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112화
윤기옥의 회사는 뉴욕의 어느 빌딩 13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윤기철은 회사로 들어가기 전, 하준에게 윤기옥의 회사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고모네 회사는 작은 디자인 회사야. 고모는 부장 정도 되는데, 사원들이 8명 정도 되나 봐. 가면 아마 사장님도 있을 거야.”
잠시 후, 하준 가족이 윤기옥의 회사에 들어섰다.
하준은 일단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Excuse me.(실례합니다.)”
하준의 말을 들은 직원들이 거의 동시에 하준을 쳐다보았다.
직원들은 대부분 외국인이었고, 그중에 검은 머리의 윤기옥이 있었다.
“어머, 하준이 왔구나!”
윤기옥이 하준을 반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어 다른 직원들도 하준을 알아보고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줄줄이 일어섰다.
“Oh, my god, It’s really 하준!(세상에, 진짜 하준이네!)”
“Was it real that 하준 was the manager’s nephew?(하준이가 부장님 조카라는 게 진짜였어요?)”
“He’s so handsome!(엄청 잘생겼네!)”
“How is he here······?(근데 어떻게 여기······?)”
직원들이 서로 놀라는 와중에 윤기옥은 얼른 하준 가족에게 달려와 가볍게 포옹하며 인사를 나눴다.
“오빠, 새언니, 오랜만이에요. 우구, 우리 하준이, 잘 지냈지? 어제 방송 나온 거 봤어. 하준이 영어 엄청 잘하더라. 마술도 잘하고. 호호.”
“헤헤, 전 잘 지냈어요. 고모는요?”
“나도 잘 지냈지. 아, 이쪽은 나랑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야.”
직원들은 TV에서 봤던 한국 아역 배우가 눈앞에 나타나자 이미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주변에 몰려와 있었다.
“Hello, Nice to meet you. My name is 하준.”
하준이 방긋 웃으며 영어로 인사하자, 직원들은 귀엽다며 너무 좋아했다.
<신비종>에서 봤다는 사람도 있고, 윤기옥에게 얘기를 들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준이 그들과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하이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Oh! 하준!”
하준이 돌아보니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하준이 윤기옥에게 눈빛으로 누군지 물었고, 윤기옥이 얼른 소개했다.
“아, 우리 대표님인 엠마 김이야. 애기들이 네 팬이라서 내가 너 만난다니까 회사로 오라고 하셨지.”
오늘 윤기옥은 하준과 점심식사도 하고 이후 함께 놀기 위해 반차를 내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들은 엠마가 하준을 잠깐이라도 보고 싶다고 회사로 오라고 해달라고 부탁했다.
“아하, 안녕하세요! 저는 하준이라고 합니다. 여기 윤기옥 고모의 조카예요.”
하준은 대표가 한국인으로 보여서 한국말로 인사했다.
하지만 엠마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재미교포 3세라 아주 간단한 한국말 정도만 할 줄 알아서 인사 외에는 영어로 말했다.
물론 하준은 영어도 잘했으니 대화를 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하준아, 우리 애들이 진짜 팬이야. 덩달아 나도 팬이고. 윤 부장의 조카가 너라는 얘기 듣고 얼마나 놀라고 기뻤는지 몰라. 오늘 우리 애들도 여기 왔으면 엄청 좋아했을 텐데, 진짜 아쉽다. 우리 애들은 지금 할아버지 댁에 갔거든.”
“감사합니다. 저도 아쉽네요.”
“한국 아역 배우가 여기서도 인기가 많아서 엄청 자랑스러워. <신비종>도 미국에서 유명하고 말이야. 한국이 언제 이렇게 문화대국이 됐는지, 뿌듯해.”
엠마는 한국말은 잘 못 해도 한국을 모국이라고 생각하는지 무척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자기 애들을 위한 사인과 사진 촬영 등을 부탁했다.
하준은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고, 다른 직원들과도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러던 중 하준의 눈에 직원들의 컴퓨터 화면이 들어왔다.
컴퓨터 화면에는 ‘BEELO TOOTHPASTE KIDS’라는 문구와 다양한 색상 바가 이리저리 배치되어 있었다.
하준은 곧바로 궁금증이 일어 윤기옥에게 물었다.
“어린이용 치약 디자인하시는 거예요?”
“뭐? 이거? 아, 응. 맞아. 이번에 의뢰받은 어린이용 치약 패키지 디자인인데, 이건 이전 디자인이야. 이전 디자인이랑 비슷하게 해달래서 참고하는 거야.”
“패키지 디자인이 뭐예요?”
