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95화
“쟤네는 왜 저렇게 서로 가르쳐 주겠다고 난리래? 가르치는 거 얼마나 귀찮은데.”
공정환은 김유나와 서희수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러게.”
하준 역시 둘 다 자길 가르쳐주려는 것에 과도하게 열정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의 스케이팅을 구경했다.
처음에 두 사람은 스피드를 겨루는 듯했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링크를 돌았는데, 그러다 어느 순간 서희수가 더 빠르게 치고 나갔다.
“오, 서희수, 진짜 잘 타네! 엄청 빨라!”
공정환이 감탄해서 서희수에게 소리쳤다.
하준은 서희수의 스케이트를 유심히 지켜보며 의자에 앉은 채로 발동작을 따라 해보고 있었다.
서희수는 의기양양하게 계속해서 스피드를 냈는데, 어느 순간 김유나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희수가 의아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김유나가 아이스링크 한가운데에서 스핀을 돌고 있었다.
유연하게 상체를 뒤로 젖힌 채, 무척 우아하게.
하준과 공정환의 시선은 역시 김유나에게 향해 있었다.
“우와, 장난 아니다! 저거 엄청 어려운 거 아냐?”
공정환이 호들갑을 떨며 박수를 쳤다.
하준도 실제로는 처음 보는 스핀에 놀라워하며 맞장구를 쳤다.
“스케이트 그냥 타는 것도 어려울 텐데, 스핀까지 돌다니 대단하다.”
“스핀도 그냥 도는 게 아니라 무슨 꽃이 피는 것처럼 돌아. 예쁘다!”
서희수는 자기도 뭔가를 보여줘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스핀은 무서웠다.
서희수는 뾰로통한 얼굴로 김유나의 옆을 지나쳐 오면서 말했다.
“하준이가 피겨 스케이팅을 할 것도 아닌데, 스핀은 왜 돈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 하준이 스핀을 돌 일은 없었으니까.
서희수는 그대로 김유나를 지나쳐 하준과 공정환에게 왔다.
“자, 이제 같이 타자. 내가 가르쳐 줄게.”
하준과 공정환은 일단 아이스링크로 들어갔다.
공정환은 뒤뚱거리며 조심조심 움직이기 시작했고, 하준은 일단 입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서희수는 하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손 잡아.”
“응.”
하준이 서희수의 손을 잡자마자, 김유나가 쏜살같이 달려와 하준의 다른 손을 잡았다.
“내 손도 잡아.”
“어어.”
하준은 결국 양손을 서희수와 김유나에게 빼앗긴 채로 그들에게 이끌려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발을 이렇게 반원을 그리듯이 움직이고······.”
“무릎은 이렇게 모아야 돼.”
서희수와 김유나는 각자 자기가 아는 방식을 하준에게 설명하며 그를 끌고 갔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최선희와 윤기철은 웃음이 났다.
“아휴, 쟤들 좀 봐. 귀여워.”
“우리 하준이 벌써 저렇게 인기가 많아서 어째. 하하.”
“그러게. 벌써 난감해하는 것 같은데, 우리가 가서 정리를 좀 해줘야 할까?”
“어떻게 정리하게? 어느 편을 들 수도 없잖아.”
“그건 그렇네······. 하준이가 알아서 정리할 수 있겠지?”
“응, 우리 아들을 믿어 보자구. 근데 쟤들 보니까 우리 데이트할 때 생각나지 않아?”
“호호, 맞아. 당신이 나랑 손잡고 싶어서 여기 데려왔잖아.”
“엇, 그거 알고 있었어?”
“그럼. 스케이트 가르쳐 준다는 핑계로 내 손 잡았잖아.”
“아하하. 그, 그랬었지.”
윤기철이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최선희가 씽긋 웃더니 조용히 윤기철의 귓가에 속닥였다.
“근데, 나 스케이트 원래 탈 줄 알았다? 호호호.”
“뭐? 진짜? 나랑 데이트할 때 처음 타본다고 했잖아?”
윤기철이 화들짝 놀라서 물었다.
“당신이 내 손 잡고 싶어서 데려왔다는 걸 아는데 내가 장단 맞춰줘야지. 그래서 못 타는 척해준 거야.”
최선희가 새침한 표정으로 윤기철에게 윙크했다.
“와, 당신 완전 여우였네, 여우. 나 완전 깜빡 속았네!”
“늑대인 당신 만나려면 나도 여우가 돼야지, 안 그래?”
“아하하. 그래, 그래. 귀엽네, 우리 선희.”
“호호, 당신도 그때 귀여웠어.”
두 사람은 추억을 상기하며 웃었다.
그러다 혼자 열심히 뒤뚱거리고 있는 공정환에게로 향했다.
