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선생님, 인제 그만 은퇴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21. 선생님, 인제 그만 은퇴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프랑스 조계지는 나의 대형인 두웨성의 세력권이어서 다행히 이회영 선생님과 함께 온 사람들의 거처를 금방 구할 수 있었다.
중국인 노동자들이 주로 모여 사는 곳이라서 그다지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빠르게 숙소를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선생님, 외람된 질문이지만 저를 믿으십니까?”
“우리가 상하이에 도착한 지는 며칠 됐네.”
그럼, 그렇지.
내가 아무리 도움을 줬다고 해도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를 찾아왔을 리는 없었다.
며칠 동안 나를 조사하고 믿을 만하다는 판단이 서자 나를 만나러 온 것이다.
“선생님. 그럼, 임시정부와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으신 겁니까?”
내 질문에 이회영 선생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고 대답은 옆에서 나왔다.
“우리는 입으로만 독립을 말하는 자들과는 함께 할 생각이 없습니다.”
어쩌다가 임시정부가 이런 대접을 받게 됐는지 그간에 있었던 사정을 잘 아는 나로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지내실 생각이십니까?”
“하던 일을 계속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독립을 꿈꾸는 조선인이라면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무장 투쟁이었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 요인들을 암살하고 일본의 관공서를 습격하는 일이다.
독립운동가들의 목숨에 등급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렇게 소모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회영 선생님을 살려낸 보람도 없었다.
“선생님, 지금 저하고 같이 가보실 곳이 있습니다. 함께 가보시겠습니까?”
아무 대답이 없이 앉아있는 이회영 선생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이회영 선생을 모시고 바로 영안백화점에 가서 최고급 양복으로 일단 옷부터 갈아입혔다.
그리고, 혹시라도 일본군 첩자들이 보더라도 이회영 선생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변장까지 했다.
“선생님, 중국어는 잘하시죠?”
“20년 정도를 살다 보니까 자연적으로 알게 되더군. 그런데, 나를 왜 이렇게 꾸미는 것인가?”
“선생님께서는 지금부터 동북 지방에서 내려온 거부 역할을 하셔야 합니다.”
“만주에서 내려온 거부 역할을 하라고?”
“예”
“내가 그걸, 왜 해야 하는 건가?”
“지금부터 같이 돌아다니면서 이유를 하나씩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먼저, 이회영 선생과 내가 찾아간 곳은 Foreign Y.M.C.A.였다.
“선생님, 이곳은 상하이의 중국인 부호들이나 지식인들이 주로 모이는 곳입니다. 그리고, 중국인들과 교류하고 싶어 하는 외국인들이 주로 찾는 장소입니다.”
나는 이회영 선생과 자리에 앉아서 한가롭게 이야기를 하는 척하면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한 명씩 알려줬다.
“저기 중국인들 사이에 있는 외국인 여자가 보이십니까?”
“잘 보이네. 내가 보기에 저 여자는 중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사람처럼 보이는군.”
“예, 상당히 인기가 많은 여자입니다. 특히,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여자입니다.”
이회영 선생은 시선을 돌려서 나를 쳐다봤다.
“저 여자를 소개해주려고 나를 여기로 데려온 것인가?”
“아닙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오.”
그때, Foreign Y.M.C.A.의 출입문을 열고 잘생긴 외국인이 한 명이 들어왔다.
“드디어, 진짜 주인공이 나타났군요.”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가 저 남자 때문인가?”
“예”
Foreign Y.M.C.A.로 들어온 외국인 남자는 중국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외국인 여자 곁으로 다가가서 서로 아는 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함께했다.
“저 남자의 이름은 리하르트 조르게라는 독일인이고 프랑크푸르트 차이퉁 신문사의 기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소련이 중국과 일본으로 파견한 간첩입니다.”
내 설명이 끝나자 이회영 선생의 눈빛이 조금은 험악해졌다.
뜻을 함께한 동료였던 김좌진을 암살한 자들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지도 몰랐다.
“선생님, 흥분하지 마시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오.”
“대체 무엇 때문에 나한테 저들을 알려주는 건가?”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나중에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시간이 이삼십 분 정도 지나갔을 때쯤 창파오를 입은 중국인 한 명이 Foreign Y.M.C.A.로 들어왔다.
“저놈의 이름은 사사키 사브로 원래는 중국인이었지만, 일본에 의해서 어릴 적부터 첩자로 키워진 놈입니다.”
이곳에 데려온 용건은 말하지 않고 간첩들을 한 명씩 알려주는 내 모습에 이회영 선생은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들은 미래에 있을 전쟁을 내다보고 각국에서 파견한 간첩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선생님과 선생님의 동료들이 준비하는 일은 너무 주먹구구식입니다. 저기 저 간첩들은 마지막 한 방을 노리고 몇 년 동안의 훈련을 받고 온 놈들입니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우리는 마지막까지 참고 기다릴 시간도 돈도 없는 사람들이네.”
전 재산을 다 바치고 직접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온몸으로 일본과 싸우고 있는 이회영 선생을 보면서 내가 괜히 죄인이 된 느낌이었다.
저분들은 언제 올지 모르는 독립의 그 날을 위해서 앞날이 막막한 가운데서도 싸우고 계셨지만 나는 독립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길을 알고 있었다.
“선생님, 인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군데 더 들릴 곳이 있습니다.”
