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102화
안 작가는 우선 하준에게 화실의 유화 그림들을 구경시켜 주었다.
화실에는 정물화, 풍경화, 추상화 등 다양한 유화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기 오른쪽 벽은 우리 화실 수강생들이 그린 거고, 왼쪽 벽에 있는 건 내가 그린 것들이야. 난 주로 추상화를 그려. 하준이도 영화에서 거의 추상화를 그릴 거라고 하던데, 맞지?”
“네, 맞아요.”
“참, 근데 너 추상화라는 게 뭔지 아니?”
문득 안 작가는 자기가 초등학교 3학년생에게 너무 어려운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 먼저 물어보았다.
당연히 모른다고 하면 설명해줄 요량으로 물은 것인데, 하준은 뜻밖에 자신 있게 답했다.
“네, 찾아봤어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가시적 형상을 모방해서 재현하는 방식을 벗어나 점, 선, 면, 색채의 순수조형 요소로 구성한 그림’이라고 나와 있던데요?”
하준의 말에 안 작가는 깜짝 놀라며 휴대폰을 꺼내 ‘추상화’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았다.
“하준아, 다시 한번 말해볼래? 추상화의 정의?”
“가시적 형상을 모방해서 재현하는 방식을 벗어나 점, 선, 면, 색채의 순수조형 요소로 구성한 그림이요.”
“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말하네!”
안 작가가 경악하며 정 감독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정 감독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준이는 원래 암기력이 엄청 뛰어나. 대본 통으로 외우는 걸로 유명하지. 하하.”
“와, 이렇게 어려운 단어들로 된 문장도 잘 외우네요. 역시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봐요. 허허.”
“하준이가 좀 특별한 케이스긴 해. 나도 저런 애는 처음 봤거든. 내가 왜 <영재>에 하준이를 캐스팅했는지 알겠지?”
“네, <영재>에 딱 어울리는 영재네요, 영재.”
“혹은 천재일 수도 있고.”
“이게 무슨 뜻인지까지 알면 천재 맞을 것 같은데, 하준아, 방금 말한 거 풀어서 설명해볼래?”
안 작가가 은근히 기대하며 하준에게 물었다.
“음, 눈에 보이는 물체들을 그대로 똑같이 그리는 게 아니라 점, 선, 면, 색 등으로 느낌이나 감상을 표현해내는 것, 그게 제가 이해한 추상화인데요······ 아닌가요?”
하준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러자 안 작가는 박수를 치며 하준을 칭찬했다.
“맞아! 바로 그거야. 와, 이해력도 엄청 좋네. 우리 하준이 공부 진짜 잘하겠다. 그치?”
“재밌게 하고 있어요. 3학년 되니까, 다양한 거 많이 배우거든요.”
하준이 빙긋 웃었다.
하준은 요즘 학교 다니는 것도 무척 재밌었다.
친구들과 노는 것도 재밌지만, 3학년이 되니까 배우는 과목도 많이 늘어나서 학교에서 다양한 걸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정 감독이 불쑥 끼어들더니 자기 딸 3학년 때 일이 생생하다며 하소연을 쏟아냈다.
“역시 하준이는 다르네. 우리 딸은 지금 5학년인데, 3학년 때가 아직도 생각나. 2학년 때는 그래도 과목이 적었는데, 3학년 되니까 무슨 배우는 게 그렇게 많냐······ 국영수사과가 이때부터 나온다니까! 거기다 체육, 음악, 미술까지 하면 진짜 환장해. 그거 우리 와이프랑 같이 공부시키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직도 내가 기억이 선하다, 선해.”
“와, 3학년 때부터 그걸 다 한다고요?”
안 작가는 미혼이라 초등학생들의 교과과정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다니까! 하준아, 3학년 때부터 시험도 막 보지? 그치?”
정 감독이 하준에게 맞는지 확인했다.
“네, 맞아요.”
“하준이는 시험 잘 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비종> 촬영도 병행했잖아. 공부할 시간도 없는 거 아니야?”
“공부는 틈틈이 해서 괜찮게 봤어요.”
하준은 사실 시험을 봤다 하면 올백이었다.
하준은 책을 한 번만 봐도 모두 기억했고, 수업시간에 한 번만 잘 들으면 수업내용을 다 기억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올백입니다’ 할 수는 없어서 에둘러 대답한 것이다.
그런데, 하준의 대답을 들은 안 작가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준이 올백이구나?”
“네? 어······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하준은 안 작가가 자신의 점수를 꿰뚫어 본 것이 신기해서 순순히 인정해버렸다.
“내 자랑은 아니지만, 나도 학창시절에 다 맞거나 올수 맞으면 그렇게 얼버무렸거든.”
