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우와! 진짜 많이도 데리고 오셨네.
20. 우와! 진짜 많이도 데리고 오셨네.
날씨가 풀린 화창한 3월.
집안에서만 뛰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내가 사는 집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10명이 넘어가는 아이들을 집에만 가둬 놓고 키울 수는 없었다.
더구나, 다른 조종사들과 돌아가면서 비행정을 조종하면 되기 때문에, 나는 일주일에 한 번만 비행정을 타면 됐다.
가끔은 아이들과 놀아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아이들이 노는 곳으로 다가갔다.
“애들아, 오늘은 날씨도 좋은데 밖에 소풍이라도 나갈까?”
정원에서 뛰놀던 아이들은 순간 동작을 멈추고 아내를 쳐다봤다.
‘헉! 설마, 나도 아이들에게는 돈만 벌어다 주는 아저씨였던 거야? 이런, 제길! 설마 그렇진 않겠지?’
“아빠가 밖에 소풍 가자고 하시는데, 왜 대답들이 없니?”
역시, 아내는 최고의 여자였다.
내가 아이들을 데려온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면서도 더는 추궁하지 않고 아이들을 잘 보살펴주는 여자였다.
“아빠! 소풍을 어디로 갈 거예요?”
“징안스루에 갈까 하는데 어떠니?”
“경마장을 구경하러 가는 거예요?”
“아니, 오늘은 그 앞에 아이리위안으로 가자.”
아이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데 아내가 끼어들었다.
“조지, 그곳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어요?”
“아니, 아이리위안 근처도 충분히 즐길만한 경치야. 나도 가끔 근처를 지나가는데 볼만하더라고.”
“그래요?”
“응, 그러니까 어서 준비해서 소풍 가자고.”
징안스루는 이름도 모르는 여러 가지 봄꽃들이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고, 길옆의 가로수에서는 초록색 새잎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상하이의 외국인 조계지 안쪽은 확실히 유럽과 뉴욕보다 훨씬 나은 풍경이었다.
외국인 조계지는 다양한 스타일의 건축물과 그에 잘 어울리는 조경으로 멋지게 꾸며져 있었다.
특히, 눈앞의 아이리위안은 그중에서도 최고였다.
중국의 황제처럼 살고 싶었던 한 남자의 노력 덕분이었다.
“조지, 이렇게 가끔은 아이들을 데리고 상하이를 돌아다녀야 할 것 같네요.”
“응, 알았어. 내가 시간이 나는 대로 그렇게 할게. 애들이 이렇게 좋아할 줄 나도 몰랐어.”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정원 주위를 돌고 있었고 또 다른 아이들은 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이보게, 저 아이들은 모두 자네 아이들인가?”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서 주위를 돌아봤더니 아이리위안 담장 너머에서 백발의 노인 한 명이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지팡이를 짚고 서서 묻고 있었다.
“예, 어르신 모두 제 아이들입니다.”
“자네는 동양인인 것 같은데···. 아이들은 모두···?”
“제 아내가 미국인입니다. 그리고, 몇 명은 입양했고요.”
“아! 자네도 아이들을 입양한 거였군.”
그리고는 별다른 말이 없어서 아이들과 놀아주려고 아이들 곁으로 다가가는데 다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는 별로 볼 것도 없을 텐데. 여기로 들어와서 아이들과 함께 놀게.”
“혹시, 어르신께서 아이리위안의 주인 되십니까?”
“그래, 내가 주인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정원 안으로 들어와서들 놀게.”
“잠깐, 아내에게 물어보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아이리위안 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하고 널따란 정원에 입을 떡하니 벌어졌다.
정말 멋지고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뭘 그렇게 서만 있는 거야? 애들아! 너희들은 마음껏 뛰어놀아도 된다.”
아이리위안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들은 다시 마음껏 뛰놀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뭘, 이 정도를 가지고, 오랜만에 아이리위안에서 아이들 소리가 들리니까 내가 더 기분이 좋아지네.”
