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다니는 무기고 139화
“여기에요.”
현지를 따라 도착한 장소는 아무리 살펴봐도 수련장이 확실했다.
검술을 연습하기 위해 설치해 둔 것으로 보이는 허수아비들은 수십 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누군가 얼마나 때리고 두들겼는지 멀쩡한 것 하나 없이 너덜너덜해져 버린 그것들은 마을의 성향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끼이이익.
수련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로 보이는 것은 익숙한 뒷모습.
평소의 레이피어가 아닌 목검을 들고 있는 그녀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로 돌아섰다.
“……어!”
“주현 님 맞으시죠?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네.”
여전히 말수가 적은 주현은 홀로 수련을 하고 있었는지 땀에 흠뻑 젖은 채 우리를 맞아주었다.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쭈뼛쭈뼛 서 있던 그녀는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고,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드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그녀 개인만의 공간인 듯 소박하지만 정갈하게 꾸며진 사무실에 들어서자, 손을 씻으며 차를 건네왔다.
녹차 특유의 향기가 방 안 가득 퍼지자 그녀 또한 우리의 앞에 앉았다.
다소곳하게 앉아 자신의 차를 홀짝거린 그녀는 잔을 내려놓으며 빤히 쳐다보았다.
“저, 사과를 드리러 왔습니다.”
“……?”
용건이 무엇이냐는 듯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표정에 들고 있던 찻잔을 급히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저희 동료 때문에 마을 분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신우의 이야기를 하자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차를 홀짝거리며 마실 뿐 어떠한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그, 그게 끝인가요? 저희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피해 입으신 분들에 대한 보상이라도…….”
“…….”
너무나도 무덤덤한 행동에 오히려 나서서 대가를 치르겠다고 했지만 역시 그녀는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신우로 인해 사람들이 다친 것은 100% 우리의 잘못이 분명했다.
그들의 수장인 그녀가 불같이 화를 내거나 피해로 인한 대가로 코인을 요구해도 전부 응할 생각을 가지고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요구도 해오지 않았고 조용히 차만 마시며 앉아 있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
같은 공간에 앉아 있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그때 바깥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부르르릉. 끼이익.
저벅. 저벅.
차에서 내린 그들이 수련장으로 들어오는 듯 발소리가 함께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응? 오! 자네 드디어 깨어났구만.”
“허허허, 사내가 그렇게 허약해서 쓰겠는가? 어때 몸은 좀 괜찮은가?”
“민혁 씨 일어나셨군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강성곤과 김낙현, 그리고 이재혁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곧장 자리에 일어서며 인사하자 그들은 한마디씩 건네며 다가왔다.
“네, 덕분에 감사합니다. 또 이렇게 민폐를 끼쳤네요.”
“허허허, 아닐세. 그래. 이곳엔 어쩐 일로 왔는가?”
“저희 동료 때문에 피해를 입은 분들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응? 껄껄걸. 뭐 그런 거로 다 사과를 하는가? 자네와 다르게 펄펄한 친구더구만 껄껄껄.”
악수를 나누며 그들은 이곳에 있는 이유를 물었고, 다시 한번 같은 대답이 이어졌다.
하지만 역시 이들 역시 주현과 표현만 다를 뿐 같은 반응이 이어졌다.
별거 아니라는 듯 크게 웃어 보인 그들은 주현을 발견하곤 인사했다.
“주현 님 저희 다녀왔습니다.”
“……네.”
이번에도 역시 무미건조한 반응이었지만, 그들은 익숙한 듯 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어갔다.
“숲에 있던 트럭과 보내온 물품들은 전부 회수했습니다.”
“그렇군요.”
“여기 있는 이재혁 씨가 저희 마을을 도와주시러 온 분입니다. 애초의 거래의 목적이기도 했구요.”
“반갑습니다. 이재혁이라고 합니다.”
이재혁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그녀를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받아주었다.
