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81화
“우리 집이라면······ 헉, 너 여기 대저택에 사는 애야?”
하준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까 김유택이 받은 지도에서 출입 금지로 표시된 곳이 있었는데, 그곳들 중 대문에서 가장 멀리 있는 5동에는 원래 살던 집주인들이 살고 있다고 했었다.
“응, 맞아. 내 이름은 김유나. 넌 하준이······ 맞지?”
“응, 나 알아?”
하준의 질문에 김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살짝 볼이 발그레해졌다.
최선희는 비록 스태프들에게 허락을 받았더라도 집주인을 정원에서 맞닥뜨린 이상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나야, 드라마 촬영하는 분들이 여기 구경해도 된다고 하셨는데, 괜찮지?”
김유나는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마가 여기 정원도 촬영 허락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래, 고맙다. 근데, 유나도 여기 정원 구경하러 온 거니?”
“아뇨, 그게 아니라, 하준이 보러 왔어요······.”
김유나는 최선희에게는 또랑또랑하게 대답을 잘했는데, 하준이 이야기만 나오면 뭔가 말끝이 흐려졌다.
하준은 김유나가 자신의 팬이라는 것을 깨닫고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정말? 고마워. 몇 살이야?”
“나? 9살.”
“나랑 동갑이네! 친구 하면 되겠다.”
“친구? 정말?”
친구 하자는 말에 김유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더니 자기가 멘 작은 크로스백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에 쥐더니 하준에게 내밀었다.
“이거 선물. 친구 된 기념이야.”
하준은 얼떨결에 김유나의 손 밑에 자기 손을 펼쳤고, 김유나의 손에 있던 것을 건네받았다.
김유나가 건네준 선물은 500원짜리 동전만 한 금색의 하트 모형이었다. 앞면에는 검정색 매직으로 ‘하준’이라고 적혀 있었고, 뒷면에는 역시 검정색 매직으로 ‘유나’라고 적혀 있었다.
“와······ 고마워.”
“헤헤, 뭘. 다음에 만나면 또 줄게.”
“또? 아니야, 이거면 돼. 근데 난 지금 뭘 줄 게 없는데······.”
“그럼 사진 찍어줄래?”
“그래!”
김유나는 이번엔 크로스백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하준의 옆으로 이동해서 셀카를 찍었다.
“고마워. 잠깐만, 여기 앉아봐.”
김유나는 정원에 반듯한 바위에 턱 걸터앉으며 하준보고 옆에 앉으라고 했다.
그러고는 휴대폰과 비슷한 크기의 네모난 기기를 꺼내 휴대폰과 연결했다.
하준은 그게 뭔지 몰라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네모난 기계에서 방금 하준과 김유나의 사진이 지잉 하고 나왔다.
“우와!”
하준은 처음 보는 휴대용 포토프린터에 깜짝 놀라 감탄사를 내뱉었다.
최선희도 이런 걸 처음 봐서 신기한 눈빛으로 포토프린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김유나는 하준이 놀라는 걸 보고는 대뜸 포토프린터를 하준에게 내밀며 물었다.
“이거 신기해?”
“응, 바로 사진이 나오다니······ 너무 신기하다.”
“음, 그럼 이거 너 가져. 나 이런 거 집에 많거든. 난 이 사진만 가지면 돼.”
“으응? 아니야, 아니야, 방금 이 선물도 받았는데······.”
하준이 금색 하트를 보이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김유나는 굳이 하준에게 포토프린터를 쥐여주었다.
“나 이런 거 많아. 별로 비싼 거도 아니구. 이 사진도 가지구.”
김유나는 하준과 함께 찍은 셀카를 2장을 프린트했고, 한 장은 자기가 갖고 다른 한 장은 하준에게 포토프린터와 함께 주었다.
“진짜 받아도 돼?”
“그럼. 그리고, 이 사진도 꼭 가지고 있어야 돼. 알겠지?”
“응, 고마워. 안 잃어버릴게.”
하준은 정원을 구경하다가 뜻밖의 아이와 뜻밖의 선물을 받아 얼떨떨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유나! 유나야? 얘가 어디 갔지? 아니, 애를 잘 봤어야죠.”
“죄송합니다, 사모님. 유나가 뭘 좀 가져다 달라고 해서 잠깐 창고에 갔다 왔는데······. 근데 오늘 하루종일 하준이 얘기만 했거든요. 하준이도 정원 구경한다고 했다니까, 여기 있을 거예요. 유나야!”
이 소리를 들은 하준이 김유나를 쳐다보며 조용히 속닥였다.
“너 찾는 거 아니야?”
그러자 김유나는 한숨을 푹 쉬더니 하준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응, 나 이제 가봐야겠어. 다음 촬영 때도 오지? 나중에 또 보자. 오늘 반가웠어.”
“응, 나도 반가웠어. 선물도 너무 고마워.”
