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121화
하준의 매니저인 김유택은 모델들이 드레스 리허설을 할 때부터 백스테이지에서 나와 런웨이에서 워킹하는 모델들을 구경했다.
진짜 패션쇼가 시작된 지금도 그는 관객석에 앉아서 하준의 생애 첫 패션쇼를 무사히 잘 해내기만을 기도하고 있었다.
그건 김유택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최선희도 마찬가지였다.
최선희는 하준의 첫 패션쇼 무대를 보고 싶어 했는데, 한강윤이 배려해줘서 이렇게 난생 처음 패션쇼 관객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쿵쿵쿵쿵.
강렬한 비트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이에 맞춰 첫 번째 모델인 조원우가 런웨이로 출발했다.
김유택은 하준을 까댄 조원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못마땅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확 넘어졌으면 좋겠네.’
하지만 그렇게 바랄 수는 없었다.
하준을 예뻐해서 모델 제안을 해준 한강윤의 패션쇼가 망하는 걸 바랄 순 없었으니까.
조원우는 역시 베테랑 모델답게 스타트를 잘 끊었다.
다음으로 여자 모델들과 남자 모델들이 차례로 나오다가 드디어 하준의 차례가 되었다.
‘후우.’
하준은 여러 번의 리허설 덕분에 런웨이에는 꽤 익숙해진 상황이었지만, 실제 패션쇼에서는 리허설 때와는 달리 런웨이 주변으로 관객들이 많을 테니 확실히 리허설 때보다는 긴장이 됐다.
이럴 때는 어릴 때 최선희가 알려준 방법을 사용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관객들을 모두 꽃이라고 생각하는 것.
하준은 이번에도 관객들을 꽃이라고 생각하고 런웨이로 출발했다.
하준이 무대로 나오자, 최선희와 김유택은 두 손을 꼭 쥐고 눈을 부릅뜬 채 하준을 주시했다.
혹시 실수라도 할까 봐 두 사람은 하준보다도 더 긴장한 상태였다.
하지만 하준은 전혀 긴장한 티가 나지 않았다.
하준의 첫 패션쇼 무대를 취재하기 위해 나온 기자들이 커다란 카메라를 세워놓고 정면에 잔뜩 포진해 있었지만, 하준은 그런 그들조차도 커다란 해바라기라고 생각했다.
하준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런웨이를 걸으며 일명 ‘학워킹’을 선보였다.
관객들은 하준의 수준급 워킹 실력과 진짜 모델처럼 멋진 에티튜드에 감탄하며, 주변 사람들과 작게 수군거렸다.
“잘한다, 그치?”
“응, 옷빨도 잘 받아.”
“역시 하준이네.”
최선희와 김유택도 하준이 무사히 워킹을 마치고 다시 백스테이지로 사라지자, 안도의 한숨과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기쁨의 표정을 지었다.
“잘한 거지?”
“네, 너무 잘했어요. 흐흐.”
성공적으로 첫 번째 워킹을 마친 하준은 백스테이지로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헬퍼들에게 달려갔다.
헬퍼들은 하준의 다음 옷을 들고 대기 중이었고, 곧 새로운 옷을 빠르게 입히기 시작했다.
한강윤도 하준의 옷매무새를 직접 만져주었다.
하준이 옷을 갈아입고 있는 와중에 하준의 바로 다음에 다시 나갔던 조원우가 백스테이지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디 아프세요?”
“괜찮으세요?”
헬퍼들과 스태프들이 식은땀을 흘리는 조원우에게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조원우는 괜찮다면서 옷이나 빨리 입혀달라고 했다.
그때, 한강윤이 조원우의 말을 듣고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왜 그래? 컨디션 안 좋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식은땀 나는 거 같은데······.”
“괜찮습니다!”
한강윤은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패션쇼는 30분 정도 진행되고, 그 안에 모델들이 몇십 벌의 옷을 선보여야 했다.
각 모델에게 맞춰서 옷을 준비해놓은 상황이라 한 명이 문제가 생기면 그 사람이 입는 옷은 선보일 수가 없었다.
“조금만 참아. 10분이면 끝나니까. 알지?”
“네, 그럼요.”
