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107화
“하준아!”
“네?”
하준은 얼른 박 PD에게 달려갔다.
박 PD는 다정하게 하준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며 물었다.
“아니, 하준아, 이탈리아어는 언제 그렇게 공부했어? <영재> 촬영하느라 바빠서 시간도 없었을 텐데.”
“그냥 틈틈이 하다가 <영재> 촬영 다 끝나고 시간 좀 있었잖아요. 그때 많이 했어요.”
하준은 언어 습득도 빨랐기 때문에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는 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고, 이뻐라. 하준이는 뭐든 열심히 하는구나. 이탈리아로 버스킹 온다고 이탈리아어도 공부하고. 이쁘다, 이뻐.”
“감사합니다. 헤헤.”
“오늘 하준이가 이탈리아어도 잘하고 대금도 잘 불고 그래서 촬영 분량도 많이 나오고 아주 잘 됐어. 남은 버스킹도 잘 부탁한다?”
“네, 열심히 할게요.”
“참, 하준아, 너 이탈리아 노래도 할 줄 아는 거 있니?”
“여러 개 들어본 곡들이 있긴 한데, 불러보진 않았어요. 음, 연습할까요?”
하준은 박 PD가 이탈리아 노래를 원하는 것 같아 눈치껏 물었다.
“응, 할 수 있으면 그것도 좋을 것 같아.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네, 준비해 볼게요.”
“좋아, 좋아.”
박 PD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 PD는 여러모로 하준을 섭외한 것이 무척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노래를 잘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타와 대금도 연주할 줄 알고, 거기다 귀여운 아이라 주목도도 높았다.
물론 여기까지는 박 PD가 예상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의외로 하준을 알아보는 사람들도 꽤 있고, 하준이 이탈리아어까지 공부해와서 버스킹에 대한 호응도도 매우 높았다.
박 PD는 이번 시즌 5는 역대급 시청률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발걸음을 옮겼다.
이날 <비긴버스킹> 팀은 콜로세움을 구경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버스킹 공연을 한 번 더 했다.
그리고 며칠 동안은 별 문제 없이 공연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문제가 발생했다.
“아윽.”
한범우가 자신의 캐리어 가방을 꺼내다가 갑자기 짧은 비명을 지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래? 어디 다쳤어?”
박정윤이 노래를 부르다 말고 놀란 눈으로 다가와 물었다.
하준과 김도현도 기타 연주를 멈추고 한범우에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괜찮으세요?”
그러자 한범우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오른손을 흔들어 털며 대답했다.
“아, 딴 데 보면서 캐리어 꺼내다가 손가락이 좀 꺾였어요.”
“조심해야지! 어디 봐봐.”
한범우가 여전히 통증이 있는지 손가락을 구부린 채로 박정윤에게 손을 보여주었다.
“이 가운데 손가락이요.”
“뼈 부러진 건 아니지? 살짝 펴봐.”
김도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에이,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뼈 부러졌으면 엄청 아프죠. 그냥 타박상 정도겠죠. 너무 걱정마세요.”
한범우는 손가락을 힘겹게 펴는 듯했으나, 그래도 손가락이 펴지는 걸 보니 뼈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한범우의 다친 손가락은 퉁퉁 부어 버렸고, 결국 한범우는 병원을 가게 되었다.
“어떻게 됐어? 뼈 부러진 거래?”
매니저와 함께 병원에 다녀온 한범우를 보자마자 김도현이 다급하게 물었다.
한범우는 뒷짐을 지고 들어왔는데, 김도현의 물음에 미안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보여주며 말했다.
“죄송해요······. 인대 늘어나서 깁스 2주 해야 한대요.”
한범우의 오른쪽 중지는 부목과 붕대로 감겨 있었다.
“헐?!”
“진짜?”
“아······.”
김도현과 박정윤, 그리고 하준은 모두 안타까워했다.
그러다 박정윤이 한범우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그래도 뼈 부러진 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인대는 가만히 있으면 잘 나을 거야.”
“네, 근데 제가 이거 때문에 피아노 반주를 못 하는데 어떡하죠?”
제작진도 한범우의 급작스러운 부상으로 지금 회의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기타를 반주로 써도 되지만, 피아노가 꼭 필요한 곡들도 있었으니까.
그때, 김도현이 하준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하준이도 피아노 잘 치지 않아? 뮤지컬 할 때, 어린 베토벤 역으로 피아노도 실제로 쳤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김도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 PD가 연예인 숙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하준에게 김도현과 똑같은 말을 물었다.