“정환아, 아줌마, 아저씨가 좀 가르쳐 줄까?”
“네, 좀 잡아주시면······ 으엇!”
겨우 중심을 잡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던 공정환이 윤기철과 최선희를 보니 긴장이 풀어졌는지,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 했다.
윤기철은 얼른 공정환을 잡아주었고, 공정환은 윤기철에게 안기다시피 한 채로 안도하며 웃었다.
“으아, 하하. 감사합니다!”
“자, 아저씨 따라 해 봐. 발을 이렇게······.”
한편, 하준은 우 서희수, 좌 김유나인 상태로 아이스링크를 누비고 있었다.
“오, 하준아, 너 좀 탄다?”
“너 균형 감각 되게 좋다! 안정적이야.”
서희수와 김유나가 감탄하며 하준을 칭찬했다.
뭐든 금방 습득하는 하준은 서희수와 김유나의 발동작을 보면서 잘 따라 하고 있었다.
“정말? 너희들이 잘 가르쳐줘서 그런가 봐.”
하준이 공을 서희수와 김유나에게 돌리자, 두 사람은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하지만 하준이 금방 습득하는 건 두 사람에게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준이 이제 혼자 타보겠다고 두 사람에게 손을 놔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 혼자 탈 수 있을 것 같은데, 손 잠깐 놔줄래? 한번 타볼게.”
“어? 어······.”
“그, 그래.”
김유나와 서희수는 아쉬워하며 하준의 손을 놓아주었다.
하준은 심호흡을 한 뒤, 힘차게 오른발을 앞으로 박차며 출발했다.
슥슥-
하준은 물 흐르듯이 얼음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전혀 뒤뚱거리지도, 머뭇거리지도 않고 원래 능숙했던 것처럼 말이다.
“헐······.”
“우와······!”
서희수는 황당해했고, 김유나는 또 한 번 반했다.
“얘들아, 나 이제 감 잡았어. 이리 와! 같이 타고 놀자!”
하준의 외침에 서희수와 김유나는 곧장 하준에게 달려갔다.
“하준아, 너 진짜 스케이트 처음 타보는 거 맞아?”
“응, 맞아. 너희들이 잘 가르쳐 줘서 빨리 배웠나 봐. 고마워.”
서희수는 고맙다는 사람한테 뭐라 더 할 말이 없었다.
“와, 하준아, 넌 정말 뭐든 잘하는구나. 운동 신경도 뛰어난가 봐. 역시 최고야!”
이미 콩깍지가 제대로 쓰인 김유나는 눈에서 하트를 쏘며 하준을 칭찬하기 바빴다.
“고마워, 아, 우리 이제 같이 놀자. 정환아! 이리 와!”
하준은 공정환까지 불러 모아 같이 ‘얼음땡’ 놀이도 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얼마 후, 하준은 세계제과의 ‘리얼망고빙수’ 광고 촬영을 위해 다시 세계랜드의 아이스링크장을 찾았다.
이번에도 역시 사람들이 없을 때 촬영을 해야 해서 이른 아침에 아이스링크장에 도착했다.
“하준아! 반갑다!”
“하준아, 안녕!”
오늘 광고를 찍어줄 박 감독과 세계제과 마케팅 팀장인 강 팀장이 하준을 보자마자 반갑게 달려왔다.
촬영 준비 중이던 스태프들도 하준을 보고는 다들 몰려왔다.
하준은 이제 아역 배우들 중에서 탑이었기에 스태프들은 하준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무척 기뻐했다.
“하준아, 안녕!”
“너무 귀엽다! 반가워.”
“이따가 사인 하나만 해줄래?”
“사진도 좀······.”
스태프들은 미리 하준에게 사인과 사진을 예약하기까지 했다.
“네, 이따가 촬영 끝나고 다 해드리고 갈게요.”
하준은 사인과 사진 촬영이 귀찮지 않았다. 다 자기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니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아, 하준아, 스케이팅 연습은 많이 했니?”
강 팀장이 다정하게 물었다.
“네, 안 넘어지고 탈 수 있어요.”
“오, 그래. 귀한 하준이가 혹시라도 다치면 큰일이지! 넘어지지만 않으면 돼. 오늘 같이 촬영할 친구들이 스케이트 잘 타는 친구들이니까, 잘 못할 것 같은 장면은 그 친구들이 대신해줄 수 있거든. 아, 저기 오네.”
강 팀장은 하준에게 오늘 함께 촬영할 친구들 2명을 소개해주었다.
“김재민, 이하연. 둘 다 피겨 하는 애들이야. 다 10살 동갑이니까 인사해.”
하준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김재민과 이하연은 하준의 바로 앞까지 가까이 달려와 외쳤다.
