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상하이의 한량으로 불리는 사나이.
11. 상하이의 한량으로 불리는 사나이.
나를 전부터 알던 사람도 그리고 나를 몰랐던 사람들도 내가 갑자기 변한 모습에 놀랐다.
하지만, 내가 변한 것에 놀랄 필요는 전혀 없다.
나는 원래 처음부터 이렇게 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대가리 처박고 사업에만 몰두했던 내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내 아버지 이두형의 조기 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이윤호의 기억 때문이었다.
내 아버지 이두형은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자로 인천에서 갈릭호’를 타고 하와이에 이민을 온 사람이다.
그때,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셔서 안 계셨었다.
“영호야, 지도자가 무능하면 나라가 망하고, 나라가 망하면 백성들이 고생한단다. 나중에 내 아들 영호가 크면 나라를 되찾는 데 힘을 보탰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한인 교회에 가실 때마다 항상 이런 소리를 하셨다.
그리고, 한인 교회에 도착해서 예배를 보기 전에 태극기에 절을 하고 애국가를 부르고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이런 교육을 코를 질질 흘리던 시절부터 받아왔던 나는 이미 어떤 계기만 주어지면 변할 가능성이 농후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일반 보병이 아니라 일왕의 대가리에 폭탄을 떨구고 기관총을 쏠 수가 있는 조종사를 지원했던 것이다.
그다음으로 나를 갑자기 변하게 만든 원인은 이윤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수많은 친일파들이었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서, 없는 살림에 매달 애국 성금을 내신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은 독립유공자라는 칭호도 부끄럽다고 거부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 충성하고 일본을 위해서 살아왔던 놈들이 버젓이 독립유공자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순간 빡쳐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암살’이었던가?
민족의 배신자 ‘염석진’을 끝까지 추적해서 처단하는 것을 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대한민국이 독립하고 친일파와 광복군이 대한민국 국군으로 같이 근무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황국신민으로써 자랑스러운 성전에 참여하자고 학도병과 정신대를 모집하던 놈들이 민족의 지도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을 봐야 하겠나?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독립운동가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든 순사 놈들이 다시 대한민국의 경찰이 되는 것을 봐야 하겠는가?
어디, 이것들 뿐이겠는가?
우리 인민들을 수탈하는데 앞장섰던 은행가 놈들, 독립운동가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검사 새끼들, 어린 새싹들에게 충성스러운 황국신민이 돼야 한다고 가르쳤던 선생 새끼들. 목사, 스님, 신부, 기자의 탈을 쓰고 민족을 배신했던 놈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래서 어떡하겠다는 거냐고?
나는 청소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뭔가 좀 미친놈 같지?
낮에는 선량한 사업가.
밤에는 배트맨처럼 악의 무리를 죽일 때마다 희열을 느끼는 사람···.
* * *
두웨성은 자신의 근거지로 나를 초대를 했다.
상하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나쁜 짓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곳.
아편, 도박, 섹스, 그리고···. 불법이라면 모든 것이 가능한 곳이었다.
안내를 받아서 도착한 곳에서는 만한전석에 버금갈만한 성대한 연회가 준비되고 있었다.
십여 명의 붉은색 비단 치파오는 입은 여자들이 바쁘게 음식을 날랐고, 두웨성은 직접 나를 자리에 앉혔다.
“조지, 여기에 앉아라. 여기 준비된 것들이 내 목숨을 살려 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내 성의니까 마음껏 들어라!”
두웨성과 내가 앉은 테이블은 성인 남자 열 명 이상이 앉아도 자리가 남을 정도로 넓었다.
그리고,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들 역시 한 젓가락씩만 먹는다고 해도 삼사일은 충분히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이었다.
‘두웨성이 의리와 순정이 있는 남자라고 하더니 그것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제가 한 것도 없는데 너무 성대한 대접이십니다. 그래도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래그래, 많이 먹어라! 그런데, 조지, 나는 정말 궁금하구나. 너는 정말로 사람들의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거냐?”
역시 미신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가장 먼저 그것을 물었다.
“아닙니다. 가끔, 아주 가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렇습니다. 제가 사람들의 미래를 모두 알 수 있다면, 뭐 하려고 아등바등 사업을 하면서 살겠습니까?”
나를 유심히 관찰하던 두웨성은 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렇지. 사람들의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사업 같은 것은 할 필요가 없지.”
“그래도, 두 선생께서 아무 일이 없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것이 모두, 조지 네 덕분이다. 이 은혜는 내가 평생 잊지 않으마.”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십니까? 두 선생님과 제가 인연이 있었는지 다른 사람의 미래는 보이지 않다가 두 선생님의 위험이 눈에 보여서 알려 드린 것뿐입니다.”
