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싸움 (2)
주력 기업 세 곳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남의 손에 빼앗기면서 해체됐던 후루카와 그룹은 이제는 예전의 찬란했던 그룹의 모습을 완전히 복구했다.
후루카와 쥰이치 회장은 후루카와 그룹의 재건을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드미트리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들어줄 마음이었다.
“조선이라면 아무리 우리 그룹이라고 해도 조금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겠군요?”
“회장님, 아닙니다. 내가 듣기로는 이번에 내각과 참모본부에서 조선을 후방 병참 기지로 만들기로 정했다고 하니까 아마 특별한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아! 그렇습니까?”
후루카와 쥰이치가 드미트리를 신뢰하고 믿는 이유는 후루카와 그룹의 재건에 투자된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하이에서 사업을 한다는 드미트리는 도대체 어떻게 아는지 일본 권력 최상층의 정보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또 그것을 통해서 후루카와 쥰이치의 사업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쉽게 조선으로 진출을 할 수 있겠군요. 혹시, 드미트리 사장님께서 원하시는 사업이 있으십니까?”
후루카와 쥰이치의 물음에 드미트리는 이미 준비를 해왔는지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뭡니까?”
“서류를 보시면 이번에 조선에 건설할 공장과 공장을 건설할 장소 그리고 공장 운영을 위해서 내가 상하이에서 보낼 기술자들의 명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후루카와 회장님은 공장 건설에만 신경을 써주시면 됩니다.”
“어? 그럼, 공장 운영을 운영할 기술자도 같이 보내실 생각이시군요?”
“예, 상하이에서 함께하고 있는 유대인 동료들이 조선으로 갈 겁니다. 독일에서 탄압받다 쫓겨난 유대인들입니다. 잘 좀 부탁합니다.”
“아…. 독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군요.”
“예.”
후루카와 쥰이치는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됐다.
지금까지 후루카와 그룹에 투자됐던 자금은 모두 유대인들의 자금이었고, 후루카와 그룹에 자금을 투자한 이유는 유대인들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조선에 정착하기 위해서였다.
“후루카와 쥰이치 회장님, 어떻게 이번 일을 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뭐,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죠. 최선을 다해서 유대인들의 정착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왕 부탁드리는 김에 하나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후루카와 쥰이치는 어려운 부탁이라고 하니까 혹시 투자된 자금을 회수하겠다고 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면서
“어려운 부탁이라니…. 그게 뭡니까?”
“제 동료 유대인들이 아이들을 교육해야 하는데 알아보니까 조선의 교육 현실이 너무 열악해서….”
“아! 조선에 유대인 전용 학교를 만들어 달라는 말씀입니까?”
“예, 그것도 있고 공장을 운영하려면 기술자들도 아주 많이 필요한데, 알아보니까 조선에는 기술학교가 단 한 곳도 없더군요.”
조선의 발전이 두려웠던 일본은 의도적으로 조선을 농업 생산기지로 만들기 위해서 기술의 ‘기’자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해방되고 나서도 한참 동안을 우리나라는 공업화에 ‘공’자도 진행할 수가 없었다.
“음, 드미트리 사장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내가 힘을 한번 써보겠습니다. 공장 근처에 기술학교와 유대인 전용 학교를 만들면 되는 거죠?”
뜻하지 않게 통 크게 도와주겠다는 후루카와 쥰이치의 말에 드미트리는 크게 기뻐하면서
“예,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후루카와 쥰이치 회장님이 원하시는 자금을 계속 투자하겠습니다.”
“아이고, 내가 뭐 큰 걸 해드리는 것도 아닌데…. 아무튼, 앞으로도 계속 도와주시겠다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중국과의 전쟁으로 현재 점점 돈이 풀리고 있는 일본의 상황에 내가 풀기 시작한 위조지폐까지 더해지면 태평양 전쟁이 한창 진행되는 중간이나 막바지쯤에는 인플레이션으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스스로 무너질 수도 있었다.
