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129화
“군대? 군대 영화 찍는 거야?”
김복녀는 하준이 군대를 간다고 하자, 진짜 군대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웃으며 물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진짜 군대요. 빨리 갔다 오려고요.”
“뭐?”
김복녀는 순간 얼굴의 미소가 사라졌다.
김복녀는 황당한 표정으로 윤기철과 최선희를 번갈아 보더니 곧 하준에게 다시 물었다.
“아, 아니, 그럼 대학은? 한국대 붙었는데, 안 들어가고 군, 군대를 간다는 말이야?”
김복녀는 군대에 가면 한국대에 입학을 포기하는 건 줄 알았던 것이다.
“군대 갔다 와서 입학하려고요. 합격은 유지돼요.”
“휴, 그건 다행이네······. 근데 왜 이렇게 빨리 가려고?”
김복녀는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하준의 손을 잡았다.
“빨리 갔다 오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하준이 대답하자, 윤기철이 얼른 나서서 자세히 설명했다.
“엄마, 배우는 언제 빵 터질지 모르는데, 혹시라도 인기 터졌을 때 군대 가야 하면 그거 진짜 곤란해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되는데, 잠수하는 격이니까. 그것도 1년 반이나 잠수해 있어야 되는데, 그럼 대중들이 잊을 수도 있고요.”
“하준이는 이미 빵 터져 있잖아? 월드 스타니까.”
“그건 그런데, 이제 하준이가 성인이 되잖아요? 아역 배우들은 성인 연기로 넘어갈 때 잘 넘어가야 돼요. 아역 이미지를 벗어야 되는데, 군대 갔다 오면 자연스럽게 남자 이미지도 얻고, 아역 이미지도 좀 잊혀지니까, 바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에요.”
“아하······.”
김복녀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쓰러운 눈빛으로 하준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곧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하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휴, 아직도 내 눈엔 애기 같은데, 어떻게 보내나······ 아이고, 우리 강아지······.”
“할머니, 걱정마세요, 건강하게 잘 다녀올게요. 저 이제 팔에 알통도 있어요.”
하준은 팔뚝에 힘을 주더니 이두박근을 김복녀에게 보여주었다.
김복녀는 자신을 안심시키려 애를 쓰는 하준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그래, 우리 하준이는 어디서든 사랑받을 거야. 팔에 알통도 있으니 훈련도 잘 받을 거고.”
“네, 그럼요!”
“휴, 근데 문제는 이 할머니야. 1년 반 동안이나 하준이를 못 보고 어떻게 살지?”
김복녀가 우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1년 반 아니에요. 중간에 휴가 나오잖아요. 그때마다 할머니 만나러 올게요. 아, 할머니가 면회 오실 수도 있고요.”
“아, 그렇구나!”
그제야 김복녀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에휴, 근데 3월이면 금방인데······ 하준아, 그럼 온 김에 오늘 자고 갈래? 군대 가기 전에 실컷 얼굴 봐두게.”
“네, 할머니. 그럴게요.”
하준은 김복녀의 아쉬운 마음을 헤아려 얼른 그러겠노라고 답했고, 김복녀는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그리하여 하준 가족은 오랜만에 김복녀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내내 함께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
며칠 후.
하준은 자신의 전용 밴을 타고 가다가 김유택에게 말했다.
“형, 저기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보일 거예요.”
“오케이.”
김유택은 하준의 지시대로 우회전을 했고, 우회전 후 약 50미터를 달려가다가 대로변에 멈춰 섰다.
하준은 얼른 문을 열고 소리쳤다.
“희수야, 여기!!”
서희수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다가 하준의 목소리를 듣고 얼른 밴으로 달려와 차에 올라탔다.
“안녕, 하준아. 안녕하세요, 유택 오빠.”
“응, 그래. 희수 대학가더니 더 예뻐졌네?”
“헤헤, 감사합니다.”
서희수는 하준보다 1살이 많기 때문에 이미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하준은 서희수에게 벨트를 빠르게 채워주며 말했다.
“정환이 기다리고 있겠다. 형, 출발이요!”
“오케이.”
김유택은 이번에는 삼총사 중 하나인 공정환을 픽업하기 위해 차를 몰았다.
삼총사는 하준이 군대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만날 친구들이었다.
잠시 후, 공정환까지 차에 태운 하준은 미리 예약해둔 고급 식당으로 향했다.
세 사람은 프라이빗한 룸에서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공정환과 서희수는 먼저 하준의 한국대 입학을 축하해주었고, 이어 군대 이야기를 꺼냈다.