“조지, 나는 너를 가족이나 형제로 여기겠다고 했는데, 너는 아직도 나를 두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거냐?”
아무리 당신이 부르라고 한다고 바로 그럴 수는 없지 않겠어요?
우리 한국인들은 겸손과 사양의 민족인데.
“그럼, 제가 두 선생님을 대형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조지, 너는 앞으로 나 두웨성의 동생이다.”
“알겠습니다. 대형”
이렇게 간단하고 쉽게 두웨성의 신임을 얻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 일 년 정도는 투자해야 인연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으하하, 오늘은 나한테 정말로 귀중한 동생이 한 명이 생겼구나. 그래, 동생은 뭐 필요한 것은 없고?”
“아직은 없습니다.”
“음···. 뭐라도 내가 해주고 싶은데···. 그럼, 언제든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바로 나한테 말해라”
“예, 대형!”
힘차게 대답하고 잠시 눈치를 보다가
“저, 그런데 두 대형, 제가 대형의 동생이 된 것을 당분간만 숨기고 싶습니다.”
두웨성은 자신의 호의가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두 대형, 저한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가 뭐지?”
두웨성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목소리마저 변해 있었다.
“저는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상하이 도쿄 간 항공노선을 꼭 개통해야만 합니다.”
두웨성은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자신보다 항공노선을 개통하는 것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 것처럼 보였다.
“두 대형께 구구절절 속 사정까지는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저는 조선인 아버지를 두고 있습니다.”
“그럼, 너도 조선인이라는 말이냐?”
그제야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예, 나라를 빼앗기는 바람에 그동안은 국적도 없다가 전쟁에 참전하고 겨우 미국 영주권을 받았습니다.”
“음···.”
“왜? 대형을 섬기는 것보다 그 일에 목숨을 거느냐고 묻지는 말아주십시오. 저에게는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면 알아들을 것으로 생각했다.
만약, 못 알아듣는다면 내 운이 여기까지 일뿐이다.
나에게는 두웨성과의 교류도 중요하지만, 상하이 도쿄 간 항공노선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조지, 니가 나에 대해서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 나는 니가 생각하는 만큼 속이 좁은 놈이 아니다. 나에게 있어서 한번 가족은 영원히 가족이다.”
‘역시, 두웨성은 신세계의 정청하고 똑같구나.’
“두 대형, 곤란한 처지의 저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다. 음식이 식기 전에 어서 먹거라! 그리고 언제든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바로 옌안중루 도박장으로 오든지 아니면 동흥공사로 찾아와라.”
“예, 두 대형.”
‘두웨성 따꺼!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나를 꼭 한 번만 도와주셔야 합니다.’
소원을 말하라고 한다고 덥석 소원을 말하면, 그동안 내가 기껏 쌓은 이미지를 무너트리는 일이다.
앞으로도 나는 몇 번 더 두웨성을 도와줄 것이다.
그리고, 그때 가서 은근슬쩍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도 충분했다.
그때부터는 두웨성이 알아서 내가 하는 일을 스스로 나서서 도와줄 것이다.
* * *
내 생활은 두웨성을 대형으로 모신 이후에도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요즘은 ‘상하이의 한량’이라는 새로운 별명까지 생겼다.
상하이 총회에 매일 출석하는 것은 당연하고, 가끔 홍차오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 하늘을 날아다녔고, 징안스 경마장에 가서 말밥도 주고, Foreign Y.M.C.A.에 들려서 중국계 인사들과도 교류를 나눴다.
“조지, 그 아이들은 누구예요?”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 겨울이 다가오자 나는 백군 러시아 난민들이 생활하는 곳에서 아이들을 몇 명을 데려왔다.
“아! 내가 일이 있어서 러시아 난민들이 사는 곳을 지나가는데, 아이들이 하도 불쌍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그냥 데려왔어.”
아내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다가 아이들의 꾀죄죄한 모습을 보고는
“이런, 너희들 왜 이렇게 삐쩍 마른 거니?”
“부모가 없어서 며칠을 굶었는지도 모른다고 해서 내가 그냥 데려온 거라니까”
“정말요?”
“그래, 어서 아이들을 씻기고 먹을 것이라도 좀 챙겨줘.”
그제야 아내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고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어서, 무럭무럭 자라서 흥부에게 은혜를 갚는 제비처럼 되어라!’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씻기러 가면서 가정교사인 김순애와 가정부인 메이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김 선생님! 메이방! 나를 좀 도와주면 안 될까요?”