이회영 선생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호의를 베풀고 있는 나를 보면서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는 표정이었다.
Foreign Y.M.C.A.를 나와서 이회영 선생과 함께 황푸강의 태평양 항공사 비행정 계류장으로 향했다.
“사장님 나오셨습니까?”
비행정 계류장에는 도쿄로 떠난 비행정을 제외하고 남은 다섯 대의 비행정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고, 여러 명의 정비 요원들이 비행정을 정비하고 있었다.
“응, 손님이 오셔서 잠시 구경시켜 드리려고 왔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들을 마저 해라.”
“예, 사장님.”
“여기는 또 어딘가?”
“이곳은 일본의 도쿄와 상하이를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비행정 계류장입니다.”
이회영 선생과 일행은 줄지어 있는 비행정을 보면서 생각보다 내가 부자라는 것을 알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선생님, 여기 있는 비행정들은 제 것이 아닙니다. 모두, 미국 육군부의 재산입니다.”
“아니, 그럼 자네는···.”
“미국과 협조하는 독립운동가쯤으로 알아주십시오.”
말이 좋아서 미국과 협력하는 독립운동가이지 실상은 미국의 끄나풀이라는 소리였다.
미국과 소련과 연결된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에서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옆에서 지켜봤던 이회영 선생은 내 정체를 알게 돼서 실망했는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너무 그렇게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미국과 협력하는 이유는 나중에 도쿄를 폭격하기 위해서 지원을 받는 것뿐입니다.”
“자네. 정말로 도쿄를 폭격하겠다는 말인가?”
“예,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제 나름대로는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얼굴인 이회영에게
“지금부터 제가 선생님을 모시고 외국 간첩들과 제 항공사를 보여 드린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나와 이회영 선생은 일행과 조금 떨어져서 황푸강 강변을 걷기 시작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도 예상하시겠지만, 일본은 곧 만주를 집어삼킬 겁니다. 그렇죠?”
“그렇겠지.”
“선생님, 저는 일본이 미국의 적이 되는 순간을 노리고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회영은 내 말이 어이가 없었는지 나를 보면서
“지금까지 일본의 편에 서서 우리나라가 국권을 뺏길 때도 모른 척하던 놈들이 일본과 적이 된다고?”
물론, 지금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일본이 만주를 넘어서는 순간부터는 달라진다.
“선생님께서도 대충은 아시겠지만,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하수인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하수인이 주인을 배신하고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주인에게 참교육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네는 영국과 미국이 언제 일본을 교육한다는 말인가?”
이회영은 걷던 걸음마저 멈추고 나에게 물었다.
“저는 앞으로 십 년을 보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일본은 전쟁 말고는 나라를 운영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재작년부터 미국에서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세계 모든 나라의 경제가 무너졌습니다. 그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인 상황입니다.”
경제에 대해서 잘 모르는 20세기 사람들은 왜 이런지 이해하지를 못했다.
수출과 수입의 구조 그리고 세계가 연결된 무역과 금융 이것을 설명하기는 복잡했다.
그래서, 그냥 간단하게 설명을 해드렸다.
“지금 일본은 전쟁을 일으켜서 물건을 팔 수 있는 시장과 자원을 생산할 수 있는 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일본이 만주를 차지하려고 하지 않나?”
“일본이 만주를 차지한다고 해도 경제를 일으켜 세우지는 못합니다.”
“그럼?”
“다음은 중국입니다.”
“중국이 혼자서 일본을 막기는 힘들 텐데···.”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고 갈가리 찢긴 상태의 중국은 절대로 일본의 적수가 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쯤 되면 미국과 영국이 중국을 지원할 겁니다. 하수인에 불과한 일본이 너무 커나가는 것을 반드시 막을 겁니다.”
“그럼, 그때 일본을 공격할 생각인 건가?”
“예, 그래서 선생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 말인가?”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인제 그만 은퇴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현역에서 은퇴하시고 친일파 첩자들을 키워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인가? 나보고 친일파들을 키워 달라니···?”
이회영 선생은 버럭 화를 내고 나섰다.
“선생님, 친일파를 키워달라는 것이 아니고 친일파로 위장한 첩자들을 키우자는 겁니다.”
“그것을 누가 하려고 하겠는가 다들 일본만 생각하면 치를 떠는 사람들인데.”
“조금 전에 Foreign Y.M.C.A.에서 보신 첩자들도 상대 국가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잘 참으면서 조국을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까?”
솔직히,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십 년 동안만 친일파가 되어야만 한다면 못 할 이유도 없잖은가?
“그리고, 저는 지금 미국에서 조종사들과 육군 장교들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이제, 며칠 있으면 첫 번째로 훈련받은 기수들이 이곳 중국으로 옵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벌어질 때까지는 참고 일본이 모르게 일본의 턱밑에서 비수를 갈면서 준비하자는 말입니다.”
“자네 말이 옳은 소리긴 하지만 하나 놓친 것이 있네. 누군가 일본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계속 보여주지 않으면 조선에 있는 백성들은 다들 체념하고 일본의 지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말 것이네.”
“선생님, 저도 일본과 싸우는 것을 멈출 생각은 없습니다. 저도 계속 싸워나갈 생각입니다. 다만, 제대로 싸우자는 겁니다.”
“그럼, 자네는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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