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104화
첫 촬영의 시작은 역시 영화가 잘 되길 기원하는 고사 지내기였다.
사람들은 고사 자체의 효과를 믿는 건 아니었지만, 고사를 지내는 행위만으로 심적 안정의 효과를 느낄 수 있었다.
하준은 이번에 처음으로 단독 주연으로 영화를 찍는 만큼 잘 되길 기원하는 마음이 무척 컸다.
“촬영하는 동안 배우들과 스태프들 모두 아무 일 없고 건강하게 해주시고, 우리 영화 <영재> 꼭 대박 나게 해주세요.”
하준은 <죽지 않는 백화점>을 시작으로 꽤 여러 번의 고사를 지내봤기에 능숙하게 소원을 말하고 절을 한 뒤, 돼지 입에 봉투도 꽂았다.
하준이 소원을 말하고 나자, 주변의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환호하며 외쳤다.
“와아!”
“잘한다!”
“대박 나자!”
“천만 가즈아!”
고사를 지낸 뒤,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갔다.
오늘 촬영은 극중 영재의 집 세트장에서 진행됐는데, 영재의 엄마가 영재의 미래 직업을 고르기 위해 다양한 책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영재야, 이 책들 봐봐. 이 중에 어떤 책이 제일 재미있는지 골라봐. 응?”
영재 엄마 역의 우미정은 프로그래밍 서적, 의학서적, 헌법책을 가져와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영재의 앞에 쭉 펼쳐 놓았다.
하지만 영재 역의 하준은 별 관심 없다는 듯 여전히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으휴, 넌 왜 돈도 안 되는 그림은 그렇게 그리고 있어? 그 좋은 머리 가지고! 저리 치우고 빨리 이거 봐.”
영재 엄마가 영재의 그림을 빼앗아 치워버리자, 영재는 화를 내며 엄마를 째려보았다.
“아, 왜에! 나 그림 그릴 거란 말이야! 내놔, 내 그림!”
순간, 영재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 영재 엄마는 얼른 영재를 달래기로 했다.
“영재야, 이 책 중에 마음에 드는 거 고르면 그림 그리게 해줄게.”
“싫어! 그림도 못 그리게 하고, 짜증나!”
영재는 입이 댓 발 나와서는 거실로 나가 버렸다.
영재 엄마는 그런 영재를 달래기 위해 최후의 수단을 썼다.
“영재야, 영재야! 이 책들 중 하나 골라주면 저번에 그 화실 보내줄게. 어때?”
영재 엄마의 수가 통했는지 영재는 후다닥 방으로 돌아왔다.
“정말? 정말이지?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해.”
영재 엄마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영재는 엄마와 약속을 한 후 책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박에 영재는 의학서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게 제일 재밌어 보여.”
“오! 우리 영재는 의사가 되고 싶구나! 근데 왜 제일 재밌어 보여?”
“그림이 많잖아.”
영재가 씨익 웃었다.
하준이 대사를 모두 끝내자, 정혁구 감독이 ‘컷’을 외쳤다.
“컷! 음, 좋았어. 근데 하준아, 잠깐만.”
정 감독은 갑자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하준은 지금까지 대사도 안 틀렸고, 연기도 문제가 없었는데, 정 감독이 갑자기 왜 표정이 좋지 않은지 의아했다.
정 감독은 턱을 매만지며 고심을 하더니 곧 하준에게 다가왔다.
“하준아, 혹시 여기 책에 나온 그림 똑같이 그릴 수 있을까?”
정 감독이 의학서적에 나온 갑상샘 주변의 정맥혈관분포를 그려놓은 삽화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그릴 수 있어요. 근데 어디다 쓰시려고요?”
“원래 이 장면이 여기서 끝이잖아? 근데 그러지 말고, 이런 식으로······.”
정 감독은 즉석에서 대사와 상황을 조금 수정해서 하준과 영재 엄마 역할의 우미정에게 설명했다.
“미정 씨, 어때요? 이게 더 나을 것 같지 않아요?”
“네, 훨씬 임팩트가 있을 것 같아요. 근데 하준이가 이걸 위치랑 같이 다 외워야 할 텐데······ 시간이 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게 다 너무 어려운 단어에, 영어도 있어서······.”
우미정이 하준을 쳐다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무리 대본을 통으로 외우는 하준이라도 이렇게 어려운 의학용어를 금방 외우기는 쉬울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하준은 벌써 정 감독이 말한 삽화와 그 옆의 단어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런가? 하준아, 시간 얼마나 주면 될까? 한 30분?”
정 감독이 하준에게 물었다.
“음, 잠시만요.”
