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싸움 (4) (79/225)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싸움 (4)

우리 일행이 베를린에 머무르는 동안 묵을 숙소인 에들론 호텔까지 오는 사이에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목격했다,

작년,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으로 기억되는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제3 제국의 부흥을 알렸던 베를린 시내의 모습은 겉으로는 평화롭게 보였지만 그 내면에는 지독한 폭력과 광기를 숨기고 있었다.

“우리가 오다가 봤던 유리창이 깨지고 부서진 상점들은 유대인들이 운영하는 곳들이 맞죠?”

“응.”

“독일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네요.”

해외에서 선원 생활을 상당히 오래 했던 손원일은 그동안은 독일을 한 번도 들른 적이 없었는지 독일의 분위기를 굉장히 낯설어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겉으로는 상하이보다 더 차분하고 안정적인 것 같은데 그게 아닌 것 같아서요.”

“베를린에 한동안 머무르다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야.”

“그런가요?”

“그래. 현재 독일인들은 스스로를 취하게 만드는 지독한 환상에 빠져 있다고 보면 맞을 거다.”

손원일은 대답해주는 나를 보면서 뭔가 아쉬운 듯 다시 질문을 했다.

“조지 대장님께서는 잘 아시는 것 같은데 베를린이 왜 이런 분위긴 겁니까?”

“음….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프랑스가 너무 가혹하게 굴었어. 그리고, 하필이면 그때 대공황이 시작된 거야.”

“그래서요?”

“뭐가 ‘그래서요,’야? 전쟁에 지고 엄청난 배상금은 물어내야 하는데 경제도 망한 거야. 그리고, 주위에서는 한두 명씩 굶어 죽는 사람까지 생기기 시작했어. 그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면 사람들이 어떻게 변할 것 같아?”

“그래서, 유대인들을 죽이고 유대인들에게 스트레스를 푼다고요?”

“응, 요제프 괴벨스가 그렇게 유도하고 있거든. 내가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은데 화를 풀 수 있는 힘없는 대상을 지정해주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사람들이 화를 푸느라고 단체로 유대인을 괴롭히고 물건을 빼앗고 죽인다고요?”

“그래, 사람은 도덕이나 윤리를 내팽개치고 미치기 시작하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조지 대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인간의 광기는 정말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독일인들만 그런 것은 아니잖아. 아! 물론, 나도 독일 사람들을 변호해줄 생각은 없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니까. 우리도 일본이라는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으니까.”

“조지 대장님, 일본은 힘이 없는 유대인은 아니지 않습니까? 차라리 억압받고 탄압받는 우리가 유대인과 같은 처지죠.”

“일본인들 자신들은 힘이 없다고 생각할걸? 매번, 서양 열강들 때문에 자신들이 누려야 할 권리나 이익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니까.”

“그 권리나 이익이 주변국을 침략하고 수탈하는 겁니까?”

“그래, 더 많이 주변국들을 약탈해서 더 잘 살 수 있는데 서구 열강 때문에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미친 새끼들이네요.”

“독일과 일본만 미쳤을까? 내가 보기에는 다른 나라들도 다 미친 거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주위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다들 미친 거다.”

“정말, 이러다 잘 못 하면 큰 전쟁이 날 텐데, 사람들이 얼마나 죽어야 정신을 차릴까요?”

손원일이 예상하는 큰 전쟁은 이미 시작이 됐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독일의 폴란드 침공부터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중일전쟁부터가 시작이었다.

“남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걱정하기 이전에 우리 동포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먼저 생각해. 나는 유대인이 죽어 나가는 것보다 조선의 동포들이 일본에 죽어 나가는 것이 더 가슴이 아프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손원일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최선학도 궁금한 것을 물어왔다.

“그래도 독일인들은 소련사람들 보다 교육을 더 많이 받았을 텐데 너무 쉽게 나치에 현혹이 된 것 같네요.”

“독일인들이 속아서 그렇습니다. 전쟁에 패배할 때 독일 황제를 비롯한 정부가 국민을 속였습니다.”

“전쟁에 이기고 있다고 속이는 것은 어느 나라의 정부나 그렇지 않나요?”

“다른 나라도 그렇기는 하지만 독일 정부는 좀 심했습니다. 그리고, 막상 독일인들이 전쟁에 패배하고 삶이 어려워지자 자기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 겁니다.”

“독일에 닥친 모든 어려움이 유대인과 외국 수탈로 몰아가고 또 그렇게 믿었다는 말인가요?”

“예, 바로 그겁니다. 나한테 닥친 어려움을 내가 아닌 남에게서 이유를 찾은 거죠. 그리고, 나치의 요제프 괴벨스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도를 했고요.”

손원일, 최선학과 이야기하면서 평범한 인간들이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 속아서 그릇된 상황 인식을 하게 되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 생기는지 독일을 보면서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 * *

“사장님, 베를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엠마와 줄리아가 우리가 묵고 있는 에들론 호텔을 찾아와서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너희들은 그동안 잘들 지냈어?”“예, 그리고, 드디어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요.”

엠마와 줄리아는 살 떨리는 첩자 역할을 끝내게 돼서 좋은지 웃음이 얼굴에 가득했다.

나는 이번에 마르틴 보어만을 관리하던 엠마와 줄리아의 임무를 해제해 줬다.

이제 더는 독일에서 얻을 것도 없었고, 제2차 세계 대전에 너무 큰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이쯤에서 독일에서의 모든 공작을 종결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임무는 잘 처리 했지?”