“아, 패키지 디자인은······ 제품의 특징과 정보를 포함해서 제품이 돋보일 수 있도록 겉포장 전체를 디자인하는 거야. 예를 들어, 이 치약 같은 경우엔 치약 용기 튜브 겉면도 디자인하고, 치약 튜브가 들어가는 작은 케이스도 디자인하지.”
“아하. 컴퓨터로 그림도 넣고 다 하시는 거예요?”
“응, 그렇지.”
하준이 회사에서 하는 디자인에 관심을 보이자, 엠마가 얼른 끼어들었다.
“하준아, 우리 디자인 회사에서는 CI, BI, 패키지 디자인, 로고 디자인 등 다양한 디자인을 의뢰받아서 작업해. 디자인에 관심 있으면 구경 좀 하다 갈래?”
“정말요? 구경해도 돼요?”
“그럼!”
“감사합니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호기심이 많지만, 하준은 조금 더 많은 편이었다. 거기다 하준은 어린이들이 별로 관심 없어 하는 것들에도 관심이 많았다.
하준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디자이너들의 작업을 구경했다.
윤기옥은 그런 하준을 쫓아다니며 하준이 궁금해하는 것들에 답변을 해주었다.
그러던 중 하준이 어느 컴퓨터 앞에서 멈춰선 하준이 갑자기 윤기옥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고모, 저 ‘KIDS’ 글자만 일부러 조금 기울여 놓으신 거예요?”
하준의 말에 윤기옥은 화면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윤기옥이 보기에는 세로로 세워진 ‘KIDS’ 글자가 기울어 보이지 않았다.
“고모가 보기엔 수직이 맞는 것 같은데?”
“아닌데······ 수직처럼 보이긴 하는데, 아주 조금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어요.”
“그래?”
디자인은 한 치의 오차도 있으면 안 되기에 윤기옥은 작업 중인 디자이너에게 그 부분을 확대해보라고 했다.
“이거 수직 다 맞춰서 작업해놓은 건데······.”
디자이너는 기울어 있을 리 없다며 글자를 확대했다.
그런데 확대해서 글자를 선택해보니, 글자 선택 박스가 정말 미세하게 삐뚤어져 있었다.
“오, 정말 삐뚤어져 있네?”
“어머, 그러게요. 제가 작업하다가 건드렸나 봐요. 와, 하준이 엄청 잘 보네요.”
“그러게. 이건 시력이 좋은 건가, 공간감이 좋은 건가?”
“딱 어떤 능력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아무튼 대단한 거예요. 그런 건 타고나는 거라던데, 디자인 같은 거 하면 되게 잘하겠어요.”
“아휴, 우리 하준이는 이렇게 재능이 많아서 어째. 다 하고 싶어도 못하겠네. 호호.”
윤기옥은 싱글벙글 웃으며 하준을 칭찬했다.
그때, 엠마가 하준을 불렀다.
“하준아, 이리 와서 이것도 좀 봐줄래?”
“네, 뭔데요?”
하준이 궁금해하며 엠마의 책상으로 뛰어갔다.
엠마는 하준에게 어린이용 치약 디자인 시안을 2개 보여주며 어떤 것이 나은지 물었다.
하준은 한참 동안 두 시안을 이리저리 비교해보더니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는 1번이 나은데요, 근데 솔직히 말해도 돼요?”
“그럼, 당연하지. 솔직히 뭐?”
“전 이런 치약 안 쓰고 싶을 것 같아요. 물론 이전 디자인도 마찬가지고요.”
사실 이 치약은 ‘KIDS’라고 글자가 써져 있지만, 어른들 치약 디자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저 여러 색상의 막대를 이리저리 배치한 심플한 디자인이었던 것이다.
색상 막대들도 검정, 파랑의 색상 막대들을 기본으로 배치하고, 딸기향이 첨가된 건 빨간색, 파인애플향이 첨가된 건 노란색으로 약간의 차이를 준 게 다였다.
하준의 너무 솔직한 말에 엠마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그래, 우리 애들도 별로라고 그러더라. 근데 어쩌겠어, 의뢰한 회사 대표가 이런 게 좋다는데. 이전 디자인을 참고해서 하라고 기준을 제시했거든.”
“음, 근데 아까 고모 말로는 ‘패키지 디자인’이란 건, 제품의 특징과 정보를 포함해서 제품이 돋보일 수 있도록 겉포장 전체를 디자인하는 거라고 했는데요······. 이건 제품의 특징과 정보가 단지 글자랑 색상으로만 표현됐는데, 그럼 잘 된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나요? ······돋보이는 점도 그다지 없는 것 같고요.”
