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120화
모델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며 리허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하준이 옅은 미소를 띠며 오늘 함께 할 모델들에게 인사했다.
“어머, 하준아, 안녕!”
“안녕, 하준아! 오늘따라 더 멋있네?”
여자 모델들과 메이크업 스태프들은 반갑게 하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하지만 남자 모델들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저 하준에게 힐끗 시선만 한번 줄 뿐 어느 하나 인사를 되돌려 주는 사람이 없었다.
하준은 다시 한번 남자 모델들에게 인사를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하지 않기로 했다.
또 무시당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준이 어디로 가야 하나 눈치를 보며 서성이고 있는데, 갑자기 조원우가 하준을 홱 돌아봤다.
“야, 너 선배한테 인사 안 하냐?”
하준은 조원우의 태클에 순간 당황했다.
‘방금 했는데 무시해 놓고 왜 이제 와서?’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여기서 굳이 모델계 대선배인 조원우와 부딪치고 싶지 않았다.
조원우는 26살로 10년 차 톱모델이었고, 아마도 하준이 없었으면 이번 패션쇼의 메인 모델이 됐을 인물이었던 것이다.
“아, 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조원우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하준을 빤히 쳐다보더니 인사를 받기만 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조원우는 하준이 매우 싫은 듯했다.
하준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모델 출신도 아니고 나이도 어린 자기가 불쑥 나타나 메인 모델을 맡게 됐으니, 조원우 입장에서는 자기가 싫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준은 조원우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얼른 남자 모델들에게서 좀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눈치를 보며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원우가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모델이라는 게 말이야, 외부에서 볼 때는 그냥 옷 입고 걸어 다니면 된다고 쉽게 생각하는데, 그거 진짜 뭣도 모르고 하는 소리 아니냐?”
“네, 맞습니다.”
“우리가 무대에 서기까지 얼마나 고생하는데. 몸매 관리, 워킹 연습, 포즈 연습.”
“맞아요. 사람들은 직접 이 무대에 안 서보면 모른다니까요.”
“내 말이. 이게 쉬운 줄 알아. 런웨이를 우리가 그냥 아무렇게나 걷냐고.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 시선 받아가면서 무대에 서는 게 보통 멘탈로 되는 게 아니란 말이지.”
“그렇죠. 선배님은 그 중에서도 특출나셔서 톱모델이 되신 거니까, 너무 존경스럽습니다!”
조원우의 말에 옆에 있던 남자 모델들이 얼른 맞장구를 쳤고, 아부까지 곁들였다.
“근데 무대 경험 한 번도 없는 웬 굴러온 돌이 제일 좋은 자리를 꿰찼네? 이 세상 참······ 그렇다. 그치? 후, 오늘 패션쇼가 걱정이다. 누구 때문에 다 망치는 거 아닌가 몰라.”
조원우는 대놓고 하준을 까댔다.
일순간 백스테이지는 조용해졌지만, 아무도 조원우를 나무라지 않았다.
조원우는 이 중에서도 가장 선배였고, 나이도 제일 많았으니까.
하준의 매니저인 김유택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하준이 말려서 꾹 참고 있었다.
하준은 디자이너의 뜻에 따라 패션쇼에 참여한 것이라서 자기가 욕을 먹기엔 다소 억울한 면이 있었으나, 굳이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국민아들이라는 칭호에, 지금까지 아무런 사건을 일으키지 않고 항상 좋은 모습만 보여왔는데, 이런 일로 말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한강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조원우! 이 새끼가! 너 그거 지금 내 패션쇼 망치라는 소리야?”
한강윤의 말에 조원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서, 선생님, 그게 아니라······ 쇼가 걱정이 돼서 한 소리였습니다.”
“패션쇼가 왜 걱정인데? 누구 때문에 망칠 것 같은데? 어디 한번 말해봐.”
한강윤이 화를 버럭버럭 내며 조원우에게 다가왔다.
한강윤이 대신 화를 내주자, 김유택의 부글부글 끓던 속은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게······ 솔직히, 모델도 아닌 데다가 처음 패션쇼에 서 보는 사람이 걱정됩니다.”
조원우는 이미 엎질러진 물, 속이라도 풀리게 솔직히 말해버렸다.
“하준이 말하는 거냐?”
“네, 다른 모델들도 다 걱정될걸요? 안 그래?”
조원우가 다른 모델들을 끌어들이려 했다.
“뭐? 야, 너네 다 그렇게 생각해? 하준이가 메인 모델 서는 게 불만이야? 쇼 망칠까봐?”
한강윤이 모델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모델들은 디자이너인 한강윤에게 밉보이면 쇼에 설 수 없을까 봐 조원우 편을 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자주 보게 되는 업계 선배인 조원우의 눈치도 봐야 해서 한강윤의 편을 들 수도 없었다.