“예, 사장님. 이 호텔 레스토랑에서 점심시간으로 식사 약속을 잡아 놨어요.”

“그래. 수고했다. 그래도 혹시 약속이 틀어질 수도 있으니까 내가 확실히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은 보고 미국으로 떠나라. 그렇게 해도 괜찮지?”

“예, 그럴게요.”

만약에 대비해서 엠마와 줄리아는 대기시켜 놓고 에들론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내가 엠마와 줄리아에게 내린 마지막 임무는 독일 주재 일본 대사와의 오찬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에들론 호텔이 자랑하는 고급 레스토랑답게 잔잔한 클래식 곡을 연주하는 악단이 있었고 19세기 궁전 복장 차림의 직원들이 음식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도고 시게노리 대사님.”

내 인사에 도고 시게노리는 모르는 사람이 왜 자기를 보고 인사를 하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 제가 대사님을 뵙고 싶어서 마르틴 보어만 부속 실장을 통해서 약속을 잡았습니다.”

지금 내 말을 외교적으로는 상당한 결례에 속했다.

아무리 동맹국이고 마르틴 보어만이 히틀러의 숨겨진 심복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게 해주려고 마치 자신이 약속한 것처럼 속인 것이었다.

역시나, 도고 시게노리의 표정은 짜증스러움과 함께 굳어져 갔다.

“제가 대사님을 꼭 만나야 하는 일이 있어서 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내 사과를 받으면서 도고 시게노리는 이 자리를 어떡할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박무덕 대사님, 당신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서 마르틴 보어만에게 특별히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한 겁니다. 당신 조상의 나라 조선과 당신의 조국 일본을 위해서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도고 시게노리는 놀라서 잠시 흠칫했지만 바로 표정이 돌아왔다.

“당신은 누구요?”

“혹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아십니까?”

“이름은 들어봤소. 하지만, 당신이 거기 소속이라면 나를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대답과 함께 도고 시게노리는 의자를 빼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대사님이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시면 나중에 분명히 크게 후회할 일이 생길 겁니다.”

도고 시게노리는 일어서다가 말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를 쳐다봤다.

“수백만 조선인과 수천만 일본인들의 목숨이 당신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대로 일어나시겠습니까?”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던 도고 시게노리는 나를 잠시동안 쳐다보다가 의자에 다시 앉았다.

“도고 시게노리 대사님, 잘 결정하셨습니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도고 시게노리는

“당신과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도 내 목숨을 걸고 하는 거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빨리하시오.”

나도 그럴 생각이었다.

괜히 나를 만난 것을 들켜서 도고 시게노리가 힘든 상황이 되는 것은 나도 바라지 않았다.

“대사님은 독일에서 오랫동안 근무하기는 아마 힘들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당신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겠다는 소리요?”

“그게 아니고 대사님의 부인 때문에 베를린에서 근무하기 힘드시지 않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외무부에서 말이 많다고 하던데. 아닌가요?”

유대인 출신의 부인을 두고 있는 도고 시게노리는 유대인을 탄압하고 수용소에 강제로 수용시키는 나치 독일과의 동맹 유지에 소극적이었고 독일과의 군사 동맹까지 바라는 군부의 요구를 묵살하면서 군부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

“흠….”

“대사님은 아마 내년쯤에는 소련의 모스크바로 발령이 날 겁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도고 시게노리를 무시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고는 묻지 마십시오. 대한민국임시정부도 나름의 정보망을 가지고 있고 나름대로 외교공작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베를린을 떠나는 것과 당신이 말한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죽음이 무슨 상관이 있소?”

“대사님이 보시기에도 머지않아서 독일은 전쟁을 일으킬 것 같죠? 그리고, 일본은 이미 전쟁하고 있고요?”

“그래서요?”

“전쟁에서 독일과 일본이 승리한다면 지금 하는 이야기는 쓸모없는 이야기지만, 만약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다면 여기서 나눈 이야기를 기억하셨다가 그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허! 당신 좀 웃기는 사람이군. 사람이 다가올 미래를 어찌 안다고 그런 헛소리를 하는 거요. 내가 괜한 짓을 했군.”

도고 시게노리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내년에 당신이 이곳 베를린을 떠나서 모스크바로 부임하면 믿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보기에도 금방 승리하고 끝날 것 같은 중국과의 전쟁이 끝이 없이 계속 이어지면 믿겠습니까?”

도고 시게노리는 의자에서 완전히 일어나서 레스토랑을 떠나려고 했다.

“그것도 아니면, 조선인과 일본인 수백 수천만 명이 죽어 나가면 믿을 겁니까?”

“이봐! 아무 힘도 없는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봐야 뭐가 바뀌나? 나에 대해서 알고 찾아온 것 같은데 내가 얼마나 힘이 없는지는 당신들도 잘 알 것 아니야?”

“지금은 그렇지만, 나중에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일본 놈들 때문에 등 떠밀려서 당신이 앞에 나서게 될 텐데. 그래도 힘이 없습니까? 그냥, 등 떠밀려서 앞장섰다가 죽고 싶습니까?”

도고 시게노리와 지금 여기서 헤어져도 상관은 없었다.

내가 이 자리를 만든 이유는 1941년 이후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도고 시게노리는 일본의 외무장관을 두 번 하게 된다.

한번은 태평양 전쟁 바로 직전이고, 또 한번은 태평양 전쟁 종료 바로 직전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미리 얼굴을 익혀 두고 나중에 태평양 전쟁 종료 직전에 그의 역할을 기대하고 미리 만나는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