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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길만 걷는 천재스타-119화 (119/150)

119화

119화

하준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온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연기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 데다가 인성도 발라서 다들 저런 아들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했기에, 어느 순간 하준에게는 ‘국민아들’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나 운 좋게 네 첫 뮤지컬 <루드윅 반 베토벤>도 봤어. 그때 지금 우리 와이프랑 데이트할 시절이었는데, 우리 와이프가 베토벤 음악을 좋아했거든. 그래서 얼른 아무거나 예매해서 데이트 신청했는데, 그게 네가 나오는 회차였지. 난 그때 너 처음 보고 완전 팬 됐어.”

한강윤이 추억에 잠긴 얼굴로 주저리주저리 옛날 일을 읊더니 곧 눈을 반짝이며 하준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네가 잘 자라길 얼마나 빌었다구. 네가 크면 내 패션쇼 무대에 꼭 세우고 싶었거든. 그게 내 소원이었어.”

“와······ 정말 감사합니다.”

하준은 자기가 어릴 때부터 쭉 지켜보다가 패션쇼 모델 제안을 했다니, 무척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잘 자라줘서 내가 더 고맙지! 하하.”

한강윤은 하준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아, 일단 여기 앉아 봐. 얘기 좀 하고 피팅해보자.”

한강윤이 다정한 말투로 하준에게 자리를 권했고, 자기도 맞은편에 앉았다.

“아이스 초코 좋아하지? 곧 우리 직원이 가져올 거야. 잠깐만 기다려봐.”

한강윤은 이미 하준의 취향을 꿰고 있어서 미리 하준이 오면 바로 아이스 초코를 사오라고 일러둔 상태였다.

한강윤과 대화를 몇 마디 나누다 보니 금방 한 직원이 아이스 초코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다 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응, 근데 아직 커피는 안 좋아해? 요즘은 고딩 정도 되면 커피 마시지 않나?”

“몇 번 마셔보긴 했는데요, 저한테는 아직 쓰더라고요. 전 달달한 이게 좋아요.”

“그래, 그 나이 때에는 그럴 수 있어. 난 인생의 쓴맛을 많이 봐서 그런가, 커피가 하나도 안 쓰네? 구수해. 하핫.”

한강윤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하준은 꽤 진지하게 그 말을 생각했다.

‘어른들은 거의 다 커피만 마시던데, 다들 인생이 써서 커피가 안 쓴 건가?’

하준은 어른들 중에 초코를 먹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나도 크면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되려나?’

하준은 살짝 어른이 되는 것이 두려워졌다.

한강윤과 하준은 각자의 음료가 동이 날 때까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대화의 대부분은 그동안 하준이 했던 작품들에 대한 한강윤의 찬양이었다.

“아, 내가 너무 반가워서 말을 너무 많이 했네. 아하핫. 이제 네가 입을 옷부터 보자. 내가 이번 패션쇼에 널 메인 모델로 세우려고 옷도 너한테 어울리게 맞춰서 디자인했거든.”

“와······ 감사합니다.”

이런 이야기까지는 들은 바가 없었기에 하준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여기 이 옷들이야. 어때?”

한강윤은 마네킹에 입혀진 옷들을 가리켰다.

마네킹들에는 금색 라인을 포인트로 주어 캐주얼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이 드는 정장, 독특한 소재의 롱코트, 비정형적인 무늬가 들어간 셔츠 등이 입혀져 있었다.

“어······ 전 패션을 아직은 잘 몰라서······.”

“하하, 안 이쁘다는 소리구나?”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독특한 것 같아서요. 제가 이런 옷을 소화할 수 있을지······.”

사실 하준의 눈에는 튀는 옷들이어서 막 예뻐 보이지는 않았다. 그나마 라인이 들어간 캐주얼한 정장은 잘 입으면 예쁠 것 같긴 했다.

“내가 봤을 때, 너라면 잘 소화할 거야. 이 중에 뭐부터 입어 볼래?”

“지금 바로 입어 봐요?”

“그럼! 입고 워킹 보자.”

“음, 그럼 전 이 정장이요.”

“오케이. 이게 너한테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았어. 그럼 이쪽에서 갈아입고 회의실로 가자. 거기 런웨이가 있거든.”

한강윤의 집무실 한 편에는 커튼으로 간이 탈의실이 마련되어 있었고, 하준은 거기서 차콜색 정장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한강윤은 옷을 갈아입고 나온 하준을 보자마자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와, 브라보!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핏이 너무 좋다, 옷걸이가 진짜 좋아.”

“정말 괜찮아요?”

“그럼! 여기 거울 봐봐.”

하준이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았다.

그런데 정말 아까 마네킹에 입혀져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와, 이거 직접 입으니까 멋있네요!”