“어르신의 산책을 방해한 것은 아닌지···.”
“괜찮네. 자네도 멍하니 앉아만 있지 말고 정원을 한번 돌아보게. 내가 꾸며서 그런 것이 아니라 꽤나 볼 만할 거야.”
“아···. 예.”
아이들은 남의 눈치 볼일 없이 마음껏 정원을 뛰어다녔고, 나와 샤본도 오랜만에 멋진 정원을 다정하게 산책할 수 있었다.
“저···. 주인어른께서 여러분들을 점심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아이리위안의 주인이라면 상하이 최고의 부자다.
아니, 어쩌면 중국에서 쿵샹시 다음가는 부자가 아닐까 싶은데 왜 우리에게 잘해주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대답이 없는 나와 아내를 보면서 초대하러 온 시녀는 한 마디 더했다.
“주인님께서 오랜만에 젊은 시절 기억을 떠올려줘서 고맙다고 하시면서 식사에 초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아이들을 위해서 정원도 보여주시고 식사까지 초대하셨는데. 그냥, 갈 수도 없겠네요. 그럼,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시녀의 안내를 받아서 도착한 곳에는 정갈하고 깔끔한 음식들이 식탁 가득히 준비되어 있었다.
“어서들 오게. 내가 먹는 방식으로 음식을 준비했는데 괜찮을지 모르겠군. 다들 앉아서 식사하세.”
“예,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잘 먹겠습니다.”
우리 가족은 아이리위안의 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서 식사하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아이들은 다시 밖으로 나가서 놀았고, 나와 아이리위안의 주인은 자리에 앉아서 차를 한 잔씩 하게 됐다.
“자네와 아이들을 보니까 옛날 나와 내 아이들이 생각나서 이곳으로 초대한 거네.”
“아! 그러셨습니까?”
“응, 나와 아내와의 사이에는 아이가 없어서 우리도 아이들을 많이 입양했었거든.”
“아!”
어쩐지 아무런 접점도 없는데 우리 가족에게 친절하게 대해준다 생각했더니 이런 사연이 있었다.
“어르신의 아이들이라면 이제는 다들 어른이 됐겠군요.”
“응, 그래, 이젠 다들 컸지.”
나와 아이리위안의 주인은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각자의 가족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 그럼, 어르신이 처음 사업을 시작한 것이 사순 양행을 그만두고 하신 거군요?”
“그래, 내가 상하이에 처음 와서 한 일이 사순 양행에서 경비를 본 것이었어.”
노인은 오랜만에 말문을 열었는지 쉬지 않고 자신의 일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나한테 해왔다.
“자네도 아이들이 많으니까 혹시 재산을 어떻게 나눠 줄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
내 재산?
내 재산은 샤본 레이놀즈와 공동 소유였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에게 재산을 물려줄 생각이 없었다.
미국 최고의 부자인 록펠러도 자식들에게 정말 눈곱 만큼씩만 물려주고 나머지는 재단을 만들었다.
“음···. 저는 아직까지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저와 아내는 아이들에게 재산을 물려줄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 어째서 말인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게 재산을 물려줬을 때, 아이들이 잘되는 경우보다 잘 못 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브라함 하둔.
노인이 말하지 않아도 나는 노인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노인의 가족들과 노인의 재산이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도 알고 있었다.
“재산을 물려주면 아이들을 망친다는 소린가?”
“예, 그렇게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이브라함 하둔은 내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고민이 많을 것이다.
이브라함 하둔도 나처럼 많은 자식을 입양했다.
무려 22명이다.
“그럼, 자네는 재산을 어떡하겠다는 말인가?”
“제 재산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일단, 제 재산은 아내와 공동 소유이고 혹시 제가 먼저 죽게 되면, 아내가 가지고 있다가 재단을 하나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 돕는데 쓰고 싶습니다.”
“아내에게 물려줬다가 나중에 재단을 만들어서 다른 사람을 돕겠다고?”