안 작가는 국내 최고 대학인 한국대 서양화과 출신이었다. 그러니 그림도 잘 그리지만 공부도 잘했던 것이다.
그러자 정 감독이 투덜거리며 탄식했다.
“하아, 천재들 사이에 끼어 있기 민망하네.”
“에이, 누가 들으면 감독님은 천재 아닌 줄 알겠어요.”
“난 천재 아니야. 공부도 잘 못했고.”
“아이고, 그럼 더더욱 천재시네요. 공부는 못하셨는데, 영화는 이렇게 기가 막히게 잘 만드시니까요. 흥행에 작품성까지 인정받으신 분이 천재가 아니면 뭡니까?”
“흐음, 남들이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 나 스스로는 아직 만족을 못해서······.”
정 감독은 아직 자기 작품에 100% 만족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영화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번 <영재>를 감독님이 정말 만족하는 영화로 만드시면 되겠네요. 하준이가 잘해줄 거예요.”
“하준이보다 내가 잘해야지. 그래도 우리 하준이가 있으니까 확실히 든든해.”
정 감독은 신뢰의 눈빛으로 하준을 쳐다보았고, 그 눈빛의 의미를 느낀 하준은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 이거 추상화 얘기하다가 옆길로 샜네. 하하. 이제 기본적인 재료들 설명부터 해줄게.”
안 작가는 하준에게 앞치마를 둘러주고 유화 붓과 캔버스, 젯소, 팔레트, 물감, 물감을 묽게 하는 미디엄 등을 보여주며 사용법을 간단히 말로 설명해주었다.
“자, 필요한 재료 설명은 다 된 것 같고, 이제 그림 그려보자. 근데 그림을 그리기 전에 캔버스의 면을 고르게 하기 위해서 젯소를 먼저 발라야 돼. 그래야 물감이 잘 먹거든.”
“아하.”
하준은 안 작가의 옆에 앉아 젯소 바르는 걸 구경했다.
“젯소는 어차피 내가 발라서 준비해 줄 거라서 극중에서 바를 일은 없을 거야. 그래도 알고는 있어야 되니까 보여주는 거고. 자, 이제 여기 젯소 미리 발라 놓은 캔버스 있으니까, 여기에 붓질 연습부터 해 보자.”
안 작가는 자기 바로 옆 이젤 앞에 하준을 앉히고 캔버스 6호와 유화도구들을 세팅해주었다.
하준은 안 작가를 따라 물감 섞기, 붓질 연습 등 기본적인 것들을 배웠다.
“잘 따라 하네. 이 정도면 됐어. 이제 진짜 그림 그려보자.”
안 작가는 새로운 캔버스를 가져와 하준의 이젤에 놓아주었다.
“뭘 그릴까요?”
빨리 유화를 그려보고 싶은 하준이 먼저 물었다.
“음, 여기 이 과일 바구니를 봐.”
이젤 옆 테이블에는 사과, 바나나, 포도 등이 가득 담긴 과일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과일 바구니 보고 그리면 돼요?”
“아니, 과일 바구니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추상으로 그려봐.”
“오······! 재밌겠어요!”
하준은 주제에 흥미를 보이며 당장 붓을 들었다.
하준의 반응에 안 작가는 잠깐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런 주제를 주면 고민하거나 난감해할 텐데, 하준은 전혀 그렇지 않아서 굉장히 비범해 보였던 것이다.
“그럼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마음대로 한 번 그려봐.”
“네!”
하준은 신나 하며 붓질을 하기 시작했고, 안 작가는 정 감독의 옆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속닥였다.
“감독님, 왠지 기대되는데요.”
“그래? 난 추상화는 봐도 몰라서······. 안 작가가 하준이 작품이 어떤지 잘 봐줘.”
정 감독은 추상화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주관적이라고 생각했기에 자기는 봐도 모를 거라고 예상했다.
극중 영재가 추상화를 그린다고 설정한 것 자체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일반 사람들은 난해해 보일 수도 있는 그림이, 전문가들에게는 훌륭하다고 평가받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정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추상화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거의 안 작가에게 맡기기로 했다.
극중 하준의 작품으로 등장할 그림들도 안 작가가 맡기로 했고 말이다.
“근데 확실히 이젤 놓고 저렇게 그림 그리고 있으니까 분위기 엄청 좋다.”
정 감독은 양손 엄지와 검지를 직각으로 세워 네모난 프레임처럼 만들더니 팔을 쭉 뻗어 그 안에 하준이 위치하게 했다.
영화에 담기면 어떤 느낌일까, 간이 프레임으로 장면들을 구성해보는 것이다.
정 감독은 하준의 그림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며 화면 구성을 구상했고, 반면 안 작가는 하준의 캔버스에 시선을 고정하고 하준의 그림 자체를 유심히 관찰했다.