“야, 나 기사 보고 완전 놀랐어. 이렇게 갑자기 군대에 간다니······.”
“원래 입대도 몰래 하려고 했는데, 입대 날이 개학보다 꽤 늦어지는 바람에 들켜버렸네, 하하.”
하준은 입대 날까지 대중들에게 비밀로 하고 싶었으나, 한국대에 군입대휴학계를 낸 사실이 금방 퍼져서 결국 기사가 나고 말았다.
“근데 도대체 왜 이렇게 일찍 군대 가? 난 2년 있다가 갈 건데. 대부분 그때쯤 가잖아.”
“맞아, 거기다 한국대 붙었는데, 나 같으면 한국대 어떤지 궁금해서 바로는 못 간다.”
공정환과 서희수가 하준이 군대를 일찍 가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했다.
“뭐, 배우 생활 하기에 빨리 갔다 오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최 대표님도 군대 갔다 오면 남자라는 이미지가 강해져서 성인 연기로 변화될 때 훨씬 나을 거라고 하셨어.”
“아하. 그럴 수 있어.”
“그렇겠다. 군대 미루려는 연예인들도 많은데 바로 자진입대한다고 하면 이미지에도 좋지. 뭔가 멋있잖아.”
공정환과 서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서희수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근데 성인 연기라니, 뭔가 좀 오글거린다. 하도 어릴 때부터 봐서 그런지 네가 키스신 같은 거 찍는다고 하면······ 으으, 이상해.”
“맞아, 그건 그렇겠다. 하준아, 너 키스 안 해봤지?”
공정환이 하준에게 대뜸 물었다.
“그, 그렇지? 넌 해봤냐?”
“당연히 나도 아직 안 해봤지. 희수 넌?”
“나도 아직? 하지만 노력 중이야.”
서희수가 씨익 웃었다.
그러자 공정환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노력해?”
“키스하려면 먼저 누굴 사귀어야 할 거 아냐? 나 봄에 미팅 쫙 잡혀있거든. 이 누나는 벌써 대학생이잖니.”
서희수가 턱을 치켜들며 뽐내듯 말했다.
“하아, 야, 우리도 이제 대학생이거든?”
“그럼 너도 많이 하겠네.”
“아니, 난 미팅 안 할 거야.”
“왜? 너 자만추냐?”
“어, 뭐, 그런 셈이지.”
공정환과 서희수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하준은 두 사람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공정환은 서희수를 좋아했는데, 고백은 못 하고 주변만 맴돌고 있었고, 서희수는 둔해서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희수야, 정환이 좀 잘 챙겨줘. 너네 과 후배잖아.”
하준이 은근히 공정환을 도와주려 했다.
공정환은 서희수를 짝사랑해서 그녀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진학했다.
“우리 과 후배니까 막 부려 먹어야지. 흐흐.”
아무것도 모르는 둔탱이 서희수는 공정환에게 헤드락을 걸며 웃었다.
서희수는 심리학과였는데, 하준은 심리학과에 가서도 어쩜 아직도 저렇게 눈치를 못 채는 걸까 의아했다.
하지만 공정환은 마냥 좋은지 그저 실실 웃고만 있었다.
“아참, 너 유나랑은 연락해?”
공정환이 헤드락을 당해서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하준에게 물었다.
“응, 가끔 연락 와.”
“와, 걔도 진짜 일편단심이다. 미국 유학 갔는데도 연락하다니, 대단해.”
세계그룹 부회장의 막내딸 김유나는 3년 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사실 김유나 역시 하준이 군대를 가는 것과 비슷한 의도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하준이 김유나를 여동생처럼 대하니 김유나는 멋진 여자가 되어 나중에 다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준이 성인 배우로 변신하기 위해 잠시 군대로 떠나는 것처럼, 김유나는 하준에게 여자로 인식되고 싶어서 유학을 떠난 것이다.
“맞아, 난 하준이 어릴 때 잠깐 좋아하다가 포기했는데. 라이벌이 너무 많아서 말이야. 난 나만의 남자가 좋지, 만인의 연인은 감당 못 할 것 같더라.”
서희수가 쿨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건 이미 하준과 공정환이 알고 있는 사실.
서희수는 워낙 솔직한 성격이라 하준에게 좋아했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물론 과거형으로.
“하긴, 하준이는 전 세계에 팬들이 있으니······. 그러니까 김유나가 여러모로 참 대단하다는 거지.”