모델들이 다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한강윤은 다른 모델들도 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야, 잘 들어. 패션쇼는 내가 디자인한 옷들을 선보이기 위한 자리야. 그러니까 내가 내 옷 입히고 싶은 모델한테 내 옷 입히는 거고. 너희들도 내가 내 옷 입히고 싶어서 뽑은 거야. 안 그래? 결정권자는 바로 나야. 이 쇼의 주인도 나고! 니들이 왈가왈부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고! 알아들어?”
“네······.”
“하준이가 메인 모델 서서 쇼를 망치든 말든, 너희가 관여할 바가 아니야. 내 쇼니까. 너희들은 그냥 자기 일만 잘하면 되는 거야. 쇼 걱정도 하지 말고, 질투도 하지 말고!”
“네······.”
모델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한강윤은 이번에는 조원우를 노려보며 한 마디 더했다.
“야, 조원우. 너 그렇게 불만이면 이 쇼 서지 마.”
“아, 그, 그건 아닙니다. 단지 걱정이 돼서······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조원우는 한강윤이 패션쇼에 서지 말라고 하자,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유명한 디자이너인 한강윤의 쇼에 선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영광이었고, 또 이런 일로 쇼에 서지 못했다고 소문이 나면 다른 디자이너들한테도 찍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한번만 봐준다. 내가 뽑은 모델에 불만 가지지 마. 알겠어?”
“네, 알겠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준이를 단지 그냥 팬이라는 이유로 메인 모델 시키는 줄 알아? 이따가 무대에서 봐. 직접 보면 알게 될 테니까. 이제 곧 리허설 할 거야. 다들 준비해.”
한강윤은 리허설 예고를 하고 백스테이지를 나갔다.
한강윤이 나가고 나자, 조원우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화를 참았다.
주변 모델들은 그의 눈치를 보느라 입을 다물었고, 하준 역시 눈치가 좀 보이는 상황.
그래도 금방 연출 스태프 하나가 나타나 리허설 준비를 시켜서 살얼음판 같던 백스테이지는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리허설 하겠습니다!”
모델들의 움직임과 무대 연출을 맞춰보기 위한 리허설이었다.
모델들은 피팅 때 정한 순서대로 줄을 서서 무대로 나갈 준비를 했다.
조원우는 맨 앞에 섰고, 하준은 맨 마지막에 섰다.
무대에서의 음악 소리가 들리고, 스태프는 시간 텀을 계산해서 모델들에게 나가라는 사인을 주었다.
모델들은 아직 옷을 착용한 것도 아니지만, 그것 빼고는 모두 진짜 패션쇼 무대인 것처럼 멋지게 워킹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약간의 빠른 비트의 흥겨운 음악에 맞춰 모델들은 성큼성큼 런웨이를 걸었다.
하준은 진짜 런웨이에는 처음 서보는 것이라 무대에 흘러나오는 음악의 비트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점차 모델들의 줄이 짧아지고, 하준의 차례가 거의 다 되었을 때, 김유택은 하준에게 두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조용히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스태프가 하준에게 나가라는 사인을 했고, 그 순간 하준은 새로운 것을 할 때마다 긴장을 풀기 위해 하던 자기 최면을 걸었다.
‘오늘 내 캐릭터는 톱모델이야.’
자기가 맡은 배역이 모델이라고 생각하는 것, 즉, 지금 하는 일이 연기라고 생각하면 하준은 이상하게 자신감이 생기며 긴장이 사라졌다.
하준은 이 자기 최면으로 자신감을 장착하고 런웨이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런웨이로 나가자 밝은 조명이 하준을 가득히 비추고 있었고, 연출진들이 런웨이 주변으로 서 있었다.
하준은 스스로 톱모델이라고 생각하며 성큼성큼 무대를 걸었다.
하준의 바로 앞선 모델 빼고는 모두 백스테이지로 돌아와 있는 상황이었는데, 아까 한강윤의 말도 있었고, 다들 하준의 워킹이 궁금했던 터라 모델들은 무대 입구에서 고개를 빼고 하준을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약이 바짝 올라 있는 조원우는 하준의 워킹에서 흠을 잡아 또 까댈 생각으로 하준을 살폈다.
그런데, 하준은 진짜 모델처럼 시원시원하고 노련한 워킹을 선보이고 있었다.
“오? 뭐야, 엄청 잘하는데?”
“하준이 언제 모델 했었나?”
“잘한다! 아, 저 워킹······ ‘학워킹’ 느낌 나지 않아? 시원시원하고 여유 있는 게 딱 ‘학워킹’인데······.”
학워킹.
고일학의 워킹을 이르는 말이었다.