조원우는 뭔가 초조한지 계속해서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헬퍼들은 걱정스럽게 그의 땀을 닦아주고, 메이크업 담당 스태프는 그의 화장을 고쳐주었다.
하준은 조원우가 아픈가 싶어 잠깐 걱정이 되었지만, 얼른 옷을 갈아입고 무대에 나가야 했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모델들은 무대에 나갈 순서대로 줄을 서 있었고, 옷을 다 입은 하준은 아까 자신의 앞선 모델 뒤에 줄을 섰다.
조원우도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하준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는 조원우를 보고 하준이 말을 걸까 했으나, 조원우는 하준의 시선을 피했다.
‘으음, 괜찮으신가······?’
곧 하준의 차례가 되어 하준은 무대로 나갔다.
하준은 이번에도 완벽한 학워킹을 선보였고, 탑포즈도 멋지게 취한 뒤 다시 돌아 백스테이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백스테이지로 돌아오는데, 하준의 바로 다음 차례로 조원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조원우의 워킹이 이상했다.
‘어······? 워킹이 왜 저러시지?’
워킹이 아까와 달리 보폭이 좁고 다급해 보였던 것이다.
거기다 표정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관객들 역시 이것을 눈치채고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조원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준은 일단 자신의 워킹을 마치고 백스테이지로 들어왔다.
하준의 헬퍼들은 마지막 의상을 입히기 시작했는데, 그러는 사이 조원우가 자신의 마지막 무대를 마치고 들어왔다.
그는 스태프에게 다급하게 이렇게 외치고 후다닥 사라졌다.
“저, 화장실 좀요!!”
조원우는 아까 화가 난다고 물을 계속 마셔대서 그런지 쇼 중간에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었다.
하지만 한번 쇼가 시작되면 중간에 모델들이 화장실을 갈 시간은 없었다.
그래서 그걸 참느라 워킹도 표정도 엉망이 되었던 것이다.
“빠, 빨리 오셔야 돼요! 5분 안에 피날레예요!”
“알아요!”
달려 나가는 조원우의 등 뒤에 대고 스태프가 당부했다.
한강윤은 하준의 피팅을 봐주다가 조원우가 뛰쳐나가는 것을 보고 살짝 인상을 구겼다.
“아니, 화장실을 미리미리 다녀왔어야지. 프로답지 않게······ 저러다 피날레 늦게 오는 거 아냐? 후우.”
그나마 한강윤이 지금 백스테이지에서 모델들의 옷 피팅을 봐주느라 무대를 보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그것도 봤으면 아마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약 5분 후, 하준은 마지막 의상을 입고 여성 모델과 함께 마지막 워킹을 했다.
그 사이 백스테이지 스태프들은 조원우가 오지 않아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하아, 조원우 씨 왜 안 오시지? 이제 바로 나가야 하는데.”
한강윤도 짜증이 나는 표정으로 조원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결국 모델들이 나갈 시간이 되고 말았다.
“에이,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조원우 오면 바로 내보내.”
마음 같아서는 못 나오게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조원우가 입고 있는 의상은 보여줘야 했다.
마지막 의상을 선보인 하준과 여성 모델은 백스테이지로 들어오지 않고 그대로 무대에 서 있었고, 다른 모델들이 하나둘씩 무대로 나와 두 사람의 주변에 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델들이 입은 의상을 디자인한 디자이너 한강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고, 한강윤은 환한 미소로 감사인사를 전했다.
조원우는 한강윤이 인사를 한 뒤 겨우 무대에 나타났다.
헉헉대는 숨을 몰아쉬며.
한강윤의 인사가 끝난 뒤에는 모델들이 마지막 피날레 워킹으로 런웨이를 한번 쭉 돌고 패션쇼는 끝이 났다.
한강윤은 다시 백스테이지로 돌아와 모델들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오늘 다들 수고 많았어요. 마지막에 약간의 미스가 있었지만, 그래도 고생했습니다!”
한강윤은 ‘약간의 미스’라고 말할 때 조원우를 슬쩍 째려보았고, 조원우는 민망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하준이, 너무 잘했어! 전문 모델도 아닌데 어쩜 이렇게 잘할까! 나 패션쇼 할 때마다 메인 해달라고 하고 싶네. 하하.”