“우와아, 너 실제로 보니까 진짜 잘생겼다! <신비종>에서 대박 멋있더라. 대금으로 악당들 후려치는 거 짱이었어!”
“진짜 멋있어······. 난 대금 불 때가 더 멋있었어. 오늘 촬영 너랑 같이 한대서 나도 하겠다고 했어.”
둘은 <신비종>의 팬이자, 하준의 팬이었다.
하준은 배우를 한 뒤로 친구들이 먼저 알아보고 친근하게 다가와주니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도 어색하지 않아 좋았다.
“고마워, 오늘 잘 부탁해.”
“그럼, 그럼!”
“우리도 잘 부탁해.”
잠시 후, 빙판에서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셋이 서로 잡으러 다니고 자연스럽게 놀면 돼.”
박 감독은 스케이트를 타면서 노는 장면을 요구했다.
오늘 찍는 내용이, 아이들이 스케이트를 타며 신나게 논 후 시원한 걸 찾을 때 ‘리얼망고빙수’를 주고 맛있게 먹는다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셋은 빙판에서 가위바위보를 하고, 서로를 잡으러 다니고, 서로의 스케이팅 방법을 따라하기도 했다.
그런데 세 사람을 자세히 보고 있던 박 감독이 갑자기 그들을 불렀다.
그리고 하준에게 말했다.
“하준아, 너 스케이트 되게 잘 타네! 이렇게 잘 타는 줄 몰랐어. 혼자서도 잘 탈 수 있지?”
“네? 네. 잘 탈 수 있긴 한데요······.”
“그럼 일단 한번 타 봐. 아까처럼 뒤로도 타고, 내가 ‘피겨 선수다’ 이렇게 생각하고. 아, 빨리 탈 필요는 없고 최대한 우아하게 타보자.”
하준은 이번엔 혼자 아이스링크에서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
하준은 박 감독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우아한 음악을 떠올리며 그에 맞춰 몸을 움직여보려고 했다.
속으로 클래식 음악을 흥얼거리며 아까 김재민과 이하연이 하던 동작들을 따라해보기도 하고 팔도 율동을 하듯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카메라는 하준을 따라 움직이며 그의 몸짓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하준의 모습을 구경하던 스태프들은 하준이 피겨스케이터 뺨치게 멋진 모습으로 스케이트를 타자, 무척 놀랐다.
박 감독 역시 예상대로 하준이 너무 우아하게 스케이트를 잘 타자 감탄하며 하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옆에 있던 강 팀장과 서로 심각하게 대화를 나눴다.
하준이 아이스링크를 두 바퀴 정도 돌고 나자, 박 감독이 하준을 다시 불렀다.
“하준아, 정말 멋지구나! 음, 그래서 말인데, 혹시 다른 날 시간 다시 비울 수 있니? 매니저님! 여기 잠시만 와 주세요.”
박 감독은 하준의 매니저인 김유택까지 불러서 하준의 스케줄을 물었다.
“음, 사실 2주간은 시간이 없긴 한데, 왜 그러시는데요? 오늘 촬영이 다 안 끝날 것 같은가요?”
이 광고 촬영은 어차피 아침에만 할 수 있으니 특별히 스케줄을 빼지 않아도 촬영을 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하준이 아침부터 일을 하는 거라 체력적으로 부담이 된다.
그래서 하준의 체력을 봐서 스케줄을 빼야 할 수도 있었다.
김유택의 물음에 이번엔 옆에 있던 강 팀장이 대답했다.
“아, 하준이가 스케이트를 너무 우아하게 잘 타서, 광고 컨셉을 좀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근데 이게 제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회사 들어가서 회의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며칠 안에 확정 나면 그때 스케줄을 다시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갑자기 이러시면 곤란한데······.”
“오늘 촬영에 대한 비용은 저희가 당연히 지불할 겁니다. 광고에 하준이가 정말 멋있게 나오게 할 테니까, 꼭 좀 부탁드려요.”
강 팀장이 김유택에게 사정했다.
김유택은 하준의 의견이 중요하다고 따로 하준을 불러 물었다.
“하준아, 어떻게 할까? 시간 한 번 더 낼래?”
“네, 이왕 하기로 한 거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다면 그렇게 하는 게 낫죠. 제가 출연하는 광고도 제 작품 중 하나니까, 더 멋지게 나오면 좋잖아요.”
하준은 흔쾌히 승낙했고, 일주일 뒤, 하준은 ‘리얼망고빙수’ 광고를 다시 찍었다.
새로운 컨셉에서 하준은, 보호장비와 헬멧을 쓴 모습이 아니라, 피겨 선수들이 입는 멋진 의상을 입고 촬영에 임했다.
그리고 이 광고는 6월 초에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