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다니는 무기고 132화
“크라라랴럇.”
피노가 등장한 순간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단숨에 트롤들의 중심으로 들어간 피노의 모습에는 자비란 찾을 수 없었다.
작고 귀엽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흉포함만이 가득한 피노는, 사정없이 트롤들을 씹고 뜯으며 잔혹함을 드러냈다.
쾅! 쾅!
“끄로아아아아!!!”
우리를 향해 몰려들던 트롤들은 자연스레 피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땅에 몽둥이를 연신 내리치며 분함을 감추지 못하는 트롤들이 곳곳에 보였고, 마치 레이드라도 하듯 거대한 피노를 향해 달려들었다.
와그작. 와그작.
트롤들의 풍선처럼 부푼 근육은 온 힘을 다해 공격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피노에겐 소용이 없었다.
그저 간지러운 듯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눈앞의 트롤들만을 물어뜯으며 지나갔다.
더욱이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날렵한 움직임은 트롤들이 따라오기 힘들었고, 상황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허억, 허억. 어떻게 된 겁니까?”
“응, 보시다시피.”
전세가 뒤집히자 그제야 한숨 돌리게 된 신우는 곧장 이곳을 향해 다가왔고, 숨을 헐떡이며 상황을 물었다.
피노를 가리키며 대답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고, 이내 다른 이들 모두 이곳을 향해 왔다.
“피노 혼자 괜찮을까요?”
“어, 어떻게 된 거냐 개굴. 저 거대한 몬스터는 뭐냐 개굴.”
홀로 트롤들과 대적하고 있는 피노가 걱정되는 듯한 현지와는 반대로 개구리 인간 종수는 거대해진 피노를 보며 겁을 먹은 듯했다.
“지금 상태의 피노라면 걱정 없습니다. 일단 휴식을 좀 취하도록 하죠. 혹시 모르니, 조금이라도 마나를 회복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이렇게 잠시나마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트롤들이 전부 피노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강자와 전투를 치르고 싶어 하는 트롤들의 성격 때문으로 보이는 현상이었다.
거대하고 강력한 피노의 등장과 동시에 우리에서 시선을 거둔 트롤들은 전부 방향을 틀었고 그로 인한 결과였다.
트롤들의 숫자가 너무나도 많아 보였지만, 전투를 치르는 피노를 보고 있자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바닥이 난 마나를 조금이라도 회복하는 것이 우선시되었기에, 곧장 그곳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이 병장님, 혹시 계획이 있으신 겁니까?”
트롤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돌린 틈을 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와중, 먼저 질문해 온 것은 신우였다.
앉아 있는 상태였지만 불안한 듯 계속해서 적들의 위치를 확인하던 그는 앞으로의 계획이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우선은 인스턴스 던전을 빠져나가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말자.”
잠시간 고민해 보았지만, 역시 당장 목표는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자세한 설명이 없는 이상 이곳의 몬스터들을 전부 잡아야 인스턴스 던전을 탈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뜻밖의 상황에 갑작스레 트롤들이 모여 위기에 처하기는 하였으나, 지금의 상황 역시 썩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지금껏 우리는 트롤들을 찾아다니다 차츰차츰 그들을 쓰러뜨리며 이동해 오고 있었고, 결국에 최종적인 목표는 그들을 전부 제거하는 것이었다.
남아 있는 트롤들이 생각보다 더 많았고 한 번에 쏟아졌지만, 어찌 됐든 피노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한 번에 소탕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시간을 더 줄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지금의 상황을 극복했을 때의 가정이야.’
신경을 쓰지 않는 척하고 있었지만, 신우와 마찬가지로 온 정신은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는 피노와 트롤들을 향하고 있었다.
당장은 마음껏 날뛰고 있는 피노였지만, 상황이 언제 다시 급변할지 알 수 없었기에 불안함은 가시질 않았다.
언제 어디서 어떤 변수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저 녀석들을 전부 해치우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우선 몸을 회복하는 데 집중해.”
“네, 알겠습니다.”
또한, 모든 전투를 피노에만 맡겨둘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은 마나의 부족으로 어떤 도움도 주기 어려웠지만, 충분하진 않아도 조금이나마 마나가 회복되는 것이 느껴진다면 피노를 도우리라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당장은 완벽한 우위를 잡은 듯한 피노였지만, 아무리 녀석이라고 한들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한 회복력과 숫자를 가진 트롤들이 유리해질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합류해야 했다.
* * *
“끄르르르, 캭.”
날뛰는 피노를 제압하기 위해 트롤들은 더욱 거세게 공격을 이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의 힘만으론 역부족하다는 것을 느낀 트롤들은 힘을 모았고, 피노를 둘러싸며 한 번에 공격을 시도했다.
“꺄야야야약!!”
하지만 이에 질세라 피노는 더욱 거세게 포효하며 무리를 헤집어 놓곤 사정없이 눈에 보이는 트롤들의 머리를 잘근잘근 씹어버렸다.
그 모습은 우리가 보더라도 공포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했고, 그것은 몬스터인 트롤들에게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패기 넘치게 공격을 시도하던 녀석들은 차츰차츰 그 발걸음에 주저함이 엿보였다.
“이 병장님, 이 정도면 얼추 회복된 것 같습니다.”
“네, 저도 마찬가지예요.”
“나도 문제없다, 개굴.”
얼마나 휴식을 취했을까, 마나의 소모로 인한 정신적인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몸속 어딘가에 흐르는 마나의 회복이 느껴졌다.
신우와 현지, 개구리 인간 종수까지 모두 이 정도 상태라면 전투를 치를 수 있다고 판단하며 준비를 완료했다.