“감사합니다. 근데 이거 직접 해보니까 정말 긴장되네요. 자주는 못 할 것 같아요. 이걸 매일 하는 모델 분들이 정말 존경스러워요.”
하준은 모델들을 치켜세우며 겸손하게 답했다.
“에이, 너 하나도 긴장 안 해 보였는데?”
한 여자 모델이 엄살을 부린다는 듯 말했다.
“아니에요. 저도 긴장 좀 되더라고요. 근데 런웨이보다 옷 갈아입을 때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그게 더 긴장됐어요.”
“아하하. 그런 면이 있지. 그래, 하준이는 배우 해야 되니까 내가 가끔만 부탁할게.”
한강윤은 호탕하게 웃으며 하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조원우를 홱 돌아보며 말했다.
“하준이가 메인이었기에 망정이지, 네가 메인이었으면 어쩔 뻔했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조원우 역시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메인 모델이었으면 화장실 갈 시간이 없어서 무대에서 큰 실수를 했을지도 모른다.
“너희들도 쇼 전에 꼭 화장실들 갔다 와. 알겠지?”
“네.”
한강윤의 당부에 모델들이 큰 소리로 대답했고, 조원우는 쪽팔려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
한강윤의 패션쇼는 하준을 메인 모델로 세운 덕분에 더 큰 주목을 받았다.
게다가 하준이 훌륭한 워킹 실력과 옷빨이 좋아서 더 화제가 되었다.
기자들은 패션쇼 사진을 기사로 잔뜩 냈다.
하준은 패션쇼 직후 기자들과 인터뷰도 진행했기에 다양한 기사들이 쏟아졌다.
[서울패션위크 한강윤 패션쇼, 하준의 첫 패션 모델 도전으로 큰 화제]
[하준, 가을바람처럼 시원하고 여유 있는 워킹 선보여]
[하준, 고일학의 ‘학워킹’ 그대로 재연]
[팔방미인 하준, 전문 패션모델로도 손색없을 정도]
[한강윤 “하준의 무대 1000%만족, 다음에도 또 함께 하고 싶어”]
[한강윤 패션쇼에서 선보인 하준의 의상, 브랜드 ‘한’에 문의 쏟아져]
[패션쇼 무대의 하준, 런웨이 화보집이 따로 없네]
[하준 “패션쇼 도전 재밌었지만 어려웠다, 전문 모델들 존경”]
[첫 패션 모델 도전 하준 “재미있는 경험, 한강윤 디자이너님께 감사”]
[하준 “고일학 선생님께 워킹 배운 것 맞아, 비슷하게 보였다면 영광”]
[하준 “패션쇼 위해 배운 모델 워킹, 드라마에서도 도움 많이 돼”]
“와, 우리 아들 멋진 사진 엄청 많네!”
최선희와 윤기철은 기사들을 찾아보고 런웨이의 하준을 찍은 사진을 다운 받느라 바빴다.
“여보. 진짜 멋있지?”
“크으, 응, 남자가 봐도 우리 아들은 멋지지. 모델 포스가 있어.”
“하준아, 이거 좀 봐봐, 어쩜 이렇게 핏이 좋을까!”
최선희가 하준에게 노트북 화면을 들이대며 하준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하준은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아, 난 민망해. 안 봐도 돼.”
하준이 보기에 런웨이 사진은 뭔가 자기가 아닌 것처럼 이상한 느낌이 있었다.
“얘는! 뭐가 민망해? 멋있기만 하구만. 이거 다 프린트해서 벽에 걸어 놓을까?”
“아이, 됐어. 이미 온 사방에 내 사진이 가득한데? 뭘 더?”
하준의 집은 하준의 방을 제외하고는, 온통 하준의 사진으로 가득했다.
다 최선희와 윤기철의 아들 사랑 덕분이었다.
“그런가? 호호. 그럼 그냥 소장해야지.”
최선희는 웃으며 계속해서 하준의 모델 사진들을 저장해나갔다.
***
하준은 잠깐의 흥미로운 모델 경험을 한 뒤, 다시 드라마 촬영에 몰두했다.
<우리들의 학교>는 11월 말 방영 예정이었는데, 그 전에 미리 약 7화분의 촬영을 미리 마쳤다.
그리고 첫 방송을 앞두고 제작발표회를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