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92화
2달 후.
하준이 작업실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데, 최 대표에게 전화가 왔다.
최 대표와 통화를 마친 하준은 곧 작업실을 나오며 최선희에게 말했다.
“엄마, 대표님이 종방연 가기 전에 사무실 들렀다 가래.”
최선희는 거실 창가에 놓인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럼······ 이제 준비해야겠다.”
“엄마 글 쓰던 중 아니었어? 나 유택이 형이랑만 가도 되는데.”
하준은 엄마의 집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이사한 집의 거실 창가에서 집필을 하니 글이 잘 나온다고 했기에 더 그랬다.
하준 가족은 일주일 전, 이 고급 빌라로 이사를 왔다.
이사 온 곳은 방이 4개라서 각각 부부침실, 서재, 하준이 방, 하준이 작업실로 꾸몄다.
또한 거실이 넓고 거실 창밖으로는 산이 보였는데, 최선희는 거실이 너무 좋다며 작업실로 쓰겠다고 했다.
“그래도 밤 스케줄이니까 엄마가 걱정돼서 같이 가고 싶어.”
최선희는 컴퓨터를 끄고는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오늘은 <너와 나의 연결고리>의 마지막화가 방영되는 날이었고, <너나연>의 제작진과 배우들은 마지막화 방송을 함께 시청하고 종방연을 할 예정이었다.
드라마 촬영이야 한 달 전에 끝났지만, 종방연은 방송에 맞춰서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여보! 우리 나가야 돼.”
준비를 마친 최선희는 서재에 있는 윤기철을 부르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윤기철은 창가의 안락한 의자에 반쯤 누워 책을 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벌써?”
“응, 최 대표님이 할 얘기 있다고 들렀다 가라네.”
“아하. 나도 갈까?”
“아니, 나만 갔다 와도 돼. 당신은 계속 책 봐.”
최선희는 흐뭇하게 웃으며 서재를 나왔다.
이사 와서 특히 좋은 점은 하준과 최선희, 윤기철 모두에게 각자의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윤기철은 남자의 로망은 서재라면서 한 방을 서재로 꾸며 이곳에서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구상도 했다.
최선희는 원래 트인 공간을 좋아했고, 자연풍경을 보면 글이 잘 나온다면서 거실에 자기 공간을 꾸몄다.
하준은 방 하나에 아예 방음벽을 설치하고 피아노와 기타 등의 악기들을 놓아 음악 작업실로 만들었다.
“엄마, 작업실 생기니까 너무 좋아. 노래도 연주도 마음껏 할 수 있으니까!”
하준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말했다.
“우리 하준이가 좋다니 엄마도 너무 좋네! 사실 엄마랑 아빠도 너무 좋아. 우리 이사 오길 진짜 잘한 것 같아.”
“맞아, 맞아.”
하준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곧 하준과 최선희는 김유택의 차를 타고 월드 엔터 사무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하준이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최 대표는 하준에게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하준아, 애니메이션 더빙 요청이 들어왔는데, 한번 해 볼래?”
“와, 더빙이요?”
하준이 새로운 장르의 제안에 반가워하며 최선희를 쳐다보았다.
최선희는 예전에 하준이 인형들로 1인 다역을 해가며 연기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적극 찬성했다.
“하준아, 해! 하준이는 잘 할 수 있어!”
“정말? 나 잘 할 수 있을까? 한 번도 안 해봤는데?”
“그럼! 더빙도 연기랑 다를 바 없어. 목소리로 연기하는 거니까. 그쵸, 대표님?”
최선희가 최 대표에게 동의를 구했다.
“네, 맞죠. 근데 일단 하준이가 더빙은 처음이니까, 그쪽에서 오디션은 보고 싶대요. 그래도 1순위가 하준이라서 기본만 해도 캐스팅할 거고, 확인하는 차원이라고 하더라고요. 캐스팅 제안도 하준이한테 제일 먼저 한 거고요.”
“와, 1순위로 하준이한테요?”
“네, 근데 이거 제가 생각해도 하준이밖에 못 할 것 같아요.”
최 대표는 이 역할은 하준이 하겠다고만 하면 무조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최선희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네? 왜요?”
“목소리 연기만 하는 게 아니라 노래도 직접 해야 하거든요.”
