
“상하이 파견군이 사고를 너무 쳤습니다. 우리가 나서서 수습하기가 힘들 지경입니다. 제발 자제 좀 하면 안 됩니까?”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가 소집한 오상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히로타 고키 외무대신은 스기야마 하지메 육군 대신을 보면서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이미 십 년 전, 다나카 총리대신 시절부터 우리는 중국을 지배할 방법으로 과감하고 강력한 무력이라고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하는 것 아닙니까? 스기야마 하지메 육군 대신님. 도대체, 마쓰이 이와네 대장은 정신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삼 개월이면 중국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다면서요? 그런데 이게 뭡니까? 더구나 이런 와중에 영국과 미국을 자극해요?”
군이 저지른 일들의 뒷수습을 하다 속이 터진 것인지 히로타 고키 외무대신은 언성을 높이고 있엇다.
“회의 시작부터 너무 언성이 높은 것 같습니다. 그쯤 하시고, 오늘 의제에 집중하십시오.”
“알겠습니다. 하지만, 요즘 군부가 해도 해도 너무….”
“어허! 그만하시라니까요. 그깟 지나 놈들이 좀 죽은 것이 무슨 대수라고….”
“예….”
고노에 총리가 히로타 외무대신을 자제시키고 나서면서 회의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육군 참모본부가 요청한 대로 폐하께 칙령을 내려달라고 해서 대본영을 설치하기로 한 것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예,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고노에 총리대신은 스기야마 하지메 육군 대신을 보면서 고까운 말투로 물었다.
“그럼, 이제 상하이 파견군도 지나 파견군으로 개편을 해야 하겠군요?”
“예. 곧, 지나 파견군으로 개편할 예정입니다.”
“음…. 그런데, 스기야마 하지메 대신님. 벌써, 중일전쟁을 시작한 지 3개월이 훨씬 지난 것 같은데 육군 대신으로써 그에 대해서 할 말은 없습니까?”
“중일전쟁이 아니고 노구교 사건이고 상하이사변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는 일은 언제나 신의 뜻이 작용합니다.”
“3개월이면 가능했던 일이 신의 뜻으로 이렇게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군요. 뭐, 내가 더는 뭐라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사고 좀 그만치고 마무리는 잘 부탁합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군부로부터 암살 위협에 시달리던 고노에 총리대신은 결국 대본영을 설치하는 칙령을 일왕에게 받아내고 말았다.
일본은 지금까지 공식적으로는 중국과의 전쟁을 전쟁이라고 하지 않고 단지 사변이라고 칭했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중국과의 전쟁을 삼 개월 안에 종료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삼 개월이면 중화민국의 장제스가 항복할 줄 알았는데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장제스의 중화민국 정부는 물론이고 중국인들까지도 일본군을 향한 적개심이 대단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총괄할 대본영이 칙령 제658호에 의해서 1937년 11월 20일 설치됐다.
대본영은 대부분이 육군의 참모본부와 해군의 군령부에 속해있는 조직이었다.
대본영 회의(어전회의)는 천황과 참모총장, 군령부 총장, 참모차장, 군령부 차장,
참모본부 제1 부장(작전부장), 군령부 제1 부장, 육군 대신, 해군 대신에 의해서 구성되었다.
대본영의 조직은 총리대신과 외무대신 등과 같은 내각의 대신들은 단 한 명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로써 일본 내각은 군부를 통제할 방법을 완전히 상실했다.
아니, 이제부터는 정부가 군대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할 판이었다.
“음…. 스기야마 육군 대신이 노력해 보겠다고 하니까 그건 된 것 같고”
한참, 육군 대신을 노려보던 고노에 총리는 고개를 돌려서 대장(재무) 대신을 쳐다봤다.
“바바 에이치 대장 대신. 요즘, 물가가 올라도 너무 올랐다고 난리들이던데 이것을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겁니까?”
“그건 올해 예산이 어마어마하게 증액된 결과입니다. 돈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찍어내는데 인플레이션이 생기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죠.”
“그러니까 내 말은 인플레이션을 잡을 방법이 없냐는 겁니다.”
“총리 대신님, 8억 엔입니다. 이번에 전쟁 예산으로 증액된 액수가 무려 8억 엔이라고요. 방법이 없습니다. 이 상태에서 인위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잡겠다고 달려들다가 잘못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도 내각에서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솔직히 저는 군에서 요청한 예산을 만들어 내기도 힘듭니다. 4억 엔은 증세를 했고 8억 엔은 공채를 팔아서 겨우 마련했습니다. 내년에는 또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습니다.”
“허….”
치솟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 바바 에이치 대장 대신의 말에 고노에 총리대신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일본의 국방을 책임지는 육군 대신과 일본의 경제와 재정을 책임지는 대장 대신이 두 손 놓고 모두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이제, 일본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뿐이었다.
앞으로 일본이 어디로 어떻게 굴러갈지는 모르지만 계속 굴러가는 길 밖에는 없었다.