“예, 저는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왜? 내가 어렵게 번 돈을 남을 위해서 쓴다는 말인가?”
“어르신이나 저나 돈을 혼자서 벌었습니까?”
“나는 내 아내와 함께 벌었네.”
“제 말은 그 말이 아닙니다. 어르신은 중국에서 돈을 버셨고 주로 이곳 상하이에서 버셨습니다. 그럼, 어르신의 돈은 원래는 중국과 상하이의 돈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중국과 상하이 사람들에게 돌려주라는 말인가?”
“저는 아무런 의미 없이 나눠줄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나눠 줄 때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음···. 그럼, 어떡하라는 말인가?”
“상하이에 홍수가 나면 도와주고 가뭄이 들면 도와주고 이런식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십시오. 아니면, 중국에 돈이 없어서 하기 어려운 일을 도와주셔도 좋겠죠.”
“나는 지금까지 평생을 남에게 뭔가를 공짜로 준 적은 없네.”
그러시겠죠.
상하이의 황제를 꿈꾸셨던 아저씨.
하지만, 당신이 죽고 당신 아내가 죽고 나면 당신의 재산은 신기루처럼 사라집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는, 어차피 사라질 재산 이브라힘 하둔이라는 이름이라도 남기라고 해준 소리였다.
이브라힘 하둔과 조금 더 이야기하고, 아이들이 너무 열심히 노는 바람에 지쳐서 힘들어하자 집으로 돌아왔다.
* * *
이브라힘 하둔과 만나고도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톈진에서 만났던 이회영 선생님과 광주로 떠난 빈센트 신부님은 연락이 없었다.
속으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장님!”
“예, 머피 씨”
“사무실로 사장님의 명함을 들고 온 사람이 있습니다.”
“명함이요?”
드디어, 이회영 선생님이 사람을 보낸 모양이었다.
“바로, 사무실로 가보죠.”
나는 상하이 총회를 나와서 ‘나이키 신발 공업’의 사무실로 서둘러서 갔다.
사무실에 명함을 들고 온 남자는 내가 기억하는 사진 속에 있던 이회영 선생님의 아들이었다.
“우당 선생님께서는 무사하십니까?”
“예, 아버님은 무사하십니다.”
“아이고, 다행입니다. 나는 하도 연락이 없으셔서 혹시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매일매일 마음을 졸였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걱정했다는 것을 느꼈는지
“아버님께서도 상하이에 같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는 선생님을 한번 만나 뵙고 싶으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그럼, 지금 바로 만나러 가시죠.”
이회영 선생의 아들이 나를 안내해서 데려간 곳은 프랑스 조계지의 구석진 뒷골목이었다.
프랑스 조계지에서 일하면서 살아가는 중국인들의 쪽방촌이었다.
“아버님께서는 이곳에 계십니다.”
이회영 선생의 아들이 문을 열고 내가 먼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줬다.
서너 평의 방이 두 개가 연결된 구조의 방이었다.
“이 선생, 어서 오시오.”
“아이고, 선생님 하도 연락이 없으셔서 저는 선생님께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습니다.”
이회영 선생에게 인사를 하고 주위를 보는 순간 좁디좁은 방 안에 사람이 가득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선생님 여기 이분들은 누구십니까?”
“여기는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식구들과 내 가족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흑색공포단 그분들인가?’
일단, 누가 뭐라고 해도 사는 곳이 너무 좁고 누추했다.
나는 이회영 선생님과 흑색공포단의 가족들이 상하이에서 단, 며칠을 머물다 가시더라도 편하게 머무르게 하고 싶었다.
“머피 씨, 근처에 좀 더 넓은 집이 있는지 나가서 좀 알아봐요.”
“예, 사장님.”
그러다가 구석에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머피 씨를 불렀다.
“머피 씨, 근처 식당에 가서 음식 좀 주문해서 여기로 가져오세요.”
“예, 사장님.”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아닙니다. 일단, 뭘 좀 먹고 이야기를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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