“어머, 그럼 디즈리 애니메이션처럼 뮤지컬 형식의 애니메이션이에요?”
“네, 바로 디즈리 애니메이션이에요.”
“진짜 디즈리요?”
최선희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하준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최 대표를 쳐다보았다.
디즈리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흥행한 작품도 많고, 대단한 삽입곡들도 많았다.
또한 최선희도, 하준도 모두 디즈리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진짜 디즈리요. 하하. 사실 이 제안 받고 저는 진짜 놀랐어요. 디즈리가 다른 나라 언어로 녹음할 때 성우들을 엄청 까다롭게 검증해서 뽑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오디션도 엄청 빡세다고 소문났어요. 경쟁률도 세고요.”
“어머, 그래요? 근데 어떻게 더빙을 한 번도 안 해본 우리 하준이한테······.”
“뭐, 하준이가 활동으로 보여준 것들이 많잖아요. 연기, 뮤지컬, 노래 이런 것들 보고 제안한 거겠죠.”
최 대표가 씽긋 웃었다.
하준은 자신이 좋아하는 디즈리 애니메이션에 목소리로 출연하게 된다는 생각에 들떴다.
“근데 대표님, 어떤 역할이에요?”
“딱 네 나이 또래 남자아이야. 주인공이고.”
“네? 주인공이요?”
하준은 화들짝 놀랐다.
더빙을 처음 해보는데 제안 온 역할이 무려 주인공이다. 당연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준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최 대표가 씨익 웃으며 하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너무 부담가질 필요 없어. 열심히 준비해서 보여주면 될 거야. 혹시 그쪽에서 퇴짜 놔도 그냥 좋은 경험했다고 치면 돼. 알겠지?”
하준은 좋은 경험을 한 셈 치면 된다는 말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네, 알겠어요. 준비해 볼게요. 오디션은 언제예요?”
“2주 정도 남았는데, 혹시 그 전에 준비되면 연락 달래. 바로 시간 내겠다고.”
“엇, 근데 그럼 <신비종> 촬영 중일 때잖아요?”
“<신비종> 측이랑 계약할 때 다 얘기해놨어. 계약서에 네 외부 스케줄에 협조해주기로 명시도 했고. 그래서 촬영도 4월에 시작하는 거지.”
<신비종> 제작진은 하준이 <너와 나의 연결고리> 촬영이 2월 말에 끝나는 것을 고려해 3월 중에 대본 리딩을 하고, 4월에 촬영에 들어가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미리 말하기만 하면 스케줄 일정도 조정해 주기로 했다.
촬영 기간 중 하준이 광고를 찍거나 인터뷰 등을 할 수도 있어서 미리 양해를 구해둔 것이었다.
“아, 네. 그럼 열심히 준비할게요.”
“그래, 내일 유택이 편으로 대본이랑 파일 보내줄게. 아, 오늘 종방연 잘하고.”
“네, 그럼 가볼게요.”
하준과 최선희는 최 대표에게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와서 곧장 종방연 현장으로 이동했다.
역시나 종방연 장소인 고깃집 앞에는 기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와, 이번엔 저번보다 더 많은데요? 역시 대박작이라 그런가 봐요.”
김유택이 기자들을 발견하고 웃으며 말했다.
하준의 전작들에 비해 <너와 나의 연결고리>는 일일드라마의 특성상 시청률이 훨씬 높게 나왔다.
게다가 시청률이 35%를 뛰어넘어 최근 2년간의 일일드라마 중에서도 최고 시청률 1위였다.
그러니 기자들이 더 많을 수밖에.
“저 그럼 내릴게요.”
하준은 차에서 내려 기자들 앞으로 향했고, 몇 차례 경험이 있어서 기자들이 해달라는 대로 편하게 포즈를 취해주었다.
짧은 포토타임 후, 하준은 기자들에게 인사하고 고깃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가장 먼저 고깃집에서 일하는 나이가 꽤 많으신 아주머니들이 하준을 에워쌌다.
“아이고, 하준이네, 하준이!”
“귀여워 죽겠네!”
“하준이 연기 짱이더라. 아줌마가 하준이 팬이야.”
“드라마 진짜 재밌게 봤어.”
