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다니는 무기고 175화
“재밌지 않아?”
우리의 눈앞에 있는 남자, 화이트의 직원 박지운의 말이었다.
맥주를 한잔하자는 그의 제안에 우리는 곧장 3층의 탈의실로 향했고, 그곳에서 각각 ‘이민기’, ‘오지호’라 적힌 사물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에 들어 있던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그의 뒤를 따라나선 것이다.
능숙하게 텔레포트를 이용하는 그의 뒤를 따라온 것은 강남의 한 술집.
한두 번 온 것이 아닌 듯 자연스러운 그의 행동에 맞춰 맞은편에 마주 앉았다.
“뭐가?”
도깨비방망이를 이용해 변한 이민기와 오지호, 그리고 박지운은 서로 친한 직장 동료 사이라는 것을 파악했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말을 놓으며 반응했다.
술을 한 잔 마신 그의 뜬금없는 질문에 대답하자,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 사람들을 봐. 저 사람들 중 몬스터의 위험성에 대해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아?”
“…….”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시선을 내리깔며 앞에 놓인 맥주를 들이켜자, 그에 대한 대답은 그의 몫이었다.
“한 사람도 없을걸?”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꽤나 넓은 크기의 술집.
테이블이 꽉 들어찬 이곳엔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 몬스터의 위험성을 아는 이가 단 한 명도 없다니…….
박지운에게 들키지 않게 연기하기에 앞서, 진심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뿐이야? 저들은 서울 외에 다른 지역이 남아 있지 않은 걸 몰라. 이제 곧 이 모든 상황이 해결될 거로 알고 있지.”
이건 또 무슨 소리이가.
연거푸 맥주를 들이켠 그는 술이 강하지 못한 듯 홍조를 띠며 말을 했다.
“그, 그렇지.”
대충 그의 말에 동조하자, 알아서 설명을 이어갔다.
“상황이 터진 그 날부터 화이트가 서울을 보호했으니 당연하겠지. 저들 중 몬스터를 보지도 못한 이들이 대다수고 지금의 봉쇄된 상황을 그저 ‘비상사태’ 정도로 여기니…….”
주저리주저리 말을 이어가면서도 쉬지 않고 술을 들이켜는 박지운.
민혁은 그의 얼굴에 피어난 홍조가 더욱 짙어지는 것을 보며 도박수를 던졌다.
“상황이 해결될 것으로 안다는 게 무슨 말이야?”
모르는 척 질문을 던진 것이다.
화이트의 직원이라면 모를 리 없는 질문일 테지만, 그는 술에 취해가고 있다.
“엥? 몰라서 하는 말이야? 너 취했구나?”
술이 약해 판단력이 흐트러진 그는 이상함을 느꼈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흠…… 저들은 심판의 날이 비상사태의 끝인 줄 알고 있어.”
이윽고 이어지는 그의 설명.
그것은 김낙현, 강성곤이 들려준 이야기와 어느 정도 일치했다.
세상이 변한 그 날, 서울 역시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하지만 다른 지역과는 달리, 서울만은 안전했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행동을 시작한 화이트 덕분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서울 전역을 감싸는 거대한 방벽을 만들어냈고, 사람들을 보호했다.
‘비상사태.’
단순명료한 그 한 단어로 상황을 설명했고,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마치 오랜 기간 준비를 한 것처럼.
능력이 생겨난 이들은 화이트에서 데려갔고, 그들은 직원이 되었다.
강하고 쓸 만한 능력일수록 높은 직급으로 올라갈 수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능력이 없는 자들 역시 달라질 것은 없었다.
화이트에 의해 통제된 그들은 다름없는 일상을 살아갔고, 어떤 위협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마나와 스킬로 인한 도시의 발전과 부흥을 누리는 듯했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심판의 날…….’
박지운, 아니, 화이트가 말하는 심판의 날이자 비상사태가 끝나는 그 날이 뜻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바로 마나석, 마석 등으로 불리는 그것을 발동시키는 그 날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미 들은바, 알고 있었지만.
다시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에 있는 박지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마나석이 발동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제물들이 그 역할을 하겠지.”
“…….”
살짝 술이 깬 듯 진지하게 답변하는 그.
그가 말하는 제물들, 그것은 서울 전역의 모든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었다.
“죄책감은 없나?”
“그게 그들의 역할인 걸 어떡하겠나…….”
“…….”
“마나석이 발동되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했지. 마나로 가득찬 세상, 지금을 보게나 약간의 마나 만으로도 완전히 바뀌어버린 세상을…… 그때가 된다면 우리는 더 높은 명예와 부를 쥐게 되겠지. 분명 그럴 걸세…… 그가 그리 말했으니…… 윽.”
털썩.
그 말을 끝으로 한계에 다다른 듯 그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으며 쓰러졌다.
술에 완전히 취해 버린 것이었다.
“마나로 가득 찬 세상이라…….”
화이트, 그들이 원하는 세상.
그것은 분명 대단한 가치가 있었다.
지금 서울의 상황만 봐도 그랬고, 이재혁의 능력으로 일구어낸 심현섭의 마을도, 용병 마을 또한 마찬가지였다.
석유나 전기가 없어도 아주 간단하게 마나를 이용해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었다.
그뿐이랴, 굴착기가 없어도 개인의 능력으로 더 많은 흙을 파낼 수 있었고, 지게차가 없이도 엄청난 무게를 들 수 있었다.
순식간에 건물을 만들어 냈고, 아무리 먼 거리도 단숨에 이동했다.