“역시 재벌 딸은 자신감이 남다른가? 뭐, 아무튼. 근데 공정환, 넌 진짜 앞으로 연기 안 할 거야?”
서희수가 김유나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더니 화제를 돌렸다.
“어. 나 원래 배우가 꿈은 아니었으니까.”
“원래 꿈은 뭐였는데?”
“돈 많은 백수? 하하.”
“와, 너 그럼 이제 백수로 지내겠다는 말이네? 돈은 많잖아.”
<신비종>의 삼총사는 <신비종> 덕분에 엄청난 돈을 벌었고, 사기를 당하거나 사치만 부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죽을 때까지 돈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지금은 대학생으로 지내야지. 대학생은 백수로 치진 않잖아? 돈 벌 걱정 없으니 그때 그때 하고 싶은 거 하고 살 거야. 아, 근데 희수 너도 그렇게 살 수 있잖아? 너나 나나 돈 번 건 거의 비슷할 텐데.”
“그렇지. 나도 돈 많은 백수로 살 수 있지. 근데 그럼 너무 심심할 거 같아서 난 고민 중이야. 앞으로 뭘 할지.”
“너도 연기는 안 할 거야?”
“<신비종> 시리즈면 할 거야. 그 외에는 별로? 넌 <신비종>도 안 할 거야?”
“나도 <신비종>이면 하지.”
하준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네는 은근히 다른 듯 비슷하단 말야. 둘 다 배우가 꿈은 아닌데, <신비종> 좋아서 오디션 본 것도 그렇고, 또 촬영하다 보면 계속 배우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한데, 둘 다 다른 일 찾고 있고 말야.”
“그런가? 에이, 근데 성격은 완전 정반대잖아. 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이고, 정환이는 항상 예상한 그 자리에 있는 공이고.”
“근데 너도 이리저리 튀다가 보면 가끔은 예상한 그 자리에 있는 정환이 공에 도달할 때도 있어.”
하준의 말에 서희수는 순간적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까, 공정환은 왜 맨날 내가 예상한 거기 있지? 내가 공정환을 잘 알아서? 나 누굴 잘 알고 그런 편이 아닌데?’
돌이켜보니 공정환은 항상 서희수가 예상한 그 위치에 있어서 공정환을 찾기 쉬웠고, 이해하기 쉬웠다.
이건 외부적인 위치를 말하는 게 아니라 생각과 감정의 위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그렇네.”
서희수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고, 공정환과 서희수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하준에게 꼭 면회 가겠다고 약속했다.
며칠 후, 하준은 팬카페에 군대 가기 전 마지막 글을 남겼다.
[안녕하세요, 하준입니다.
모두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내일 드디어 입대합니다.
진짜 남자가 되어 돌아올 테니, 기다려 주세요.
그럼 전역 후 더 멋진 하준으로 찾아뵐 그 날까지 부디 팬 여러분들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팬들은 하준의 글에 수천 개의 댓글을 달았다.
[슬퍼요 ㅠㅠㅠㅠ 그래도 기다립니다]
[1년 6개월 동안 숨 참고 기다리겠습니다!]
[오빠도 건강히 다녀오세요 ㅠㅠ]
[팬카페는 저희가 지키고 있을 테니, 부디 몸 건강히 다녀오세요~]
[하······ 벌써 그날이 왔군요 ㅠㅠ 슬프지만, 제대 후 더 멋진 모습으로 돌아올 그날을 기다릴게요..]
[잘가······지마ㅜㅜ 행복해······ 떠나지마ㅠㅠ]
다음 날, 하준은 최선희가 차려준 마지막 아침을 먹고 논산 훈련소로 출발했다.
훈련소 앞에는 역시나 수많은 취재진들이 몰려와 있었는데, 심지어 외신 기자들까지 있었다.
하준이 도착하자, 기자들은 수많은 플래시를 터뜨리며 하준을 둘러쌌다.
“하준 씨, 입대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갑자기 입대하는 이유가 뭡니까?”
“국민아들로서 국민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하준은 이미 예상했던 터라 담담하게 기자들 앞에 서서 짧게 입대 소감을 밝혔다.
“어차피 가야 하는 거, 빨리 갔다 오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빨리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대한민국의 성인 남자라면 누구나 군대를 가야 하는 거니까 성실히 군복무 마치고 돌아오겠습니다. 진짜 남자가 되어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여러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아, 저도 잊지 마시고요. 감사합니다!”
하준은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며 훈련소로 들어갔고, 최선희와 윤기철, 최 대표는 그 모습을 글썽이는 눈으로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