“그렇지, 재혁에게 들었네. 자네들이 이번 거래를 맡아 대표 자격으로 찾아왔다더구만.”
“아,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허허, 그 영감 사람 다루는 게 보통이 아니구만. 우리도 몇 번 당해본 적이 있어서 아네. 능구렁이 같은 영감이야.”
“하하하.”
지켜보던 김낙현은 무언가 생각난 듯 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들의 정식적인 초청을 받아 온 것도 있었지만, 표면적인 이유는 심현섭의 부탁 때문이었다.
마을을 대표한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어디까지나 거래를 위해 온 것은 맞았기에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물품들은…… 못 쓰게 된 것이 대부분일 텐데. 어떻게 해야…….”
“응? 아 트럭 안에 있던 것들 말인가? 허허허. 맞네. 말이 아니더구만.”
“……죄송합니다.”
거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곧바로 망가진 물품들을 떠올리며 미안함을 건넸다.
절벽이 무너지며 같이 떨어진 트럭 안에 있던 그것들이 무사할 리는 없었다.
물론 사용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지만, 이것은 개인과 개인 간의 단순한 거래가 아니었다.
마을끼리 정식 계약을 통한 거래였기에 더 큰 책임감이 부여되었고, 거래 물품이 파손되었다는 것은 막중한 책임이 따랐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던 그때 입을 연 것은 조용히 듣고 있던 주현이었다.
“……괜찮아요. 저희 책임도 있는 걸요.”
“네?”
그녀의 대답에 의아해 반문하자, 옆에 있던 강성곤이 설명을 이어갔다.
“걱정하지 말게. 트롤들에 의한 것이니 이해하네. 우리 또한 언젠가 마을 주변에 있는 트롤들을 토벌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거든.”
“트롤들을 말입니까?”
“맞네. 점점 영역을 확장하는 트롤들이 우리 마을에 위협이 되던 참이었거든.”
“하지만 그래도 약속했던 물품들이…….”
“괜찮대도. 당분간은 넉넉하진 않아도 남아 있는 것들로 생활할 수 있고, 거래도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니 문제없네. 무엇보다…….”
말수가 적은 주현과 오랫동안 생활을 해와서인지 그들은 그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현지와 나를 보며 설명을 해주는 것과 반대로 김낙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네들 덕분에 트롤들의 영역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네.”
“영역이 줄어들어요?”
“맞네. 트롤킹의 존재…… 우리도 몰랐던 거지만 자네들이 녀석을 쓰러뜨리자 트롤들의 개체 수가 확연히 줄어들었어. 우리가 직접 확인하고 오는 길이네.”
“……그렇군요.”
“자네들에게 오히려 우리가 감사 인사를 건네야 할지도 모르겠구만. 더 이상 트롤들을 찾아내는 게 힘들 정도였네. 덕분에 마을 사람들의 안전이 보장되었네.”
이어지는 강성곤의 말을 들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트롤들은 갑작스럽게 늘어났고 그것은 마을에 위협을 가져다주었다.
생각해보면 그 원인은 트롤킹의 존재가 나타났기 때문이었을 터.
하지만 마을에선 그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고, 토벌을 계획 중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우리가 숲에 들어가게 되었고, 우연히 어떤 조건을 달성해 트롤킹이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보였다.
‘물품 몇 개보다 더 큰 것을 얻었다는 것인가.’
확실이 그들의 입장에선 나쁠 것이 없어 보였다.
당장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이 망가지기는 했으나, 강력했던 트롤킹의 존재와 트롤들의 개체 수가 줄었다.
그것은 마을을 위협하는 적들이 사라진 것과 같았기에 오히려 더 큰 이득을 받았다고 해도 무방한 것이었다.
“그렇게 된 것이네.”
“그렇군요.”
“아, 참. 그렇지 약속했던 거래 금액이네. 자네에게 주면 되겠지?”