김유나는 하준의 감사 인사에 활짝 웃어 보이더니 후다닥 여자들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최선희는 김유나가 사라지고 나자, 하준에게 말했다.
“우리 하준이 대저택에 사는 친구가 생겼네! 신기한 선물도 받고. 좋겠다.”
“응, 착한 애 같아.”
“갑자기 사라지는 말썽은 좀 부리는 것 같지만······ 뭐, 널 보려고 그런 것 같으니까, 열정적이기도 한 것 같구나. 호호.”
최선희는 벌써부터 인기 많은 아들이 자랑스러운지 흐뭇하게 웃었다.
***
“이야, 우리 하준이가 벌써 <뮤직탱크>에 자작곡으로 출연하다니! 내가 다 감격스럽다!”
김유택이 룸미러로 뒷좌석의 하준을 쳐다보며 활짝 웃었다.
오늘은 <뮤직탱크>에서 처음으로 하준의 자작곡인 ‘바다 물결’을 선보이는 날.
약 일주일 전 싱글 앨범으로 발매된 하준의 ‘바다 물결’은 이미 각종 음원 차트를 휩쓸고 있었다.
사실 하준의 자작곡이 몇 곡 더 있었는데, 최 대표가 수록곡으로 남기기에는 한 곡 한 곡이 다 아깝다며 차라리 싱글 앨범을 자주 내자고 했다.
하준은 드라마 촬영도 있고,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최 대표의 말대로 하기로 했는데, 워낙 큰 인기를 얻다 보니 <뮤직탱크>에도 출연하게 되었다.
“헤헤, 감사합니다. 근데 자작곡 무대는 은근히 더 떨리네요. 게다가 기타 연주도 해야 하고요.”
하준은 자신이 작사 작곡한 곡으로, 자신이 직접 기타를 치면서, 자신이 직접 노래를 불러야 했다.
거기다 생방송이기까지 했으니 뮤지컬로 쌓은 무대 경력으로도 조금 감당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에이, 엄살인 것 같은데? 걱정 마, 항상 넌 잘하니까. 뭐, 그리고 좀 실수해도 괜찮아. 인생에서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내가 장담하건대 아무도 없어. 물론 하준이 넌 지금까지 실수가 없었지만, 그건 네가 좀 특이한 케이스고, 다들 무지막지하게 실수하면서 살지.”
김유택은 하준의 부담감을 덜어주려 노력했다.
“네, 실수하면 다음 주에 더 잘하죠, 뭐.”
하준은 이번 곡으로 <뮤직탱크>에 2번 정도 출연할 계획이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 아, 근데 지금 추이를 볼 때는 다음 주에는 ‘바다 물결’이 1위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때는 앵콜까지 2번 불러야 할지도 몰라.”
김유택이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물론 오늘도 하준의 ‘바다 물결’은 1위 후보곡이었다.
하지만 싱글 앨범을 발매한 지 일주일이 조금 넘은 시점이고, 다른 1위 후보곡이 꽤 유명한 남자아이돌 그룹인 ‘VIT’라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VIT는 하준보다 약 1주일 정도 일찍 음원을 발매했고, 하준 전에 음원차트를 휩쓸었다.
하준의 ‘바다 물결’이 발매되면서 2위로 밀리긴 했지만, 기간적으로 봤을 때 하준이 VIT를 바로 꺾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에이, 설마요.”
하준은 음악방송 1위는 인기가 정말 많은 가수들이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가 사람 잡는 거 몰라? 사실 내 소원이기도 하고. 딱 2번만 출연할 건데, 이왕이면 너 출연할 때 1위 하면 좋잖아.”
김유택은 싱글벙글 웃으며 차를 몰았고, 곧 하준은 KBC 방송국에 도착했다.
하준이 기타를 메고 대기실 복도에 등장하자, <뮤직탱크>에 출연하는 가수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와, 하준이, 하준이다!”
“꺄아, 귀여워!! 기타 멘 거 좀 봐!”
“하준아, 안녕!! 이번 노래 너무 좋더라.”
“1위 후보 축하해.”
아이돌과 가수들은 하준이 귀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준은 수많은 가수들에 둘러싸여 어쩔 줄 몰라 했고.
“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천재적인 모습만 보이다가 약간 어리둥절한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은 더 귀엽다고 난리였다.
매니저 김유택은 하준이 다른 가수들에게 실컷 귀여움을 받게 뒀다가 눈치를 봐서 하준을 데리고 대기실로 이동했다.
하준의 대기실은 함께 1위 후보에 오른 VIT와 같은 대기실이었다.
하준은 노크를 한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하준이 인사를 했지만, VIT 멤버들은 하준을 본 척 만척하며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눴다.
“야, 1위 소감 연습했냐?”
“뭘 그런 걸 연습해? 그냥 딱 받으면 줄줄줄 나오게 돼 있어.”