“그치? 원래 진짜 사람이 입는 거랑 그냥 마네킹에 덜렁 입혀져 있는 거랑 느낌이 완전 달라. 진짜 이쁘다!”

“네, 어깨에 이 털 장식도 고급스러워요. 저 무슨 왕자님 된 것 같기도 하고요.”

“하하, 어떻게 알았지? 너 이번 패션쇼에서 왕자님 컨셉이야.”

“네? 진짜요?”

“응, 여기 금실 수 놓인 구두랑 세트니까 이거 신고 회의실로 얼른 가자.”

한강윤은 하준을 데리고 회의실로 향했고, 사무실의 직원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직원들은 가운데 런웨이를 남겨두고 그 주변으로 쭉 앉았다.

“자, 여러분, 우리 하준 군 어떻습니까?”

한강윤이 직원들에게 물었다.

“엄청 잘 어울려요!”

“왕자님 그 자체네요. 장난 아닙니다!”

“귀공자 같아요. 하준이한테 너무 잘 어울리는 옷이에요.”

직원들은 이구동성으로 환호했고, 하준은 이쪽저쪽으로 고개 숙여 감사인사를 전했다.

한강윤은 뿌듯한 표정으로 하준에게 워킹을 부탁했다.

“워킹 한 번 보자. 너무 긴장하지 말고 해.”

한강윤은 웬만하면 하준을 메인으로 세울 마음을 먹은 상태여서 워킹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네!”

하준은 회의실 맨 앞쪽으로 가서 뒤쪽을 향해 런웨이를 걷기 시작했다.

하준은 며칠 전 워킹을 배운 후, 평소에 길을 걸을 때도 항상 모델 워킹으로 걸어 다녔다.

패션쇼 무대 위에서는 긴장돼서 아무 생각도 안 날 것이고, 그러면 몸이 기억하는 워킹이 나올 것 같았기에 아예 몸에 익혀 놓자는 생각에서였다.

하준은 성큼성큼 시원스럽게 회의실 런웨이를 걸었고, 턴을 돌기 직전에는 고일학에게 덤으로 배운, 주머니에 손을 넣는 포즈까지 취했다.

한강윤과 직원들은 하준의 멋진 워킹을 넋을 놓고 보고 있다가 워킹이 끝나자, 힘찬 박수를 보냈다.

“와우! 하준 군, 워킹도 수준급인데요?”

“크으, 지금 옷이랑 여유있는 워킹이 찰떡이에요, 정말!”

“워킹이 약간 옛날 고일학 씨 생각나지 않아요? 시원하면서도 여유 있는 느낌이 말이에요.”

“역시 배우라 그런가, 표정도 자연스럽게 잘 짓네요. 엄청 근엄해 보였어요. 진짜 왕자처럼요.”

하준은 왕자 컨셉이라는 말에 일부러 스스로 왕자라고 생각하며 살짝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패션쇼 무대에서 너무 튀지 않을 정도로만 시험 삼아 해봤는데, 반응이 괜찮았다.

“Gorgeous!(너무 멋져!) 천편일률적인 모델들의 무표정과는 느낌이 달라. 그렇다고 너무 연기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있는데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근엄과 기품이 있어. 걸음걸이도 딱 좋아, 너무 멋져!”

한강윤도 무척 흥분해서 칭찬을 쏟아냈다.

하준은 자신의 의도가 한강윤과 직원들에게 잘 인식되어서 만족스러웠다.

하준은 이렇게 워킹에서도, 피팅에서도 한강윤의 폭풍칭찬을 받았고, 한강윤의 이번 패션쇼 메인모델로 확정되었다.

***

다음 날, 하준은 <우리들의 학교> 촬영 때문에 ‘가람 고등학교’로 향했다.

‘가람 고등학교’는 폐교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교였는데, <우리들의 학교>의 세트장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현석이는 저쪽 복도에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지한이는 이쪽에서 걸어가다가 맞닥뜨리는 거야. 현석이는 불편하다는 듯이 표정 한번 짓고, 그냥 지나가려는데 지한이가 현석이 팔을 탁 잡으면서 대사. 오케이?”

황 PD가 이현제와 하준의 동선을 자세히 설명해주었고, 곧 이현제의 촬영부터 시작되었다.

“레디, 액션!”

장현석 역의 이현제는 복도 끝에서 걸어오다가 김지한을 발견하고 인상을 구겼다.

“컷, 오케이! 다음 지한이 반대편에서!”

이현제의 촬영이 끝나고 다음은 하준의 차례였다.

“레디, 액션!”

하준은 반대편 복도 끝에서 성큼성큼 카메라를 향해 걸어왔고, 카메라는 이 모습을 풀샷으로 잡았다.