“하준아, 너 피아노 잘 치지? 뮤지컬에서 어린 베토벤 했었잖아! 거기서 직접 피아노 연주도 했다고 했고. 맞지?”
이에 숙소에 있던 출연진과 연출진들의 시선이 모두 하준에게로 쏠렸다.
“아······ 네. 피아노 칠 줄 알아요. 반주도 할 수 있긴 하고요.”
“오, 다행이다! 어디 그럼 실력 한 번 보자. 반주할 수 있을지.”
하준이 딱히 피아노 반주를 하면서 가요를 부르는 것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에 검증이 필요했던 것이다.
“네, 그럼 뭐 쳐볼까요?”
하준이 키보드 앞에 앉으며 물었다.
그러자 한범우가 자기 노래 반주를 해 보라며 악보를 찾아주었다.
하준은 악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스윽 훑어보더니 곧 건반에 손을 올렸다.
제작진과 출연진은 다들 제발 하준이 반주를 잘해서 아무 탈 없이 남은 버스킹 공연을 마무리할 수 있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준을 지켜보았다.
하준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하준의 연주가 진행될수록 주변 사람들의 표정은 안도와 기쁨의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하준이 중간쯤까지 연주했을 때, 한범우가 하준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하얀 들꽃을 닮은 그대의 미소는~”
하준은 반주를 끝까지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해냈고, 심지어 마지막에는 한범우의 사인에 맞춰 끝 구절을 한번 더 반복하는 것까지 완벽히 해냈다.
짝짝짝짝짝!
하준의 반주와 한범우의 노래가 끝나자, 사람들은 힘차게 박수를 보냈고, 다들 입이 마르도록 하준을 칭찬했다.
“와아!”
“우와, 하준이 엄청 잘하네!”
“하준이가 반주하면 되겠다. 진짜 다행이에요, 감독님.”
“아니, 애가 벌써부터 사기캐릭 아니야? 어떻게 피아노도 이렇게 잘 쳐?”
“못하는 게 진짜 없네! 기타, 대금, 피아노 전부 다 잘하잖아?”
박 PD 역시 활짝 웃으며 하준에게 다가오더니 하준을 와락 껴안으며 좋아했다.
“하준이 데려오길 정말 잘했네! 아휴, 이뻐라.”
박 PD는 한번 더 하준을 섭외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한범우는 자신의 부주의로 손가락을 다쳐서 혹시라도 버스킹에 차질이 생기면 어쩌나 무척 마음이 무거웠는데, 하준이 피아노를 잘 쳐서 너무 다행이었다.
“고마워, 하준아. 진짜 다행이야. 어? 근데······.”
한범우가 웃으며 하준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문득 피아노에 올려진 악보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너 악보 안 넘기고 그냥 연주했니?”
한범우 노래 악보는 여러 장으로 되어 있었는데, 피아노 위에 올려진 악보는 한 번도 넘기지 않은 듯 앞장이 맨 앞에 있었다.
“아······ 대충 다 알아서 그냥 쳤어요.”
“뭐? 이걸 벌써 다 외워서 쳤다는 거야? 한 번 보고?”
하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한범우는 경악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와, 어떻게······! 얘 좀 보세요. 악보를 한번 보고 다 외웠대요. 연주하면서 외워진 것도 아니고 어떻게 악보를 그대로 외울 수 있지? 진짜 천재인가 봐요!”
“진짜? 와······ 배우는 다른 건가? 배우들은 대사 이만큼씩 막 외우잖아.”
“하준이가 다른 거겠지. 대사는 글자를 그대로 외우는 거지만, 이건 악보를 외운 다음에 그 외운 악보로 연주를 해야 하는 거잖아. 대단해!”
박정윤과 김도현도 하준의 암기력에 혀를 내둘렀다.
“이런 말 맨날 하기도 입 아픈데, 하준이는 천재 맞는 거 같아.”
“같이 촬영해 보니까 진짜 그래.”
“맞아요. 애가 잘생기고 귀여운데, 또 똑똑해······ 얼굴천재에, 재주천재네!”
다른 사람들도 하준 덕분에 촬영에 지장이 없을 것 같으니 더 하준을 칭찬하며 좋아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남은 버스킹은 한범우 대신 하준이 피아노 반주까지 해준 덕분에 무사히,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
“안녕하세요!”
“어? 하준아!”
하준이 화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 작가가 활짝 웃으며 하준에게 달려왔다.
하준은 <영재> 영화 촬영 초반에는 극중 등장할 작품들 때문에 안 작가의 화실에 자주 왔었다.
