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84화
“와······ 엄청 나네. 무슨 파티 있나 봐.”
“고기도 굽나 본데? 고기 냄새 미쳤다······ 먹고 싶어, 흑.”
“아니, 근데 오늘 우리 촬영하는 날인데, 저래도 돼?”
“뭐, 저기는 2동이랑은 좀 떨어져 있으니 괜찮겠지. 그리고 점심시간 지나면 치울 거고.”
“부럽다, 저런 거 먹는 사람들······. 우린 또 도시락 먹을 텐데.”
스태프들은 뷔페에 차려진 음식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김유나의 엄마 강미혜가 우 감독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인사했다.
우 감독은 반갑게 강미혜에게 인사하더니 물었다.
“준비 다 되신 건가요?”
“네, 그럼요. 이제 와서 드시면 돼요.”
“아까 전화로도 인사드렸지만, 다시 한번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스태프들 인원도 많은데 이렇게 점심 대접을 해주시다니 말입니다.”
“호호, 저희 집에서 찍는 거기도 하고, 다들 고생하시니까······.”
김유나는 뒤늦게 강미혜를 따라와 그녀의 뒤에 찰싹 붙어 있었는데, 강미혜가 뷔페 대접의 이유를 명확히 말하지 않자, 자기가 대신 나섰다.
“우리집 식구들이 전부 하준이 팬이거든요. 그래서 점심 식사 대접하는 거예요!”
“아, 그래? 그럼 하준이 덕분이구나?”
“네, 그렇죠.”
김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 감독이 강미혜와 대화를 나눌 때부터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몇몇 스태프들은 방금 자신들이 본 끝내주는 뷔페 음식들이 자기들이 먹을 점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워하다가 이내 무척 행복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는 얼른 다른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저기, 저 뷔페 음식들 우리 점심이래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촬영 장비를 옮기던 스태프들이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저 뷔페 음식들은 세계그룹 부회장님 사모님이 준비하신 거고, 그게 다 우리 촬영팀 먹으라고 준비하신 거라구요. 지금 감독님이랑 대화하는 거 들었어요!”
“진짜? 아니, 왜? 이 저택도 거의 공짜로 빌려줬다고 하던데, 그런 비싼 밥은 왜 또 주는 거래? 돈이 워낙 많으니까 쓰고 싶어서 그러나?”
스태프 중 하나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하준이 팬이래요! 그 집안 식구들 전부 다요. 방금 그 막내딸이 하는 얘기 들었어요.”
“아하! 하준이 팬이라서라면 말이 되지.”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뭐든 해주고 싶어 한다. 어떤 돈 많은 팬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비싼 차를 선물하기도 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을 정도였다.
“와, 하준이랑 그 막내딸이랑 동갑이라고 들었는데, 하준이 나중에 재벌집 사위 되는 거 아니에요?”
“아이고, 너무 앞서간다. 재벌집들은 재벌집들끼리 사돈 맺지, 연예인이랑은 잘······.”
“그래도 부회장님 사모님은 막내딸을 지지하는 거 아닐까요? 여기 세계그룹 회장님네랑 동생네들은 다 이사 나갔는데, 부회장님네만 남아있는 거잖아요. 촬영팀이 왔다 갔다 하면 불편할 텐데 굳이······.”
세계그룹 오너가는 이 대저택에서 다함께 10년 정도 살았는데,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기 얼마 전 다른 곳으로 이사를 나갔다.
세계그룹 부회장 식구들만 빼고.
원래 장남인 김길한 식구들도 함께 갈 예정이었는데, 김길한의 딸 김유나가 태어났을 때부터 살던 집이라 정이 들었다면서 조금만 더 있다가 간다고 우겨서 아직 이 집에 살고 있는 것이었다.
김유나는 이 집에 정이 든 것도 사실이긴 했지만, 하준이 이곳에서 촬영한다는 점도 이 집에 더 머물고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맞아, 나도 그게 좀 이상하다 했어. 진짜 하준이 때문인가?”
“확실히는 모르지. 한 가지 확실한 건, 오늘 우리가 하준이 덕분에 거한 뷔페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지! 아하하.”
스태프들은 하준이 만약 재벌집 사위가 된다고 해도 먼 미래의 일이었기에 당장 눈앞에 닥친 행복한 상황으로 다시 돌아왔다.
“으아, 저 저런 뷔페 한 번도 못 먹어봤어요. 멀리서 봐도 셰프들이 요리 장인들처럼 보이던데!”
“재벌집에서 부르는 출장 뷔페에는 어떤 음식들이 나올까?”
“가서 먹어보면 알죠! 호호.”
방금 본 잔디밭의 뷔페가 스태프들을 위한 것이라는 소식은 빠르게 전달되었고, 그 사이 하준은 우 감독에게 불려갔다.