잠시 후, 열심히 그림을 그리던 하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 그렸어요.”
“그래? 어디 보자!”
안 작가와 정 감독은 후다닥 하준에게 달려갔다.
“아, 아니?! 하준아, 너 어떻게 이런 색감을······!”
“와······ 내가 그냥 보기에도 너무 멋있는데?”
하준의 캔버스를 본 안 작가와 정 감독은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하준의 캔버스에는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타원형의 붓질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 색감이 파스텔톤으로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그 위로 불규칙하면서도 규칙적인 색의 덩어리들이 캔버스의 가운데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준아, 이거 어떤 감정을 표현한 거야? 얼른 설명 좀 해줘 봐.”
“과일 바구니가 가득한 걸 보면 마음이 든든하고 풍요롭고 행복하잖아요? 그걸 표현한 거예요. 사실 둥근 캔버스에 그리면 좋았을 것 같은데, 캔버스가 사각형이라서 아예 원형 배경을 넣었어요. ‘원’이라는 것 자체가 가득하고 꽉 찬 느낌이잖아요. 그리고······.”
하준은 조잘조잘 자신의 의도를 설명했다.
이에 안 작가와 정 감독의 아까 벌어진 입이 점점 더 크게 벌어졌다.
하준의 설명이 끝나자, 안 작가가 갑자기 뒷목을 잡으며 말을 더듬었다.
“와, 하아, 감독님, 이거, 진짜······.”
“안 작가, 이거 진짜 잘 그린 거지? 아니, 뭔가 엄청난 거지?”
정 감독이 흥분해서 물었다.
정 감독이 보기에도 하준의 작품은 그야말로 하나의 작품 같았던 것이다.
“하준이는 정말······ 천재인가 봐요!! 어떻게 이런 색감과 표현을······! 물론 붓질과 이런 게 서툰 느낌이 좀 나지만, 그것대로 너무 좋아요. 말이 안 나오네요, 정말.”
안 작가의 말에 정 감독은 하늘로 어퍼컷을 날리며 기뻐했다.
“좋았어! 진짜 영재 이야기가 되겠구만! 영화에 하준이 그림 그대로 써도 될 것 같지? 그치?”
“네, 제가 그려드리는 것보다 하준이가 직접 그리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아요. 정말 잘됐네요!”
안 작가는 정 감독의 고민을 알고 있던 터라 축하의 말을 건넸다.
사실 정 감독은 극중 영재의 그림을 안 작가의 작품으로 하기로 했지만, 안 작가는 어른이라 아이의 감성이 자연스럽게 묻어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었다.
그래도 다른 대안은 없는지라 안 작가에게 부탁을 해둔 것인데, 하준이 진짜 그림 영재처럼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니 걱정이 사라진 것이다.
“아하하. 하준아, 너무 잘했다, 잘했어! 아이고, 이뻐라.”
정 감독은 하준을 번쩍 안고 빙그르르 돌렸다.
하준은 영문도 모르고 정 감독에게 안겨 비행기를 탔지만, 어쨌든 정 감독이 좋아하니 자기도 기분이 좋았다.
안 작가는 흐뭇하게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 마디 조언했다.
“근데 이 그림은 맨 처음에 영재가 그리는 난해한 그림으로는 쓸 수 없을 것 같아요. 일반 사람들이 봐도 색감만으로도 좋아 보이잖아요.”
“그래, 그래. 막눈인 내가 봐도 멋있어. 난해한 그림은 촬영 현장에서 하준이한테 낙서하라고 하지, 뭐. 하하.”
정 감독은 이제 걱정이 하나도 없어졌다며 연신 웃었고, 만족스럽게 돌아갔다.
그러나 하준은 그림을 더 그리고 싶다며 안 작가의 화실에 남아있었다.
안 작가도 그런 하준이 예쁘고 기특했다.
“하준아, 하준이는 여기 언제든지 놀러 와서 그림 그려. 유화는 집에서 못 그리잖니. 선생님은 거의 여기 살다시피 해서 아무 때나 와도 돼.”
“정말요? 감사합니다!”
유화의 매력에 푹 빠진 하준은 기뻐하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하준이 신나게 다음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하준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월드 엔터의 최 대표였다.
하준은 안 작가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구석진 곳으로 와서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준아, 아직 화실이니?
“네, 그림 그리는 중이에요.”
-아, 그래? 그럼 전화로 물어볼게. 너 <비긴버스킹>이라는 프로그램 본 적 있어?
“네, 그거 해외에서 버스킹하는 거잖아요. 길거리에서 노래하는······. 근데 그건 왜요?”
하준이 의아해하며 되묻자, 최 대표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아는구나! 그거 섭외가 들어왔어. 네 캠핑장 버스킹 영상을 보셨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