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100화
“엄마, 아빠, 빨리빨리!”
첫 여행에 신이 난 하준이 가장 먼저 준비를 마치고 문 앞에서 최선희와 윤기철을 재촉했다.
“알았어, 알았어. 어? 하준아, 근데 기타 가져가게?”
최선희가 하준의 등에 멘 기타를 보고 물었다.
“응, 여행 가면 노래도 부르고 그래야지! 영화 같은 데서 보면 놀러 가서 모닥불 피워놓고 노래하고 그러잖아.”
“호호, 그래, 하준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가져가.”
최선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문 앞에 가져다 둔 짐들을 둘러보며 마지막 확인을 했다.
“구급상자, 짐 가방 하나, 둘, 셋······ 다 챙겼나? 뭔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 윤기철이 안방에서 옷을 걸치고 나오다가 냉장고 앞에 놓인 아이스박스를 발견했다.
“여보, 이 아이스박스는 안 가져가는 거야?”
“어머, 맞다! 가서 굶을 뻔했네! 어쩐지 뭔가 허전한 것 같더라니. 그거 가져와. 자, 이제 가자!”
최선희는 마지막으로 집 전체 소등 버튼과 가스 차단 버튼을 누른 후 짐을 들었다.
윤기철 역시 남은 짐과 아이스박스를 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차장에는 캠핑카가 대기 중이었는데, 하준은 커다란 캠핑카를 보더니 기뻐서 방방 뛰었다.
“우와, 우와! 아빠, 안에 구경해도 돼?”
“캠핑장 가서 구경하자. 차 막히기 전에 빨리 출발해야 하거든.”
“아······ 응! 알겠어.”
하준은 캠핑카의 뒷칸이 궁금했지만, 조금만 참기로 하고 앞좌석에 탔다.
윤기철과 최선희는 짐을 실은 뒤 곧바로 출발했다.
“안전벨트 다들 잘 메고. 그럼 출발합니다!”
“네! 출발!”
“가자, 레츠 고!”
윤기철은 가평의 한 캠핑장으로 차를 몰았다.
이번 캠핑 계획은 거의 다 윤기철이 준비한 거라 최선희 역시 기대가 컸다.
“여보, 거기 계곡 있댔지?”
“응, 넓은 계곡도 캠핑장 바로 근처에 있고, 주변으로 단풍도 진짜 이쁘게 드는 곳이래. 나만 믿어. 내가 우리 조감독한테 물어서 단풍 여행으로 가장 좋은 곳 찾은 거니까.”
이번에 영화를 함께 찍게 된 조감독은 과거에 영화에서 장소 섭외를 담당하는 로케이션 담당자 일을 했던 사람이라 국내 아름다운 명소를 많이 알고 있었다.
“와, 진짜 기대된다. 그치, 하준아?”
“응! 너무너무너무 기대 돼! 근데 할머니도 같이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준이 문득 할머니를 떠올리고 아쉬워했다.
“할머니는 캠핑은 힘드셔서 못 가신대. 나중에 호텔 숙소 잡으면 그때 같이 가신다니까, 다음에는 좋은 호텔 잡아서 놀러 가자?”
“응, 아! 그럼 사진 많이 찍어서 보여드릴까?”
“그래, 그것도 좋지.”
윤기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하준 가족의 캠핑카는 고속도로로 진입했고, 가평으로 가는 고속도로 양옆으로 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벌써 여기부터 산들은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들어서 가을 여행을 실감 나게 했다.
“와, 하준아, 저기 산 봐!”
“와, 가는 길도 예쁘다! 가을 언덕에~ 캠핑카 타고~”
하준은 오색빛깔 산들을 보더니 ‘여행을 떠나요’를 개사해서 부르기 시작했다.
최선희는 옆에서 박수로 박자를 맞춰주며 즐거워했다.
“잘한다, 우리 아들! 호호.”
윤기철도 콧노래로 하준의 노래를 따라부르며 즐겁게 운전을 했다.
잠시 후, 하준 가족은 캠핑장에 도착했다.
“우와아······! 산 너무 예쁘다!”
하준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주변의 산을 둘러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캠핑장 앞에 펼쳐진 계곡과 그 뒤로 보이는 알록달록한 가을 산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아까 고속도로에서 본 먼 산들도 예뻤지만, 확실히 가까이서 보는 게 색상도 선명하고 좋았다.
최선희도 잠시 황홀한 표정으로 가을 산을 만끽하며 서 있었고, 윤기철은 자신의 장소 선정에 뿌듯해하며 풍경을 감상했다.
최선희는 말없이 풍경을 눈에 담다가 갑자기 윤기철을 와락 껴안았다.