“아! 그런데, 총리 대신님. ‘인민 전선’이 일으킨 무장 폭동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눈에 보이는 대로 잡아다가 강제 노역형이라도 시키세요. 지금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서 있는데 내부에서 미친 짓이나 벌이는 놈들이 국민입니까?”
“총리대신님. 제국의 존망까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눈치 없이 이 와중에도 군을 편들고 나서는 스기야마 육군 대신을 보면서 고노에 총리대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개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뭐, 그렇다고 합시다. 진즉에 다 사라진 줄 알았던 공산당 놈들까지 분탕질을 치고 있으니…. 아무튼 관련된 자들은 최대한 강경하게 엄벌에 처하십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총리대신님. 조선 문제는 어떡할까요? 현재, 조선 총독과 조선군 사령관이 부재중인지가 벌써 삼 개월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음…. 그것은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서…. 내가 조만간 폐하와 논의해서 정리하겠습니다.”
고노에 총리대신이 소집한 오상 회의에서 중국에서 마쓰이 이와네 대장의 상하이 파견군이 벌인 미친 짓이 초반에 잠깐 언급되나 싶었지만, 자신들 일본 국민의 생명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일본 내각과 군부는 중국인들을 상대로 벌인 엄청난 범죄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 * *
일본군이 벌인 일 때문에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도 그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느라 분주했다.
난징에서 벌어진 USS 파나이의 침몰 사건과 난징에서 30만 명이 넘는 중국인 학살은 미국 정부도 경악을 금치 못할 사건들이었다.
어떻게 일본 따위가 철수 통보까지 한 미국 군함을 훤한 대낮에 격침을 시키고, 그다음 날부터는 중국인들을 사냥하듯이 죽일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책을 만들기 위해서 백악관 소회의실로 헐 국무장관과 말린 크레이그 참모총장을 불러드렸다.
“역시 예상은 했지만, 일본이 점점 선을 넘어가는 것 같은데 두 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루스벨트 대통령의 말에 헐 국무장관이 먼저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대통령 각하. 일본에 강력하게 경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 정부가 경고한다고 해서 과연 일본이 멈출까요?”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미 일본을 제어한다는 것을 포기한 것 같은 태도였다.
“그래도 일본 대사를 불러서 강력히 경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장관의 뜻대로 하세요. 하지만, 일본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을 겁니다.”
헐 국무장관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을 포기한 것 같은 말을 하자. 대통령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았다.
“각하께서는 눈에 보이는 실질적인 조치를 원하시는군요?”
“맞아요. 나는 일본이 이대로 멈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음…. 하지만, 각하. 우리 미국은 아직 준비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전쟁을 준비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때까지는 중국이 어떡하든지 버틸 수 있도록 지원을 해야 하겠지요.”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미 마음속으로 중국에 대한 지원을 통해서 일본을 견제하고 일본의 견제를 중국이 맡는 동안 미국의 국방력을 높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 각하. 일단 일본 대사에게 강력한 항의를 하고 중국 대사와 지원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헐 국무장관의 대책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걸 모두 한꺼번에 진행하세요. 그리고, 참모총장님 아직도 맥아더 장군은 삐쳐서 말을 듣지 않습니까?”
“맥아더 장군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요구 조건이 전혀 바뀌지를 않고 있습니다.”
맥아더를 필리핀으로 보낸 사람은 바로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
워낙 잘난 체하고 자기 잘난 맛에 대통령의 말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루스벨트가 필리핀으로 파견을 보내 버린 건데 그게 이제 와서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음…. 그럼 어쩔 수 없군요. 맥아더 장군의 요구 조건 중에 우리 육군 병력의 위장 투입은 제외하고 나머지는 들어줍시다. 의용대의 주 병력이 우리 미국인이라는 것이 발각이 되면 그건 문제가 커지니까 제외합시다.”
“각하. 그럼 항공대와 전투기를 맥아더 장군이 원하는 규모로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숫자가 적으니까 맥아더 장군의 요청을 들어줘도 될 것 같아요.”
“300명의 조종사를 의용병으로 구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정말 지원하실 생각이십니까?”
“소련도 300명의 조종사를 중국에 파견했다지 않습니까?”
회의 참석자들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통 큰 결단에 말없이 잠시 말을 멈췄다.
“대신, 맥아더 장군이 원하는 참모는 안 됩니다. 참모총장이 직접 참모들을 배정하십시오. 앞으로 일본과 전쟁을 가정하고 그에 맞는 인선을 하시기 바랍니다.”
“흠….”
말린 크레이그 참모총장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강력한 요구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왜요? 맥아더가 또 거부할까 겁이 나는 겁니까?”
“각하, 그것은 아니지만, 일본과의 전쟁이라는 말씀에 설마 일본이 우리 미국을 상대로….”
“말린 크레이그 참모총장! 설마 설마 하다가 20년 전에도 전쟁에 휘말려서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이번에는 조금이라도 대비합시다. 내가 보기에는 독일과 일본 모두 심상치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