“응, 얼마나 걸릴 것 같은지 생각해서 알려줘.”
정 감독은 하준이 원하는 시간만큼 외울 시간을 주려고 했다.
그런데 하준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이렇게 말했다.
“다 외웠어요. 이 종이에 그림부터 그릴까요?”
“응? 뭐? 이걸 지금 보고 다 외웠다고?”
깜짝 놀란 정 감독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소리쳤다.
당연히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들 역시 정 감독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네······.”
하준이 눈치를 보며 작게 대답했다.
“진짜? 어디 한 번 말해 봐.”
정 감독이 하준이 보고 있던 의학서적을 빼앗아 들고는 하준에게 외운 것을 말해보라고 했다.
“네, 왼쪽 위에서부터 말할게요. 방패목뿔막······ 아, 괄호 안에 있는 내용도 그냥 쭉 이어서 말할게요. 방패목뿔막, 갑상설골막, Thyrohyoid membrane, 위갑상정맥, 상갑상샘정맥, Superior thyroid vein. ······ 그 다음에, 오른쪽 위에서부터 위후두정맥, 상후두정맥, Superior laryngeal vein, 속목정맥, 내경정맥, internal jugular vein······.”
하준이 거침없이 명칭을 줄줄 외자, 모두들 이번엔 입이 쩍 벌어졌다.
사실 정 감독만이 이 내용이 맞는지 책을 보면서 확인하고 있었는데, 하준이 이런 어려운 단어와 영어를 줄줄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내용이 책과 동일한지 아닌지는 상관없이 경악할만한 일이었다.
물론 하준이 읊은 내용은 책에 적힌 내용과 정확히 일치했다.
“와, 하준아, 너 진짜 천재구나! 이걸 한번 보고 금방 다 외웠네!”
“감독님, 정말 내용 다 맞아요?”
우미정이 대표로 정 감독에게 다시 확인했다.
“그렇다니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맞아! 우리 하준이는 의사도 할 수 있겠는데?”
“우와, 대박! 이러면 우리 영화는 하준이 이야기 아니에요?”
“하준이 대단하다! 머리 엄청 좋은가 봐.”
“나도 대사 잘 외우는 배우들 여럿 봤지만, 하준이 같은 애는 처음이야.”
정 감독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며 하준의 천재적인 암기력을 칭찬했다.
최선희는 하준의 천재적인 면모를 하도 자주 봐서 이번에는 그저 흐뭇하게 웃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매니저 김유택이 최선희에게 슬쩍 속닥였다.
“와, 하준이 저 정도 머리면 정말 의사 시켜야 하는 거 아니에요?”
“호호, 하준이가 잘하는 거 다 시키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 이 영화에서도 영재가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잖아? 나도 하준이가 좋아하는 걸 하게 해줄 거야. 그게 지금까지는 배우인 것 같고.”
최선희의 말에 김유택이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역시, 좋은 엄마시네요.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는 거 정말 멋지세요. 후, 우리 엄마는 딱 영재 엄마 같았거든요. 제가 천재가 아니어서 금방 포기했기에 망정이지, 천재였으면 엄청 힘들었을 거예요. 공부 말고 다른 걸로도 강요 엄청 하는 스타일이셔서요.”
“사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한테 거는 기대가 많지. 우리 엄마도 그랬거든. 그래서 난 안 그래야지 하면서 살고 있어.”
최선희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최선희의 엄마는 최선희가 아주 어렸을 때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최선희를 키웠다. 그래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만큼 최선희에게 거는 기대도 크고 최선희에게 스트레스도 많이 주었다.
최선희가 연기를 하겠다고 하자, 심하게 반대했고, 결국 대학교는 최선희가 혼자 알아서 학자금 융자와 아르바이트로 겨우 다녔다.
그렇게 몇 년간 사이가 틀어진 채 살다가 최선희의 엄마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셨고, 한동안 그녀는 죄책감에 힘든 나날을 보냈었다.
그때는 배우 일도 잘 안 될 때라서 무척 힘들었는데, 다행히 윤기철 덕분에 버텨낼 수 있었다.
그래도 가끔은 결국 이렇게 무명 배우로 끝날 꿈이었다면 엄마 말대로 공무원이 되었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될 때도 있었다.
‘그래도 해보고 싶은 거 해봤으니 지금은 미련 없잖아. 배우를 안 해봤다면 평생 한이 됐을 거야.’
최선희는 후회가 될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자식을 낳으면 절대 강요하지 않고 아이가 원하는 걸 하도록 적극 지원하리라 다짐했다.