“여보! 장소 너무 잘 정했다! 백점이야, 백점!”
그러자 하준도 최선희를 따라 윤기철을 안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맞아! 우리 아빠 최고!”
가족들에게 인정받은 윤기철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 다들 좋아하니 나도 너무 좋네! 자, 그럼 아빠는 여기 어닝 칠 테니까, 하준이랑 당신은 차 안에 구경하고 있어. 캠핑카 내부도 기똥차니까.”
윤기철이 자신 있게 캠핑카 옆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그러자 하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똥차? 똥차라니?”
“아니, 아니, 똥차 아니고, 기가 막히다고. 하하.”
윤기철이 예상치 못한 하준의 말에 웃으며 정정했다.
“아하! 우와아!!”
하준은 차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또 한 번 감탄의 환호성을 질렀다.
최선희도 깜짝 놀라 입을 가렸다.
“엄마, 여기 화장실도 있어! 이쪽에는 싱크대도 있고! TV랑 냉장고도 있네. 있을 거 다 있는데도 엄청 넓다!”
내부는 고급스러운 베이지색 톤으로 꾸며져 있었고, 작은 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없는 게 없었다.
“정말 너무 좋네! 와, 이런 차 있으면 맨날 놀러 가고 싶겠어.”
“근데, 자는 데가 없네? 잘 때는 여기 의자에 이렇게 누워서 자야 되나?”
하준이 테이블 주변으로 세팅된 긴 의자에 눕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그러자 창문 밖에서 하준의 궁금증을 들은 윤기철이 들어와 직접 테이블을 내리고 그 위에 매트를 끼워, 넓은 침상을 만들어 보여주었다.
“짜잔! 어때? 우리 셋이 충분히 자겠지?”
“우와, 변신 침대네! 변신 침대!”
하준은 처음 보는 변신 침대를 신기해하며 얼른 신발을 벗고 매트 위에 올라가 벌러덩 누워 보았다.
“와, 엄마! 엄마도 누워봐. 창밖으로 하늘 봐봐. 진짜 좋다······.”
“정말?”
최선희도 하준의 옆에 누워 보더니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좋다, 정말. 바람도 솔솔 불고, 풀냄새도 좋아. 밤에는 별도 보이겠다. 그래, 이게 바로 힐링이지!”
“둘이 일단 누워있어. 내가 어닝 치고 밖에 테이블 세팅까지 해 놓을 테니까.”
“그럼 여기 테이블은 안 써? 그냥 이렇게 둬도 되는 거야?”
“응, 밖에 비 올 때나 안에서 먹지, 이런 데 와서는 야외에서 먹는 게 좋잖아.”
윤기철은 후다닥 어닝을 치고 테이블 세팅까지 마쳤다.
“자, 세팅은 다 됐으니까 우리 계곡에 물놀이나 갈까?”
“응! 갈래!”
윤기철의 제안에 하준은 바로 벌떡 일어나 계곡으로 달려가려 했다.
“하준아, 잠깐만! 배우가 얼굴 타면 안 돼. 선크림 바르자. 당신도 감독이 얼굴 타면 안 되지. 이리 와 앉아.”
“네!”
“네!”
최선희의 말에 하준과 윤기철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그녀의 앞에 눈을 감고 앉았다.
최선희는 두 사람의 얼굴과 목, 팔에도 선크림을 꼼꼼히 발라주었고, 마지막으로 자기도 바른 후 계곡으로 향했다.
계곡에서 구명조끼를 대여해 착용한 세 사람은 신나게 물놀이를 즐겼다.
한 한 시간 정도 놀았을까.
최선희는 기진맥진해서 휴식을 선언했다.
“헉헉. 엄마는 더 못 놀겠어. 가서 카페인을 공급해 줘야 돼. 하준아, 넌 안 힘드니?”
“응, 난 더 놀 수 있어. 아빠, 아빠는 힘들어?”
하준의 물음에 윤기철은 좀 더 놀 수 있다고 답했고, 최선희만 물 밖으로 나갔다.
“그럼 두 사람은 좀 더 놀아. 난 좀 쉬었다가 점심 만들어서 부를게.”
하준과 윤기철은 계곡에서 공을 던지며 계속해서 놀았다.
그러던 중 한 미니 튜브 보트를 탄 여자아이가 하준 쪽으로 오고 있는 걸 발견했다.
여자아이는 열심히 양손으로 노를 저으며 다가왔다.
하준은 여자아이의 진로를 방해할까 봐 슬쩍 옆으로 피해주었고, 여자아이의 보트는 하준을 지나쳐가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아이가 몸을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 순간, 튜브 보트가 휙 뒤집히며 여자아이는 물에 빠지고 말았다.