그리고 <비긴버스킹> 촬영차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에도 하루 와서 그림을 그리고 갔다.
“이탈리아 갔다 벌써 온 거야?”
“2주나 갔다 왔는데요?”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네가 다녀온다고 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아하하. 내가 밤새 작업하고 그러다 보니까 날짜 개념이 없어.”
안 작가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저도 뭐 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시간이 막 지나 있고 그래요.”
하준은 비슷한 경험을 말함으로써 안 작가의 민망함을 덜어주자, 안 작가는 하준의 다정한 마음씨에 감동하여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친근하게 물었다.
“근데 학교 안 가고 아침부터 화실에 그림 그리러 온 거야?”
“아직 방학이에요. 개학은 2월에 해요.”
“아하하. 내가 이런다니까. 오늘은 뭐 그릴 거야?”
다시 민망해진 안 작가가 곧바로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 느낀 점이 많아서 그리고 싶은 게 많아요. 다른 나라는 확실히 우리나라랑 감성이나 문화가 다른 점이 많더라고요.”
“그렇지. 여행은 우리 같은 화가에게 좋은 영감을 많이 주지. 외국에서 버스킹하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겠다.”
“사실 길거리 버스킹은 한국에서도 안 해봐서 비교는 못 하겠지만, 뭔가 낯선 환경이라 다른 것 같긴 했어요. 아, 그리고 관광도 했는데요, 유명한 길거리도 가보고 콜로세움도 가봤어요!”
“그랬어? 어땠어? 콜로세움 엄청 크지?”
“네, 그게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설명도 들었는데요······.”
하준은 안 작가에게 생애 첫 이탈리아 여행에서 보고 느낀 점을 신나게 이야기했다.
안 작가는 하준의 이야기를 즐겁게 들어주었고 하준이 이야기를 마치자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오늘 그림의 주제는 여행에서 느낀 점이야?”
“네, 새로운 세상에서 느낀 점이요.”
“그래, 멋진 그림이 나올 것 같네. 전시회가 풍성해지겠어. 자, 그럼 마음껏 그려봐.”
안 작가가 팔을 넓게 펼치며 말했다.
하준은 <영재>에서 나온 그림들로 전시회를 열기로 되어 있었는데, <영재> 개봉 전에 그림을 더 그리게 되면 하준의 작품도 함께 전시를 할 예정이었다.
“네, 아, 저 오늘 저녁 약속 있어서 5시쯤 집에 갈 거예요.”
“그럼 점심은 나랑 같이 먹고?”
“네, 그래도 되죠?”
“그럼! 난 안 심심하고 너무 좋지.”
곧 안 작가와 하준은 각자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준은 새로운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과 풍경들, 또 그대의 감정들을 캔버스에 표현해 나갔고, 그러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하준아, 5시 됐는데? 저녁 약속 있다며?”
“앗. 네, 감사합니다. 저 가볼게요!”
커피를 타려고 마침 자리에서 일어선 안 작가 덕분에 하준은 저녁 약속에 늦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오늘 저녁 약속은 ‘오마카세환’이라는 너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오세환과 그의 친구 박병우와의 약속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바로 오세환의 생일이었다.
“세환이 형! 병우 형!”
하준이 차창을 내리고 어느 건물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큰 소리로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하준아, 안녕!”
“오랜만이야, 진짜 보고 싶었어!”
“저도요, 얼른 타세요.”
“응, 고마워.”
오세환과 박병우는 하준의 차에 올랐고, 김유택은 차를 출발시켰다.
오세환과 박병우는 <영재> 영화 촬영 전에 하준과 한번 봤었고, 거의 3달 만에 만난 것이라 서로 안부 인사부터 나눴다.
어느 정도 서로의 근황을 얘기하고 나자, 오세환이 하준에게 물었다.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내가 밥 살게.”
오세환의 생일이라고 하준이 밥을 사주겠다고 했지만, 오세환은 하준에게 고마운 게 많아서 자기가 밥을 사고 싶어 했다.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제가 사드린다고 했잖아요. 촬영 장비는 가져오셨죠?”
“응, 가져오긴 했는데······.”
그러자 박병우가 끼어들었다.
“누가 사든 그건 이따가 밥 먹고 결정해도 되잖아? 난 지금 뭘 먹으러 가는 건지가 제일 궁금하다구. 하준아, 우리 어디 가는 거냐니까?”
박병우의 질문에 하준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마카세요.”
“헐?”
“진짜?”
하준의 대답에 오세환과 박병우는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