“감독님, 찾으셨어요? 어? 유나야, 안녕. 안녕하세요.”
하준은 김유나에게 인사한 뒤, 옆에 서 있는 강미혜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눈치를 보니 강미혜가 김유나의 엄마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준아, 김유나 양 아니?”
우 감독이 소개를 해주려다가 깜짝 놀라 하준에게 물었다.
“네, 전에 정원 구경하다가 우연히 만난 적 있어요.”
“그랬구나. 아, 그럼 유나 양은 알고, 이분은 세계그룹 부회장님 사모님이시자, 유나 양의 어머님이셔.”
“안녕하세요, 어머님.”
하준은 소개를 받고 다시 한번 강미혜에게 인사했다.
강미혜는 인사성이 밝은 하준이 흡족한지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안녕, 하준아. 반갑구나. 화면에서 본 것보다 더 잘생겼네.”
“감사합니다.”
하준이 칭찬을 듣고 활짝 웃자, 김유나가 하준의 웃음에 홀린 듯 황홀한 표정으로 하준을 쳐다보았다.
우 감독은 그런 김유나가 귀여워 피식 웃었다. 하지만 알은체는 하지 않고 곧바로 하준에게 오늘 점심 식사 대접에 관해 설명했다.
“부회장님 가족분들이 다들 네 팬이시래. 그래서 오늘 점심도 대접해 주시겠대. 아까 오다가 뷔페 차려진 거 봤지?”
“와, 네. 감사합니다. 유나야, 고마워.”
하준은 강미혜와 김유나, 두 사람 모두에게 깍듯하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뭐 이 정도 가지고. 하준아, 얼른 밥 먹으러 가자. 감독님, 다른 사람들도 얼른 오라고 해주세요.”
김유나는 하준의 팔짱을 끼더니 하준을 먼저 끌고 갔고, 우 감독은 스태프들을 모아 함께 뷔페가 차려진 야외 테이블로 이동했다.
“이야······!”
“크으, 이게 재벌집 퀄리티인가!”
“와, 대박······.”
하얀 천막이 쳐진 야외 뷔페에 도착한 스태프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야외 뷔페인데도 여느 호텔 뷔페 못지않게 다양한 음식들이 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애피타이저로 먹는 각종 핑거푸드를 비롯해 전복구이, 대게, 초밥, 파스타, 피자, 팔보채, 크림새우, 탕수육, 샐러드, 훈제연어 등 거의 2-30가지의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고, 디저트로 케이크와 아이스크림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박인 것은 양갈비와 랍스터, 토마호크를 셰프들이 야외에서 직접 굽고 있었다는 점이다.
스태프들은 언제 이런 비싼 뷔페 음식들을 먹어보냐며 신나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와, 양갈비가 잡내가 하나도 없어.”
“거기다 너무 부드러워서 입에서 살살 녹는다, 녹아.”
“랍스터 살은 또 어떻구요? 탱글하고 버터향이 진짜 고소해요.”
“초밥도 오도로로 만들었나 봐요. 진짜 맛나요.”
“튀김류도 엄청 바삭해. 다 맛있어.”
스태프들은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식사를 했다.
하준은 김유나, 강미혜와 한 테이블에서 식사 중이었는데, 김유나는 하준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강미혜는 이런 저런 질문을 하는 중이었다.
“하준아, 넌 꿈이 뭐니?”
“음······ 가족끼리 행복하게 사는 거요.”
“그런 거 말고,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뭐든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어요.”
“하고 싶은 게 뭔데?”
“연기도 재밌고, 노래도 좋아요. 그림 그리는 것도 좋고요.”
“그렇구나.”
강미혜가 잠시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멈췄는데, 하준이 갑자기 옆에 앉은 김유나에게 물었다.
“새우 내가 까줄까?”
김유나는 강미혜가 하준에게 질문하는 사이, 껍질째 쪄진 새우를 먹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강미혜에게 까 달라고 할 텐데, 지금은 옆에 하준도 있고, 또 강미혜가 하준에게 질문을 하고 있으니 말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응?”
“나 새우 잘 까거든. 숟가락이랑 포크 줘 봐.”
하준은 포크로 새우 등을 찔러 고정한 다음, 숟가락으로 새우 머리와 다리를 떼어내고 껍질을 능숙하게 제거했다.
김유나는 새우도 잘 까주는 하준의 모습에 또 한번 반한 듯 멍하니 하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먹어.”
하준은 포크에 찍힌 새우를 김유나의 입에 넣어주었고, 김유나는 귀엽게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우와, 너 새우 진짜 잘 깐다! 그리고 네가 까주니까 더 맛있는 거 같아.”
강미혜는 하준의 다정한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또 궁금증이 일었다.