“예, 예.”
모든 설명을 마친 그는 무언가 생각한 듯 소리쳤다.
바로 물품을 건네주면 코인으로 받기로 했던 돈이었다.
동맹 간의 거래라곤 했지만 가장 중요하면서도 예민한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신중하게 물어본 그는 조심스레 허공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준비해 놓은 듯 허공의 홀로그램을 살펴보는 듯한 행동을 하던 그는 앞에 놓여 있는 테이블에 코인들을 꺼내놓았다.
“자, 여기 약속했던 코인일세.”
“……아. 이…… 이게?”
꽤나 거액일 것은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양의 코인.
테이블 위를 산처럼 쌓아 올린 코인은 셀 수조차 없이 막대했다.
“총 10만 코인이네.”
“시…… 십만 코인이요?”
이어진 그의 말에 놀라기엔 충분했다.
코인의 액수를 들음과 동시에 입이 떡 벌어지며 넋이 나갔다.
“허허허, 노인에게 액수는 듣지 못한 모양이구만.”
“아, 예…….”
“너무 그렇게 놀라지 말게. 첫 거래다 보니 액수를 적게 측정한 것이네. 앞으로 차츰 더 늘려갈 계획이네.”
“그렇군요.”
“아무래도 첫 거래이다 보니 이번 거래가 중요했지. 그래서 신현섭 그 노인도 자네에게 무리하게 부탁했을 걸세. 첫 거래부터 틀어지면 신뢰가 틀어지는 거니 말이야.”
“……아무쪼록 잘 전달하겠습니다.”
“고맙네.”
강성곤은 산처럼 쌓인 코인들을 보고 놀란 것이라 생각했는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물론 그것도 있었지만, 코인을 본 순간 떠올린 것은 심현섭과의 거래였다.
거래액의 30%를 주겠다고 했던 그였지만, 그것은 부당하다며 내건 조건은 50%를 달라는 것이었다.
이 정도 되는 금액일 줄 모르고 무심코 불러본 것이었지만, 그는 수락했다.
즉, 이 많은 10만 코인 중 50%인 5만 코인은 내 것이라는 소리였다.
트롤이라는 위험 부담이 있었지만, 물품들을 운반하는 것만으로 이 정도 코인을 준다는 것은 심현섭 역시 이번 거래에 부담이 크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제야 모든 상황이 퍼즐처럼 맞춰지며 이해할 수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코인들을 한 번에 집어넣으며 거래를 성사시켰다.
“그럼 거래는 이 정도면 잘 마무리된 것 같구만.”
“네.”
“그나저나 자네들을 우리가 정식으로 초청한 것은 알고 있는가?”
“네, 안 그래도 감사 인사를 전하러 찾아오려고 했습니다. 그 때문에 온 것이기도 하구요.”
“그렇군. 우리 또한 마찬가지라네. 자네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서 부른 거라네. 상황이 있다 보니 직접 찾아가지 못한 건 이해하게.”
“예. 그럼요.”
다음으로 입을 연 건 김낙현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이들은 우리를 이곳에 정식으로 초청했고, 그것을 전해 들은 기억이 있었다.
우리를 몇 번이나 구해준 인연이 있었기에 찾아온 것이었고,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데드와의 전쟁에서 그들을 구해준 것, 정확히는 리치의 저주에 의해 언데드 몬스터로 변해 버린 주현을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를 전하는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주현 님이…… 고맙네.”
주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전했고, 옆에 있던 김낙현과 강성곤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는 듯 눈이 벌게졌다.
“흡흡. 그보다 물어볼 것이 있네. 혹시 자네도 이 문양을 본 적이 있는가?”
“문양이요?”
눈물을 삼키듯 헛기침을 한 강성곤의 물음에 의아한 듯 묻자, 주현이 자신의 목덜미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머리칼을 넘기자 훤히 드러난 목덜미의 문양.
“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