나는 지금 위조지폐를 가지고 인플레이션을 유도해서 일본인들이 스스로 폭동을 일으키기를 바라고 있었다.
* * *
후루카와 쥰이치를 만나서 후루카와 그룹의 대대적인 조선 투자를 결정하게 만든 드미트리는 내가 지시한 또 다른 일을 하기 위해서 도쿄 긴자의 뒷골목을 급히 찾았다.
화려한 긴자의 뒷골목은 상하이 번화가의 뒷골목과 마찬가지로 지저분하고 후줄근한 차림의 노동자들이 싸구려 술집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하루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면서 같은 처지의 지인들과 술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상하이에서 온 ‘일본 인민 전선의 친구’입니다.”
1932년 코민테른의 테제에 따라서 일본 각지에서 반전과 반 천황을 기치로 봉기를 모의하다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모조리 검거돼서 조직이 무너진 일본 공산당에 코민테른이 보낸 새로운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예, 이렇게 잊지 않고 도쿄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민 전선을 대표해서 대정익찬회 의원인 아사누마 이네지로와 인민 전선의 행동대 격인 전국노동자 대표인 조도 곳키 노조 위원장이 자리에 나와 있었다.
“1932년 테제 이후로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이 사라진 줄 알았었는데, 얼마 전 저희 공작원이 일본의 상황을 알려줘서 이제야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그동안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사누마 이네지로와 조도 곳키는 어째서 갑자기 코민테른에서 연락이 왔나 했더니 소련의 정보원이 미약하게나마 활동을 하고 있던 자신들을 목격하고 정보를 알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드미트리 서로 인사가 끝나자 일본 공산당과 나눠야 할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혹시, 두 분은 일본 내의 공산당을 재건할 수 있는 역량이 되십니까? 만약, 역량만 되신다면 코민테른에서는 일본의 공산당 재건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입니다.”
드미트리의 물음에 아사누마 이네지로와 조도 곳키는 침통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왜요? 공산당 재건이 아예 불가능합니까?”
드미트리의 재촉에 아사누마 이네지로 의원이 입을 열었다.
“1932년 테제 이후로 90% 이상의 당원들이 전향했습니다. 그리고, 당원들이 떠나가면서 우리는 당을 운영할 자금을 마련하기도 벅찼습니다. 그래서, 현재 상태에서는 당의 재건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들어 보니까 당의 사정이 상당히 심각하군요. 그럼 혹시….”
드미트리는 둘을 만나러 오기 전에 챙겨온 커다란 여행 가방 하나를 들어서 탁자 위에 올려놨다.
“이 정도의 자금을 매달 지원 받는다면 공산당의 재건이 가능하시겠습니까?”
“헉!”
“아니…. 가방 가득, 모두가 현금이라니….”
아사누마 이네지로와 조도 곳키는 드미트리가 탁자 위에 올려서 보여준 여행 가방 안에 가득한 현찰을 보고 잠시 놀라서 대답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여행 가방 속의 돈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정말, 코민테른에서 매달 이 정도의 자금을 지원하신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코민테른의 결정입니다.”
“아…. 예, 그렇다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분 정말로 가능하겠습니까? 코민테른에서는 일본 공산당의 재건을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고 지원을 하는 겁니다. 만약에라도 실패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이 모든 돈이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이 일본의 ‘인민 전선’을 응원하면서 보내준 성금입니다.”
확실한 답변을 요구하는 드미트리에게 아사누마 이네지로 의원은 자신이 없는지 대답을 하지 못햇다.
그러나, 인민 전선의 실질적인 행동대장인 조도 곳키 위원장은 자신감이 넘치는 대답을 했다.
“이 정도의 자금이 매달 지원이 된다면 경시청의 특고들도 모두 매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최소한 1932년 테제 이전의 왕성하게 활동했던 공산당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조도 곳키 위원장님,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최소한 수십만 명 이상의 당원을 확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의원 선거에서 공산당이 어느 정도 정치적인 기반을 닦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흠…. 그건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치적인 세력으로 등장하면 우익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진 것도 사실은 모두 우익과 특고들의 고문과 암살 위협 때문이었습니다.”