“하준이 새우 정말 잘 까네. 어디서 배웠어?”
“아빠한테 배웠어요. 아빠가 뷔페에서 항상 엄마 새우 까 주시거든요.”
“어머······ 부모님 두 분이 사이가 좋으시구나?”
“네, 저한테도 너무 잘해주시고요. 저도 나중에 엄마, 아빠 같은 부부가 될 거예요.”
하준의 말에 김유나는 자신이 하준의 아내가 될 거라 상상했는지 괜히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했다.
강미혜는 하준과 대화를 나눠보니 얼굴만 잘생기고 연기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스럽고 다정해서 마음에 들었다.
‘이대로만 잘 자라면 사윗감으로 괜찮을지도?’
강미혜는 하준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
그날 저녁, <너와 나의 연결고리> 팀은 첫 방송 시청률도 잘 나온 데다가 점심도 든든하게 먹어서 힘이 남아돈다며 다른 때보다 더 활기차게 촬영을 하고 있었다.
“레디, 액션!”
“컷! 좋아, 잘했어. 하준이는 내가 볼 때마다 놀라. 어쩜 그렇게 표정 연기가 섬세한지. 하하하.”
우 감독이 하준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고, 함께 촬영하는 배우들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전 하준이 덕분에 연기에 몰입이 더 잘 돼요.”
“전 하준이 연기에서 배우는 게 많아요. 어리지만 감정 표현을 참 잘해요. 타고난 배우예요.”
“나중에 진짜 대성할 거야. 아, 나중이 아니라, <신입 도사와 비밀의 종소리> 잘 되면 바로 세계적인 스타 되는 건가?”
칭찬 세례에 하준은 소파에 앉은 채 민망해하며 웃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봤는데, 검은 그림자가 홱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헉! 저기, 뭔가가 지나갔어요!”
하준이 놀라서 창문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
하지만, 우 감독은 스태프들 중 하나일 거라며 하준을 안심시켰다.
하준의 느낌으로는 스태프가 아닌 것 같았으나, 이미 사라져버린 뒤였으니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한편, 세계그룹의 부회장 김길한은 2동의 뒤쪽 길에 세워둔 차에 얼른 타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네. 세계그룹 부회장이 촬영하는 거 염탐이나 하고 있었다고 소문나면 큰일이지.’
김길한은 자기 딸이 푹 빠져 있는 하준을 한 번 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기가 직접적으로 하준 앞에 나타나면 하준의 본모습을 볼 수가 없으니 촬영장에서는 어떤 아이일지 몰래 숨어 구경을 한 것이다.
“부회장님, 하준이란 아이, 어떤 것 같습니까?”
운전기사가 김길한에게 물었다.
“애가 엄청 칭찬을 듣더라고. 내가 봐도 연기 잘하더라. 그리고 주변 어른들도 다들 이뻐하는 것 같았어. 뭐, 우리 유나가 보는 눈은 있잖아.”
김길한은 내심 하준이 마음에 드는지 씨익 웃었다.
김길한은 이날 이후로 가끔 하준이 촬영하는 걸 멀리서 구경하기도 하고 강미혜처럼 스태프들에게 식사를 쏘기도 했다.
스태프들은 하준 덕분에 입이 호강한다며 매번 하준에게 고마워했고, 하준 역시 감사해서 드라마가 끝나면 한번 식사대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일일드라마 촬영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새해가 되었다.
<너와 나의 연결고리>는 첫방송 이후 꾸준히 시청률이 상승해서 65화인 지금 시청률은 30%를 넘긴 상태였다.
덕분에 하준은 작년 12월 KBC 연기대상에서 아역상을 수상하며 이제 공중파 3사의 모든 아역상을 석권했다.
그래서 하준의 트로피장에는 공중파 3사의 아역상 트로피가 마치 삼총사처럼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트로피 3개를 뿌듯한 표정으로 구경하던 하준이 최선희에게 물었다.
“엄마, 이 트로피들 꼭 우리 신입 도사 삼총사 같지 않아?”
트로피 중 하나는 부채꼴 모양의 장식이 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동그란 구슬 모양을 안고 있었으며, 마지막 하나는 기다란 가로 막대를 들고 있는 듯했다.
“오? 정말 그렇네. 호호.”
“<신비종>도 잘되면 좋겠다.”
<신입 도사와 비밀의 종소리>는 바로 내일 N플릭스에 공개될 예정이었기에, 하준은 은근히 긴장이 되었다.
“걱정 마. 지금까지 하준이가 한 작품들 다 잘됐잖아. 덕분에 이렇게 트로피도 많이 받았고. 잘 될 거야.”
“응.”
드디어 다음 날, <신입 도사와 비밀의 종소리>가 N플릭스를 통해 전세계에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