그런데 황 PD가 모니터로 이 장면을 지켜보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컷! 지한아, 너 뭐야?”

“네? 저 뭐 잘못했어요?”

“아니, 너 워킹이······ 간지가 엄청 나는데? 예전이랑 느낌이 달라.”

“정말요? 이상한가요?”

“아니 아니, 이상한 게 아니라 너무 달라져서 놀랐어. 너도 와서 한번 볼래?”

황 PD의 제안에 하준이 모니터를 하기 위해 뛰어왔고, 이현제를 비롯한 주조연 배우들도 궁금해서 모니터로 몰려들었다.

황 PD가 방금 찍은 풀샷 장면을 되감아서 보여주자, 다들 황 PD처럼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어? 진짜 완전 달라졌는데요? 하준이 너 뭐 어떻게 한 거야?”

“복도가 런웨인 줄······. 진짜 멋있게 걷는데?”

“와, 나 걷는 거 하나에 설레긴 처음이야. 하준아, 누나 반했다?”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내는 동료 배우들이 굉장한 의문을 표출했다.

하준 역시 모니터로 자신이 촬영된 걸 보니까 확실히 자기 걸음걸이가 멋있어졌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아, 그게, 저 얼마 전에 모델 워킹 좀 배웠거든요.”

“진짜? 어쩐지! 이거 완전 모델 포스야.”

“맞아, 맞아! 워킹 제대로 배웠구나!”

“와, 뭐야, 너 나한테 말도 안 하고 혼자 배운 거야?”

이현제가 서운한 표정으로 투덜댔다.

“그게, 내가 일부러 배우려고 한 게 아니라, 일이 생겨서 갑자기 배우게 된 건데······.”

하준이 이현제에게 해명을 하려는데, 조연 배우 중 하나가 불쑥 큰 소리로 외쳤다.

“하준이, 한강윤 패션쇼 메인 선대요!! 방금 기사 떴어요!”

“뭐? 정말?”

“‘한’의 한강윤 디자이너?”

“하준아, 진짜야?”

이현제가 서운함을 거두고 하준에게 확인했다.

그러자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동시에 방금 기사 소식을 알려준 조연 배우가 기사도 우렁차게 읽어주었다.

“하준은 내달 20일 서울패션위크에서 한강윤 패션쇼의 메인 모델로 설 예정이다. 한강윤 디자이너는 ‘국민아들’ 하준의 오랜 팬으로,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며 제안을 흔쾌히 수락해준 하준 군에게 감사함을 내비쳤다. 하준은 패션쇼에 서는 것은 처음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귀추가 주목된다······.”

“헐!”

“와아······!”

“무려 한강윤 디자이너가 제안했대!”

“그래서 모델 워킹 배운 거구나! 대박.”

촬영장의 스태프와 배우들은 모두들 새로운 소식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곧 하준을 축하해주었다.

“대박이다, 하준아. 축하해.”

“오늘 워킹하는 거 보니까, 모델 해도 되겠다 싶었는데, 진짜 런웨이에 선다니! 진짜 축하한다.”

“넌 잘할 거야. 축하해! 패션위크 나도 보러 가고 싶다!”

황 PD도 축하와 함께 슬쩍 걱정도 내비쳤다.

“축하해. 음, 근데 이거 이러다 설마 모델계에 우리 하준이 빼앗기는 건 아니겠지?”

“아휴, 그럴 리가요. 전 기본적으로 배우예요.”

“하하, 농담이야. 근데 워킹 진짜 잘 배웠다. 복도 걸어오는 것만으로도 엄청 멋있어.”

황 PD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하준을 칭찬했다.

하준은 축하를 받는 것도 기뻤지만, 모델 워킹을 배운 게 이렇게 바로 실전에서 좋은 반응으로 돌아오니 뿌듯했다.

‘최 대표님 말씀이 다 맞았네. 역시 우리 대표님!’

하준은 거의 10년 동안 계속 재계약을 하면서 월드 엔터테인먼트와 함께 해왔다.

그래서 최 대표는 거의 하준의 ‘서브 아빠’ 같은 느낌이었다.

회사 이익보다 항상 하준의 컨디션과 의견을 존중했고 하준을 위해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 덕분에 하준은 자기가 원하는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이렇게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하준은 자기가 인복이 참 많다고 생각했고, 자기도 주변 사람들에게 더 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얼마 후, 드디어 하준의 첫 패션쇼 무대에 서는 날이 되었다.

패션쇼는 저녁이었지만, 미리 리허설을 하기 위해 하준은 오전에 일찍 패션쇼장으로 향했다.

하준은 며칠 전 다른 모델들과 피팅 진행 때 잠깐 만난 적이 있었지만, 여전히 데면데면한 상태라 조심스럽게 백스테이지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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