지체하지 않고 눈앞의 피노와 함께 전투를 치르고 있는 트롤들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어. 마무리 짓자!”
“예, 알겠습니다.”
“어서 피노를 도우러 가요!”
“최선을 다하겠다 개굴.”
그동안 혼자서 외로이 전투를 치렀을 피노의 강함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녀석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끝도 없이 등장하던 트롤들의 숫자는 현저하게 줄어 있었고, 더는 숨어 있는 녀석들조차 없는 듯했다.
새로운 트롤들이 나오지 않을 뿐 남아 있는 그들의 수는 매우 많았지만, 여기 있는 녀석들만 해치우면 된다는 의미였고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곧바로 양손에 든 총기를 장전했고, 공중에도 역시 무기들을 띄우며 준비했다.
화르르륵.
쉬이이익!
이에 질세라 현지의 너클에서 화염이 뿜어지고, 개구리 인간 종수의 검에 수증기가 모이며 칼날을 이루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부러진 흑도를 매만졌고, 이내 단검을 꺼내 들며 전투를 준비했다.
“남아 있는 저 녀석들을 전부 소탕하면 됩니다!”
“그럼 이 숲을 빠져나갈 수 있는 거냐, 개굴?”
“특별한 무언가가 있지 않다면 그럴 겁니다.”
“알겠다, 개굴. 준비됐다, 개굴.”
“저도 준비됐습니다.”
“저도요!”
홀로 싸우고 있는 피노를 돕기 위해, 그리고 인스턴스 던전에서 탈출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치며 달려가려던 그때.
쩌저저저저적.
“뭐, 뭐야. 이 지진은!”
“어어어어…….”
난데없이 시작된 울림과 함께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큰 폭으로 땅이 흔들렸다.
트롤들을 향해 뛰쳐나가려던 우리는 균형을 잡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넘어졌다.
그 지진은 곧바로 멈췄지만 정신을 차리며 앞을 바라본 모두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저…… 저 녀석은 트롤킹이라는 녀석이에요.”
어느새 몬스터의 정보를 살펴본 현지는 나지막이 설명하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쿠궁. 쿠궁. 쿠궁. 쿠궁.
사정없이 울리는 땅의 진동은 녀석이 보통 트롤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인지시켰다.
지진으로 인해 열린 것으로 보이는 땅은 엄청난 너비로 갈라져 있었고, 트롤킹은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보스 몬스터.”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녀석은 여지없는 보스 몬스터가 분명했다.
안 그래도 거대한 트롤들이었지만 그보다도 곱절은 더 거대한 몸집을 가진 녀석이었고, 갈라진 구덩이 속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녀석의 모습은 흉포했다.
두 발로 우뚝 서자 하늘조차 완전히 가려버릴 정도였으며, 얼굴과 몸에 새겨진 수도 없이 많은 상처는 험상궂은 그 얼굴을 더욱 험악해 보이게 만들었다.
“…….”
제자리에 멈춰 선 트롤킹은 주변을 아주 서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네? 어떤 게요?”
“왠지 트롤들이 떨고 있는 것 같은…….”
지금껏 보았던 트롤들과는 달리 위협을 하듯 포효하지 않는 트롤킹은 원래의 인상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화가 난 것인지 있는 힘껏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그에 반해 트롤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자신들의 보스 몬스터가 등장했음에도 어째서인지 트롤들은 겁에 질린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스으으윽.
그때 바람을 가르는 거대한 공기의 움직임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올려다본 트롤킹의 팔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거대한 몸집의 트롤킹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왠지 모르게 어수선해진 트롤들. 그들이 왜 그러는지 의아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들 피해!!”
방망이를 움켜쥔 트롤킹의 손은 순식간에 엄청난 속도로 바람을 가르며 내려왔고, 아직 쓰러져 있는 모두를 향해 외친 것이었다.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든 모두는 재빨리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피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콰쾅---!!!
피노를 노린 것이 아닌 듯한 트롤킹의 무지막지한 공격은 땅을 내리찍었고, 재빠른 피노는 그 자리를 벗어나 우리의 곁으로 온 이후였다.
“크라라라랴랴랴랴!!!!”
쾅!!! 쾅!!! 쾅!!! 쾅!!!
그 공격을 시작으로 트롤킹의 공격은 연속적으로 이어졌고, 그 대상은 우리가 아니었다.
이미 피노와 우리는 녀석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방망이는 쉬질 않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크로로로로!”
방망이에 희생되는 대상은 숲의 나무나 바위 따위가 전부는 아니었다.
자신의 동료인 트롤들이 그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트롤킹은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나간 것이었다.
거대한 몸집에 맞게 그 힘 또한 얼마나 강한지 방망이를 휘두를 때마다 트롤 네댓 마리가 순식간에 짜부라지며 목숨을 잃었지만, 트롤킹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로지 파괴밖에 모르는 듯한 트롤킹의 원초적인 모습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고, 그리 느낀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캬아아아악!!!”
“피노! 너 어떻게 하려고!”
자신의 주위에서 겁을 먹고 도망치는 트롤들을 향해 연신 공격하는 트롤킹. 그를 보고 울부짖은 피노는 순식간에 뛰쳐나갔다.
아무리 피노라고 한들 무지막지한 녀석의 모습에 걱정이 들었지만, 말릴 틈이 없었다.
“이, 이 병장님!”
“민혁 씨…….”
“어떻게 할 거냐, 개굴?”
“……어쩔 수 없네요. 저희도 가죠.”
결정을 바라듯 주위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쏟아졌고, 특별히 다른 방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기 있는 거대한 괴물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기에 곧바로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