“어어?!”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하준은 얼른 여자아이에게로 헤엄쳐 갔고, 윤기철도 빠르게 그쪽으로 이동했다.
“어푸, 어푸!”
하준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여자아이를 끌어안았다.
여자아이는 정신이 없는지 하준에게 안겨서도 몇 번 더 허우적댔는데, 다행히 윤기철까지 합세해 여자아이를 무사히 구출할 수 있었다.
“괜찮아?”
하준이 물 밖으로 나와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여자아이는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대답 대신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앙······.”
“놀랐구나. 울지 마. 괜찮아.”
하준이 여자아이를 다독이며 달랬고, 윤기철은 아이의 부모가 어딨는지 찾느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저 멀리 허둥대며 계곡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부부가 보였다.
“지예야! 한지예!”
윤기철은 이름을 듣고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한지예니?”
여자아이는 훌쩍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예의 대답을 듣자마자 윤기철은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여기요! 지예 여기 있어요!”
윤기철의 외침을 들은 한지예의 부모님은 곧장 윤기철에게로 달려왔다.
“어머, 너 왜 여깄니!”
“어떻게 된 겁니까?”
한지예의 부모가 윤기철에게 물었다.
그러자 윤기철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한지예의 부모는 고맙고 미안해했다.
“아휴, 얘가 아까부터 저쪽에 하준 오빠 온 것 같다고 가보자고 그러더니 기어이 잠깐 먹을 거 가지러 간 사이에 거기까지 갔나 봐요.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하준아, 우리 딸 구해줘서 고맙다. 근데 진짜 하준이가 맞았네······.”
“아, 전 저한테 오는 건 줄 몰랐어요. 알았으면 안 피했을 텐데······.”
하준이 조금 미안해하며 말했다.
한지예는 사실 하준인지 확인하려고 다가왔던 건데 하준이 피해서 지나쳐가게 되자, 다시 하준 쪽으로 돌아오려다가 보트가 뒤집힌 것이었다.
“모를 수 있지. 괜찮아. 야, 한지예, 너 이리 안 와?”
한지예의 엄마는 조금 화가 난 목소리로 한지예를 불렀다.
한지예는 엄마한테 혼날까 봐 하준의 뒤에 숨어 있었다.
한지예는 이제 좀 진정이 되었는지 입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내가 하준 오빠 맞다니까······.”
“으이구, 그래 네 말이 맞다! 근데 그렇다고 이렇게 위험하게 혼자 막 가면 어떡해?”
“엄마가 못 가게 했잖아. 그러니까 그렇지.”
“너 이거 민폐야. 얼른 이리 와.”
한지예의 엄마는 한지예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 ‘감사합니다’ 해. 죄송하다고도 하고.”
“감사합니다. 죄송해요. 고마워, 하준 오빠.”
한지예는 하준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물에 빠지고, 튜브 보트까지 잃어버렸는데도 하준을 만나서 그런지 무척 기쁜 표정이었다.
“응, 조심해서 놀아. 안녕!”
하준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한지예 가족이 돌아간 후, 윤기철과 하준은 배가 고파 캠핑카로 돌아왔다.
최선희는 점심으로 부대찌개를 준비해 두었고, 하준과 윤기철은 뜨끈한 국물로 몸을 녹였다.
“엄마, 바비큐는 이따가 저녁에 먹는 거야?”
밥을 먹던 하준이 바비큐가 기대되는지 최선희에게 물었다.
그러자, 윤기철이 대신 대답했다.
“응, 바비큐는 아빠 담당이야. 여기 숯이랑 바비큐 그릴 빌려준대. 거기다 구워 먹으면 돼.”
“아하. 아빠, 이따가 맛있게 구워 줘야 돼.”
“그럼! 아빠 바비큐 전문가야. 아빠만 믿어.”
윤기철이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점심 식사 후, 세 사람은 주변 산길을 걸으며 사진도 찍고 나무와 꽃들을 구경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후딱 지나 저녁 시간이 되었다.
윤기철은 준비해온 돼지고기, 소고기, 새우, 야채 꼬치 등을 숯불에 굽기 시작했다.
하준과 최선희는 잔뜩 기대를 하며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하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차에서 기타를 들고 나왔다.
“아빠, 심심하지? 내가 노래 불러줄까?”
“오, 그럼 좋지!”
최선희도 박수로 환영했다.
하준은 주변에 너무 시끄럽지 않도록 잔잔한 노래를 골랐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 곳으로 가네~”
하지만 하준의 아름다운 노래는 캠핑장의 사람들의 귀를 절로 기울이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하준이 1절을 부르는 동안 하준의 캠핑카 주변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하준의 노래가 끝나자 주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