비록 최선희는 자기 아이를 낳지는 못했지만, 하늘이 내려준 하준이를 만나서 그 다짐을 실천해 나가고 있었다.
“하준아, 그럼 이 대사로 가자. 우미정 씨, 대사 다 외우셨죠?”
정 감독이 우미정에게 물었다.
“네, 다 외웠어요.”
우미정은 고개를 끄덕였고, 곧 촬영이 재개되었다.
“레디, 액션!”
정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자, 카메라는 돌기 시작했고, 하준이 새로 추가된 대사를 했다.
“이건 신기한 그림이네. 엄마, 나 이거 그려볼래.”
영재가 의학서적의 삽화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영재 엄마는 그게 또 불만이었다.
“아니, 그림이 있다고 고르지 말고, 내용을 봐야지! 답답해 죽겠네, 진짜.”
“내용도 다 봤어. 일단 종이 줘봐.”
"진짜?"
내용도 다 봤다는 말에 영재 엄마는 순순히 종이를 내밀었고, 영재를 관찰했다.
영재는 펜으로 슥슥 갑상샘 주변 정맥혈관분포 삽화를 그리더니 위에서부터 각 명칭을 읊으며 글자를 써 넣기 시작했다.
“방패목뿔막, 갑상설골막, Thyrohyoid membrane, 위갑상정맥, 상갑상샘정맥, Superior thyroid vein······.”
하준은 그림도 단번에 그려냈고, 대사도 NG 없이 완벽하게 해냈다.
하준의 어려운 대사가 끝나고, 정 감독이 컷을 외치자, 촬영장의 사람들은 큰 박수로 하준을 칭찬했다.
“그림도 한번에 그려버리는 거 봤지? 대박!”
“장난 아니야. 하준이는 진짜 천재인가봐.”
“와, 대단했다!”
“하준아, 정말 좋았어! 으하하.”
정 감독은 특히 더 만족스러워하며 하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영화 <영재>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중간중간 정 감독이 즉흥적으로 시나리오를 조금씩 수정하기도 했지만, 하준은 항상 잘 해내서 모두의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11월에 시작된 촬영은 딱 두 달 만에 끝이 났다.
마지막 촬영을 마친 정혁구 감독은 그동안 고생해준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90도로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모두들 너무 수고 많았습니다! 우리 영화, 이번엔 느낌이 정말 좋아요. 배우들 호흡도 좋았고, 스태프들도 너무 잘해줬어요. 모두 감사합니다!”
아쉬움의 작별 인사를 나눈 배우와 스태프들은 마지막 회식을 했고, 함께 단체 사진도 찍었다.
회식이 끝나갈 때쯤, 정 감독은 하준을 따로 불렀다.
“하준아, 이번 영화 같이 해줘서 정말 고맙다. 우리 하준이가 없었다면 이렇게 완성도 높은 영화가 나올 수 없었을 거야. 물론 아직 개봉을 한 건 아니지만, 난 자신 있어. 우리 영화는 정말 좋은 평가를 받게 될 거야.”
정 감독의 말은 진심이었다.
하준은 2개월 동안 정말 영재 그 자체였으니까.
특히 직접 그린 하준의 그림들은 정말 굉장했다.
이 그림들은 극중 영재의 천재성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매개체로써의 역할이 무척 중요했는데, 하준은 직접 멋진 그림을 그려서 정 감독의 고민을 덜어주었던 것이다.
“저도 너무 즐겁게 촬영했어요. 그리고 제가 지금까지 촬영한 작품들 중에 가장 마음에 남는 작품이 될 거 같아요. 좋은 작품에 캐스팅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구, 우리 귀여운 하준이, 이제 못 봐서 어쩌지? 난 그게 제일 아쉽네.”
정 감독은 하준을 꼭 끌어안고 볼을 비비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헤헤, 개봉할 때쯤 또 볼 수 있잖아요. 홍보도 해야 하고, 무대 인사도 다녀야 하니까요.”
“그건 아직 한참 남았잖아. 아! 하준이 <비긴버스킹> 촬영 간댔지? 그거 언제 방송 나와? 방송으로라도 봐야지.”
“다음 주에 이탈리아로 떠나는데, 방송은 언제 나오는지 잘 모르겠어요. 결정 나면 꼭 연락 드릴게요.”
“그래, 우리 하준이 앞으로 승승장구하고, 나중에 좀 더 크면 나랑 또 작품 하자.”
“네, 좋아요. 감사합니다.”
영화 <영재>는 이렇게 아쉬움 가득한 작별 회식으로 마무리되었고, 하준은 일주일 뒤 <비긴버스킹> 촬영을 위해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