화이트의 말마따나 아직 마나가 가득 찬 세상은 아니었지만.
마나석을 본뜬 마정석의 힘을 이용해 이뤄낸 것이었다.
확실히 대단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가 너무 컸다.
화이트가 마나석을 발동시키는 순간, 다른 차원의 세계가 열린다고 했다.
그곳은 아마 마나가 있는 세계일 터.
‘그로 인해 마나가 흘러들어 오는 것일 테지.’
세상을 연결시킨다.
그것뿐이라면 화이트에 대항할 이유가 없다.
다만, 그로 인해 생겨난 것들.
몬스터 때문이었다.
마나가 생겨남과 동시에 몬스터 역시 생겨났고, 그것은 연결된 다른 차원의 세계에 몬스터가 살기 때문으로 보였다.
아직 화이트의 계획이 제대로 실행되지도 않은 지금조차도 그들은 엄청난 숫자로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었다.
세상이 연결된 순간 얼마나 더 강하고 많은 몬스터들이 이곳으로 넘어오게 될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중엔 아자토스 같은 놈들도 있을 테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예? 아, 잘 못 들었습니다?”
앞에 취해 자고 있는 박지운을 보며 자연스럽게 신우에게 말을 걸었다.
그동안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고 있던 그였기에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의견을 물어본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멍청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신우 이 녀석.
“너, 집이 강남이라고 했었지?”
“예, 맞습니다.”
아무래도 가까운 곳에 있을 가족을 생각하는 듯했다.
왜 아니겠는가.
지금껏 서울을 목표로 헤쳐온 이유.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온 이유는 전부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서울, 그것도 자신의 보금자리였던 강남에 왔으니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도 화이트가 아니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잠시 미룬 것뿐.
“보고 올래?”
“예? 아, 잘 못 들었습니다?”
“가족들 말이야. 근처일 거 아니야. 궁금하지 않아?”
“아, 아닙니다. 그보다 화이트를 먼저…….”
“됐어. 네가 잠깐 시간 좀 낸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강남에 온 김에 가족들을 보고와. 어차피 모습도 다르고, 정체만 밝히지 않으면 문제 없을 거야.”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멍하니 있던 신우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재차 물어오는 녀석.
해야 할 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그에게 말한 그대로 잠깐이라면 문제없었다.
만일을 대비해 정체를 밝힐 순 없겠지만, 안위를 확인하는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다.
“그럼 이제 일어나자.”
“예, 예.”
은근히 기쁜 기색을 보이는 신우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술집을 나서려고 하자 저 멀리서 다가와 말을 거는 남자.
술집의 점원으로 보이는 그가 나려는 우리를 붙잡은 것이었다.
“저기 손님, 계산은?”
“저, 자가 할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손으로 가리킨 것은 술에 취해 자고 있는 박지운.
그런 그를 그대로 둔 채 우리는 밖으로 나섰다.
* * *
“여기야?”
“예, 맞습니다.”
“오…… 너 부자구나?”
“하하하, 아닙니다…….”
술집에서 나온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으리으리한 집 앞이었다.
신우가 자신의 집이라 데려온 이곳.
그는 부정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지만, 마음속으론 확신했다.
‘이 녀석 엄청난 부자였잖아?’
대한민국에서 가장 땅값이 비싸다는 강남.
그것도 상권이 몰린 이곳에 이런 어마어마한 크기의 집이 있다는 것은 부자가 아니고서야 절대 불가능했다.
신우가 부자든 아니든 상관은 없었지만, 그동안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놀랐던 것이다.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겠지.’
신우에게 물어볼까 하였으나 그러지 않았다.
“어떻게 할래? 같이 가줄까? 아니면…….”
“아닙니다.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거 빌려줄게.”
“이건…….”
다른 사람인 척 연기하면서 다녀오라고 하려 했지만, 이미 신우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이대로 보내기엔 자신의 가족들을 보는 순간 눈물을 쏟아낼 것이 분명했다.
화이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신우가 눈물을 쏟으면 이상하게 여길 것이 뻔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루핀의 반지야.”
마침 지금은 밤이었고, 몰래 다녀오기엔 이만한 아이템이 없었다.
착용자의 기척을 지우는 반지를 신우에게 건네자, 그가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이 병장님.”
“근처에 있을게, 다녀와.”
“예, 알겠습니다.”
* * *
이민혁에게 반지를 건네받은 강신우는 바로 그것을 착용했다.
넉넉한 사이즈의 반지는 그의 손가락에 맞게 줄어들었고, 그와 동시에 모습이 사라졌다.
강신우의 모습과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었다.
“읏차.”
꽤 높이 올려져 있는 대리석의 담장.
신우에게 그것을 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어떤 준비 동작도 없이 단숨에 담장을 넘은 신우의 몸이 잘 정리된 잔디에 안착했다.
‘마당은 그대로네. 달라진 게 없어.’
오랜만에 들어온 안식처.
마당일 뿐이었지만, 익숙한 그것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넓은 마당에 심어진 나무도 꽃도, 잘 가꿔진 연못까지도 전부 그대로였다.
강신우는 마당을 지나 집으로 향했다.
‘여전히 문은 잘 안 닫으시네.’
담장을 넘었음에도 마당은 길게 이어졌다.
하지만 평생 살아온 신우에게 그것은 익숙했고, 집 앞에 도착하자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신우는 곧장 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갔고 가족들을 찾기 시작했다.
“우리 아들 잘 있겠죠?”
현관을 지난 순간 들려온 익숙한 여성의 음성.
신우는 조심스레 그곳으로 발걸음을 이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