아사누마 이네지로 의원과 조도 곳키 위원장은 차례대로 드미트리에게 일본 내의 사회주의 운동이 어째서 갑자기 몰락하게 됐는지 이유를 설명해 줬다.
둘의 변명과도 같은 설명을 들은 드미트리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현금 가방을 치우고 다른 여행 가방 하나를 탁자 위에 올리고 가방을 열었다.
“아니, 이게 뭡니까? 이건….”
아사누마 이네지로 의원은 가방 안의 내용물을 보자마자 놀라서 가방 안의 물건을 혹시 남들에게 들킬까 두려워서 주위를 경계했다.
반면에 조도 곳키 위원장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한껏 기분이 좋아진 얼굴로
“이야! 코민테른에서 이제야 드디어 우리가 간절히 원했던 것을 보내주시는군요.”
“이것이라면 여러분들이 원하는 혁명이 가능하겠습니까?”
드미트리가 내민 가방 안에는 광복군도 사용하는 무기들이 가득 차 있었다.
분대 자동화기 부사수가 사용하는 톰슨 기관단총. 그리고, 광복군 전원 사용하는 브라우닝 권총. 그리고, 미제 수류탄과 총알들.
“이런 지원을 해 준다는데 못할 것이 없죠. 그동안 우익들의 테러에 죽어가는 동지들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젠 우리도 우익들과 제대로 맞서 싸울 수 있게 됐습니다.”
드미트리에게 대답하던 조도 곳키 위원장은 가방 속의 무기들 보면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런데, 왜 모든 무기가 전부 미제입니까?”
“코민테른에서 여러분들을 지원했다는 것이 발각된다면 양국 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해서 어쩌면 전쟁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코민테른은 일본의 일반 시민들이 죽어가는 전쟁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매달 수백만 엔의 지원금. 그리고, 전쟁까지는 무리여도 암살이나 테러는 충분히 가능한 무기들을 지원받는다면 공산 혁명도 가능했다.
“저는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서 공산당을 재건하겠습니다.”
역시, 공산당 전위 행동대장답게 조도 곳키 노조 위원장이 먼저 나섰다.
드미트리는 2대 공산당 총재 아소 히사의 사망 이후로 실질적으로 공산당 지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아사누마 이네지로 의원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사누마 이네지로 의원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코민테른에서 그동안 우리 일본 공산당을 외면하고 있다가 갑자기 이렇게 우리를 지원하는 이유가 혹시 소련과 일본의 전쟁 때문입니까?”
아사누마 이네지로 의원은 현실을 인식하고 있는 정치인답게 정곡을 찔렀다.
“그게 아니라고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코민테른에서 일본과 독일의 동지들을 지원하기로 한 이유는 일본과 독일의 방공협정 때문입니다. 코민테른이 무슨 죄가 있다고 부르주아들의 탄압을 받아야 합니까? 우리는 더는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고 결정을 했습니다.”
“흠….”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공산당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당원들이 또 얼마나 희생될지 눈에 선했다.
하지만,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탄압만 받다가는 프롤레타리아의 세상은 절대 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맞서 싸울 것인가?
아니면, 탄압을 받으면서 조용히 사라질 것인가?
“이대로 사라질 수는 없지요. 나도 한번은 죽을 때까지 싸워보겠습니다.”
“잘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의원님, 위원장님, 지금부터는 노동자와 농민들만을 당원으로 받지 마시고 군인과 경찰도 당원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래야만 혁명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드미트리를 시켜서 일본 공산당을 지원한 이유는 일본 내부에서의 혼란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공산당이 얼마나 활발하게 활동을 할지는 모르지만 많은 총기와 위조지폐가 일본 공산당을 통해서 일본 내에 풀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