하준의 촌철살인에 엠마는 무언가에 머리를 한 대 맞은 양 놀란 눈으로 하준을 쳐다보았다.
윤기옥과 직원들은 너무 직설적인 평가라 순간 당황했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엠마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뭔가 깨달았는지 상기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래, 하준이 말이 맞아! 우린 의뢰인에게 맞추는 것에만 너무 치중했어. 그래서 안일한 디자인만 해왔던 거야. 그게 편하다는 이유로 말이야. 이번엔 진짜 패키지 디자인을 해보자. 우리 회사의 디자인 역량을 보여주는 거야!”
엠마는 맨 처음 회사를 창립했을 때 얼마간은 열정적으로 디자인을 했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열정은 사라지고 효율만 추구하게 되어 의뢰자가 원하는 바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수동적인 디자인만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준의 이야기를 듣고 그 예전에 가졌던 디자이너의 열정이 되살아났다.
“네? 그럼 이 디자인은요?”
한 직원이 화들짝 놀라 손을 들며 물었다.
그는 원래 만들어 놓은 디자인도 파기하고 아예 새롭게 우리만의 디자인을 선보이자는 이야기로 이해한 것이다.
“이것도 살려야지. 이 디자인은 의뢰인이 원하는 방향에 최대한 맞춘 거잖아? 이건 이거대로 시안으로 제시하고, 그 외에 우리 디자인 회사만의 패키지 디자인을 추가적으로 제시하자는 거야.”
“아하. 네, 알겠습니다!”
직원들은 엠마의 결정을 지지하며 활기차게 답했다.
직원들에게 새로운 디자인을 지시한 엠마는 하준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준아, 고맙다. 아주 직설적이어서 뒤통수가 얼얼했지만, 지금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말이었어.”
“뒤통수를 치려던 말은 아니었는데, 죄송해요.”
“아니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뜻이야. 호호.”
“좋게 받아 들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헤헤.”
엠마의 웃음에 하준도 따라 웃었고, 윤기옥과 윤기철, 최선희도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하준은 이렇게 윤기옥의 회사에도 좋은 깨달음을 주고 회사를 나왔다.
“우리 하준이는 어쩜 이렇게 똑똑할까! 이뻐 죽겠네. 고모가 오늘 점심 진짜 맛있는 거 사줄게. 가자!”
윤기옥은 하준의 손을 꼭 잡고 앞장섰다.
윤기철과 최선희는 어디서나 사랑받는 하준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그 뒤를 따랐다.
하준 가족은 윤기옥에게 고급 코스 요리를 대접받았고, 뉴욕 관광도 함께 다녔다.
“어? 쟤 하준이 아니야?”
“오, 하준이다!”
하준은 가는 곳마다 알아보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하준은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와 팬서비스를 잊지 않았다.
윤기옥은 조카 하준이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오빠, <신비종> 시즌 7까지 찍는다며? 지금 시즌 2 찍었는데도 이렇게 많이 알아보는데, 그거 다 찍고 나면 전 세계 사람들이 하준이 다 아는 거 아냐? 그 전에 여행 좀 더 다녀야 하지 않을까? 특히 미국은 파파라치도 많아서······.”
“그런가······. 하준이랑 얘기해봐야겠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윤기철이 보기에 다행히 하준은 팬들이 아직까지는 부담스러운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더해가는 하준의 인기를 보면 윤기옥의 걱정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그래, 이번에 미국 와서 디즈리랜드 가기로 한 건 정말 잘한 것 같네. 정말 원 없이 놀게 해줘야지.’
***
다음 날, 드디어 하준 일행은 디즈리랜드에 가기 위해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준과 공정환, 서희수는 꿈에 그리던 디즈리랜드에 간다며 무척 흥분해 있었다.
그리고 의외로 어른들 역시 생애 처음 디즈리랜드에 간다며 설레했다.
“대표님도 처음 가보세요?”
김유택이 최원상 대표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내가 그런 데 갈 시간이 어딨냐? 어릴 때는 돈 없어서 미국 여행은 꿈도 못 꿨고. 이제라도 갈 수 있다니 와, 나 출세했다. 하하.”
“전 일찍 출세했네요. 흐흐.”
김유택도 기대가 되는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눈 좀 붙여 놔. 그래야 이따가 체력 고갈 안 된다?”
“네! 저 내릴 때까지 잘 거니까 깨우지 마세요.”
김유택은 체력 비축을 위해 눈을 감았고, 약 6시간 비행 후 비행기는 LA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공항에서 하준은 뜻밖의 인물을 마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