하준에게 워킹을 지도해준 고일학은 현역 모델 시절 시원시원한 워킹으로 굉장히 주목을 받았고, 그의 워킹을 일컬어 ‘학워킹’이라는 말이 붙었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름의 마지막 글자가 ‘학’이기도 하고, 긴 다리로 여유 있고 시원시원한 걷는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학 같아서이기도 했다.
“오, 진짜 그렇네!”
“표정도 완전 자연스러워. 나 처음 런웨이에 섰을 때 표정이 불안해 죽겠다고 엄청 욕먹었었는데.”
“나도. 워킹은 잘하는데 표정 왜 그러냐고 지적받았어. 와, 대박.”
여자 모델들은 서로 수군대며 하준을 칭찬했다.
다들 하준의 실력을 인정하는 분위기.
남자 모델들도 하준의 수준급 워킹에 깜짝 놀랐지만, 조원우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원우는 하준이 워킹을 잘하는 것을 인정했지만, 잘하니까 더 짜증이 났다.
그래서 일부러 하준의 실력을 깎아내렸다.
“런웨이에 서려면 저 정도는 기본이지, 뭘.”
이 말을 들은 김유택은 자기를 말리던 하준도 런웨이에 나가 있겠다, 때는 이때다 싶어 얼른 조원우에게 대꾸해 주었다.
“우리 하준이가 기본은 된다는 말씀이시죠? 인정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하.”
조원우는 예기치 않게 칭찬이 되어 버린 상황에 짜증이 더 치밀어 올랐지만, 감사하다는 김유택에게 되돌려 줄 말이 없었다.
“으흠.”
조원우는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속이 답답한지 바로 옆에 놓인 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준이 런웨이에서 돌아오자, 여자 모델들은 하준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준아, 너 되게 잘한다!”
“워킹 정말 멋졌어.”
“고일학 선배님의 학워킹 연습한 거야?”
하준은 고일학에게 워킹을 배웠다고 대답했다.
“역시! 학워킹이었어!”
“근데 진짜 제대로 배웠다. 그 느낌 내는 게 엄청 어려워서 고일학 선배님 이후로 본 적 없는데.”
“맞아. 비슷하게 걷는 모델들이 있긴 했는데, 넌 진짜 고일학 선배님이 겹쳐 보일 정도였어.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호호.”
여자 모델들은 호들갑을 떨었고, 조원우는 그 모습을 노려보며 계속해서 열을 식히느라 물을 마셔댔다.
하준이 여자 모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한강윤이 백스테이지로 들어왔다.
그는 방금 리허설을 보면서 연출 총괄 PD와 의견을 나누고 들어오는 차였다.
“다들 수고했어. 하준아, 처음인데 진짜 잘했어. 하하. 연출진들도 다들 엄청 놀라더라. 너무 잘한다고.”
“감사합니다.”
하준이 활짝 웃었다.
“다들 봤지? 하준이 실력.”
“네!”
“어때? 쇼 망칠 실력이야?”
“아니요. 굉장했습니다. 정말 놀랐어요.”
조원우를 뺀 나머지 모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강윤은 조원우에게도 대놓고 물었다.
“조원우, 하준이 워킹하는 거 봤지? 내 말이 틀렸냐?”
“아, 아니······.”
콜록, 콜록.
조원우는 대답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갑자기 사레가 들려 미친 듯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으휴, 얘 물 좀 갖다 줘라. 아무튼, 다들 드레스 리허설도 이렇게만 해.”
한강윤은 고개를 저은 뒤 다른 모델들에게 당부했다.
그러고는 하준에게 다가와 다정하게 등을 두드렸다.
“드레스 리허설은 옷 갈아입느라 정신이 좀 없을 거야. 그래도 잘 할 수 있지?”
“네, 집에서 옷 빨리 갈아입는 연습 좀 했어요.”
“오, 그래? 하하. 준비성 철저하네. 헬퍼들, 잘 도와주고.”
한강윤은 하준의 헬퍼들에게도 당부했다.
헬퍼들은 모델들을 한 명씩 맡아 백스테이지에서 옷을 갈아입혀주는 도우미들이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준의 헬퍼들이 신이 나서 외쳤다.
드레스 리허설은 2-3번 정도 반복적으로 진행됐다.
모델들은 옷을 빨리 못 갈아입거나, 무대에서 신발이 벗겨진다거나 하는 실수가 가끔 있었지만, 리허설을 통해 문제점을 교정해나갔다.
드레스 리허설 후에는 마지막으로 메이크업까지 모두 마친 상태에서 최종 리허설을 했다.
하준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지만, 뮤지컬 때 이렇게 많은 리허설을 겪어봤기에 낯설거나 힘들지 않았다.
잠시 후, 마침내 다수의 셀럽들과 관객들이 패션쇼장을 가득 메웠고, 쇼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