방에서 아이들에게 한글과 한국의 역사를 가르치던 김순애와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던 메이방이 급하게 뛰어나왔다.
“어머, 안녕하세요.”
“주인님, 오셨습니까?”
거실에 서 있는 나를 보고 둘은 조금 놀랐는지 서둘러 인사를 했다.
“예, 안녕하십니까.”
나에게 인사를 한 김순애와 메이방은 아내가 부르는 곳으로 뛰어갔다.
상하이로 올 때, 상하이 도쿄 간 노선 계약을 따낼 때까지는 일본의 오해를 받을만한 짓은 절대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아내가 아이들의 가정교사를 구할 때, 하필이면 조선인을 구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밖에 없게 돼버렸다.
김순애는 우사 김규식 선생의 아내로 일제의 감시를 피해서 항상 도망을 다니는 남편을 대신해서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나뭇잎들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를 보고 있자니 상하이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화려했던 날은 가고 이제 수십 년간은 암울할 상하이의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은 공평하다.
지금은 화려한 상하이가 앞으로 암울한 미래만 있다면, 그 옆의 우리 대한민국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다.
어느새 아이들을 다 씻겼는지 아내가 다가왔다.
“아이들을 벌써 다 씻기고 밥을 먹인 거야?”
“응, 그런데···.”
아내는 나한테 뭔가 말을 하려다가 내 눈치를 보면서 말을 멈췄다.
“왜?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조지, 정말 저 아이들을 아무 생각 없이 데려온 거예요?”
헉!
아이들이 불었나?
아! 몰라. 그냥 모르는 척하자.
“응, 맞아. 애들이 하도 불쌍해 보여서 그런데 왜?”
“아니요. 아이들은 당신이 일일이 나이와 가족관계까지 확인하고 데려왔다고 해서요.”
“이왕 도와줄 거면 부모가 없는 녀석들이 좋을 것 같아서···.”
“정말로···. 아뇨. 알았어요.”
아내는 뭔가를 눈치챘는지 찬바람이 날 정도로 쌩하니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 *
상하이 총영사가 나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공동조계의 상하이 영사관을 찾았다.
“조지 리 중위, 어서 오세요.”
“총영사님께서 저를 찾는 것을 보니까 이제야 육군부의 결정이 떨어진 모양이군요.”
커닝엄 총영사는 미소를 지으면서
“맞습니다. 육군부에서 조지 리 중위의 일을 최우선으로 도우라는 명령이 도착했습니다.”
“저는 연락이 너무 늦어져서, 저 혼자 일을 추진하려고 했었는데 아무튼 다행입니다.”
커닝엄은 내가 마실 차를 주문하고 육군부에서 보낸 비밀전문을 나한테 보여줬다.
전문의 내용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이미, 육군부 장관과 비행학교 창설과 조종사 양성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나눴던 대화에 다 포함된 내용이었다.
“그럼, 내가 무엇을 도와야 합니까?”
“총영사님께서는 일본 공사와 협의를 하셔서 항공노선을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일본 측에서 의심하지는 않을까요?”
“상하이 도쿄 간 노선이 생기면, 일본에 좋은 점을 어필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게 마땅치 않아서 말입니다. 괜히 의심을 사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럼, 하와이 도쿄 노선도 같이 만들자고 이야기를 해보십시오.”
“하와이와 도쿄 노선도 운항할 생각입니까?”
하와이 도쿄 노선은 미국에는 양날의 칼이었다.
하와이 도쿄 노선은 미국이 도쿄를 공습하려고 할 때 이용할 수 있지만, 반대로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공격 루트였다.
“제가 육군부 장관님께 거기 까지는 허락을 받아놨습니다. 그리고, 일본 측에서 하와이 노선을 운항할지 하지 않을지는 아직 모르잖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일본이 불순한 의도를 가진다면···.”
“총영사님, 그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항로를 아예 모르는 것과 서로 알고 있는 것은 다릅니다.”
서로 항로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손해는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예 모르는 것이 더 큰 손해다.
길을 알아야 반격이라도 할 것이 아닌가?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일본의 총영사와 협의를 해주십시오. 저도 상하이의 일본인들을 상대로 로비를 해보겠습니다.”
커닝엄 총영사는 얼굴에 약간의 걱정이 남아 있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조지 리 중위도 나를 좀 도와주세요. 일본 상인회장이라든지 힘을 좀 쓸만한 사람들에게 로비를 좀 해주십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뭔가 앞뒤가 바뀐 느낌이었다.
상하이 도쿄 간 항공로는 내가 주도해서 만들어야 하는데, 커닝엄 총영사와 내 위치가 서로 바뀐 느낌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