일일드라마는 5-60대 아주머니들이 많이 보는데, 식당 아주머니들이 그 연령대라서 모두 하준을 좋아하고 반겼다.
“감사합니다.”
하준은 생글생글 웃으며 감사인사를 했고, 아주머니들은 아주 의젓하다고 기특해했다.
아주머니들을 지나 테이블로 향하자, 스태프들이 얼른 하준을 우 감독과 차 작가가 앉은 테이블로 데려다주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하준아! 못 본 새 더 멋있어졌네! 하하.”
우 감독은 하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옆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차 작가도 하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한마디 했다.
“하준아, 연기 잘 해줘서 고마워. 우리 하준이 덕분에 드라마가 아주 잘 됐어.”
“감사합니다. 근데 작가님이 대본을 잘 쓰셔서 드라마 자체가 원래 재밌었어요. 잘 된 건 그 덕분이죠.”
하준의 칭찬에 차 작가는 기분이 좋은지 크게 웃었다.
그러고는 이번에는 하준의 근황을 묻기 시작했다.
“참, 요즘 너튜브에서 자주 보이더라? 그때 그 먹방 이후로 그 채널에 몇 번 더 나왔지?”
“네. 너튜브도 재밌어서 아는 형 도와줄 겸 몇 번 찍었어요.”
“아하. 나도 네 먹방 보느라 몇 번 봤어. 네가 오마카세환님이랑 떡 만드는 것도 보고. 하준이 떡도 잘 만들던데? 보고 깜짝 놀랬어.”
“감사합니다. 제가 반죽으로 모양 만드는 거 좋아해서 형 할 때 같이 하겠다고 했어요. 헤헤.”
오세환은 하준의 조언에 따라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음식을 만드는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
그러던 중 오세환이 <신비종>에 나오는 떡을 만드는 영상을 찍으려 했고, 하준은 그 얘기를 듣고 자기도 특별출연을 시켜 달라고 했다.
하준이 아직 불이나 칼을 다루기에는 부담스러웠지만, 떡은 손으로 모양을 만드는 것이라 하준이 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하준은 떡으로 예쁜 오리도 만들고, 토끼도 만들고, 꽃도 만들었는데, 손재주가 좋아서 오세환보다 더 예쁘게 떡을 빚어냈다.
덕분에 더 이슈가 되어서 오마카세환 채널은 2달 만에 구독자 10만을 찍게 되었다.
오세환은 이제 너튜브 수익으로 어느 정도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하준의 도움으로 이렇게 잘 되었다면서 무척 고마워했다.
“아, 하준아, <신비종> 시즌 2는 촬영 언제 들어가?”
이번엔 우 감독이 물었다.
“3일 뒤에요.”
“우리 하준이 바쁘네, 바빠. 허허. 하긴, 시즌 1이 잘 됐으니 시즌 2 찍는 게 당연하긴 하지. 기사 보니까 애들이 그렇게 보고 또 본다며.”
<신비종>은 5세에서 12세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서 집에서 심심하면 그걸 본다고 기사가 났다.
부모들은 <신비종>을 틀어주면 얌전히 이것만 보니까 덕분에 편해졌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N플릭스 관계자는 이 현상으로 구독자 이탈이 줄었다고도 했다.
“구름 타고 다니고, 변신하고 그런 거 신기해서 애들이 자꾸 보나 봐요. 저도 사실 자주 봐요. 진짜 저렇게 도술 부릴 수 있으면 좋겠다 하면서요.”
“그럴 수 있어. 확실히 마법이나 도술 같은 게 신기하고 흥미롭긴 하지. 아, 그럼 <신비종> 시즌 2 촬영은 언제 끝나?”
“음, 한 6개월은 걸릴 거예요. 저번에도 그 정도 촬영했거든요.”
“6개월이라······.”
우 감독은 하준의 말에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장난스럽게 웃으며 김유나 얘기를 꺼냈다.
“하준아, 유나랑은 아직도 연락하고 잘 지내?”
촬영 때 종종 김유나네 집, 그러니까 세계그룹 부회장네서 전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게 다 김유나가 하준이를 좋아해서라는 걸 아는 우 감독은 촬영이 끝난 뒤에는 두 사람 사이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