“우리가 뭐 한두 번 받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
“누가 먼저 할 건데?”
“일단 리더가 먼저 해야지.”
“그 다음은?”
“가위바위보로 정하자. 그게 제일 공평해.”
VIT의 여섯 멤버들은 오늘 1위는 자기들임을 확신하며 벌써 1위 소감 순서를 정하고 있었다.
김유택은 하준의 인사는 무시하고 저러고 있는 VIT 멤버들이 아주 얄미웠다.
하지만 하준보다 가수 선배인 데다가 소속사도 국내 3대 대형 기획사 중 하나인 JS 엔터테인먼트라서 뭐라 말도 못 하고 속으로만 욕을 하고 있었다.
‘싸가지 없다고 하더니만, 진짜네. 확 그냥 오늘 1등 하준이가 하면 좋겠다.’
김유택은 혹시 하준이 상처를 받았을까 봐 걱정이 되어 하준을 살폈다.
그런데 하준은 아무렇지 않게 VIT 멤버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단 괜찮은 것 같긴 한데······.’
김유택은 그래도 VIT가 하준에게 뭔가 상처 줄 만한 행동을 더 할까 싶어 얼른 하준을 데리고 나왔다.
“하준아, 괜찮아?”
“뭐가요? 아, VIT 형들이 1위 소감 준비하는 거 때문에요? 오늘 1위 할 거니까 준비할 수 있죠.”
“그렇지, 그렇지.”
김유택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고 아까 하준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마도 하준은 자신이 인사하는 데에만 집중했을 뿐, 상대가 인사를 돌려주는지 안 돌려주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듯했다.
“음, 그럼 우리 다른 가수들 리허설 하는 거 구경 갈까?”
“네, 좋아요!”
하준은 <뮤직탱크>에서 노래하는 건 처음이니 자기가 리허설하기 전에 다른 가수들이 어떻게 하는지도 보고 싶었다.
김유택은 하준을 데리고 공연장으로 가서 일단 <뮤직탱크>의 이 PD에게 인사를 시켰다.
“안녕하세요, 하준입니다!”
“오, 하준아, 오늘 첫 출연이지?”
“네,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그래. 나도 소문으로만 잘한다 소리 들었는데, 직접 네 노래 들어볼 수 있다니 기대된다. 오늘 잘해야 돼. 알겠지?”
“네, 최선을 다할게요.”
“참, 여기 사인 좀 해줄래?”
이 PD는 리허설도 전에 하준에게 사인을 부탁하더니 사인 밑에 이렇게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솔미야, 아빠 말씀 잘 듣고 건강하렴.”
하준은 이 PD가 시키는 대로 적은 후 슬쩍 물었다.
“솔미가 누구예요?”
“아, 내 딸래미. 네 팬인데, 내 말을 영 안 들어서 말이야. 네 힘을 좀 빌려 보기로 했지. 으하하.”
이 PD는 하준의 사인을 보며 아주 흡족하게 웃었다.
잠시 후, 하준은 리허설을 무사히 마쳤고, 곧이어 생방송이 시작되었다.
하준은 생방송을 위해 청바지와 흰 티로 갈아입었고, 얼굴에 화장도 좀 했다.
그리고 팬들이 작년 생일 선물로 보내줬던 황금 새싹이 새겨진 인이어를 꼈다.
하준은 좀 빨리 무대를 하고 내려왔으면 싶었지만, 1위 후보여서 마지막에서 2번째 순서였다.
조금은 긴장된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하준의 차례가 되었다.
“요즘에 바다 물결처럼 차트들을 휩쓴 노래가 있죠.”
“아, 저 알아요! 빠져든다 빠져든다~ 너에게~”
“네, 정답입니다! 만나볼까요, 1위 후보곡, 하준의 ‘바다 물결’.”
하준이 무대로 나가자, 엄청난 함성이 공연장을 꽉 채웠다.
그리고 객석에는 하준의 팬카페에서 온 단체 팬들이 ‘최연소 싱어송라이터 하준’, ‘빠져든다~ 빠져든다~ 하준에게’라고 쓴 커다란 플래카드를 신나게 흔들어댔다.
하준은 팬카페에서 온 줄은 몰랐는데, 그들을 보고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객석에 자신을 응원해주는 팬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준은 마음이 든든해졌고,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노래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다음으로 마지막 무대인 VIT의 무대가 이어졌다.
VIT 역시 단체 팬들이 관객석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벌써부터 ‘1위는 VIT’, ‘1위 추카추카’ 등의 플래카드를 흔들어댔다.
VIT의 무대가 끝나자, MC들은 오늘 출연가수들을 모두 무대로 불렀다.
1위 발표만을 남겨둔 상태.
MC는 점수 공개를 위해 큰 소리로 외쳤다.
“VIT와 하준, 과연 1위는 누가 차지하게 될지 점수 보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