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80화
“와, 대문부터 엄청 멋있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김유택이 감탄했다.
대문은 덩굴 문양을 활용한 철제로 만들어져서 무척 고급스러웠다. 거기다 대문이 달린 양쪽의 돌기둥 역시 탑처럼 멋지게 조각되어 있었다.
“와······! 예쁘다!”
“대문 하나 만드는 데도 엄청 정성을 다했나 봐.”
하준과 최선희도 앞좌석 사이로 머리를 내밀어 대문을 구경했다.
그때, 운전석의 창문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김유택이 창문을 열어보니 드라마 스태프가 그에게 종이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안녕하세요! 하준 군 차량이죠? 이거, 간단한 저택 지도예요. 2동에서 촬영 먼저 할 거니까, 2동으로 가시면 되고요, 주차는 따로 그쪽에서 안내해 줄 겁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김유택은 저택 지도를 받아들었고, 곧 대문이 활짝 열렸다.
“오른쪽으로 돌아서 2번째 동······. 와, 분수랑 정원도 기가 막히게 꾸며 놨네!”
지도를 확인하고 앞으로 나아가던 김유택이 주변 경관에 또 한 번 감탄했다.
하준과 최선희도 입을 쩍 벌리고 좌우를 구경하느라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저택 내부의 가장 넓은 도로를 타고 가니 첫 번째 집이 멀리 보였고, 더 가자 촬영 준비로 분주한 스태프들이 모여 있는 2동이 보였다.
“크으, 아까 1동은 약간 고풍스런 느낌으로 지었던데, 이건 엄청 모던한 느낌이네요. 대리석으로 반듯하니······.”
“대리석도 그냥 대리석이 아니라 엄청 비싸 보여요. 그쵸?”
“네, 하아······ 난 언제 이런 집에서 살아보나······ 평생 그럴 일 없겠죠?”
“뭐, 이런 집에 사는 사람들이 국내에도 그리 많지 않잖아요? 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좋네요. 그리고 사실 집이 너무 넓어도 불편해요.”
“그건 그래요. 유지비도 장난 아닐 거고. 실용성은 아무래도 떨어지죠? 저도 구경하는 걸로 만족해야겠네요.”
하준은 김유택과 최선희의 대화를 들으며 이솝우화에서 읽은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먹을 수 없었던 포도를 바라보며 ‘저건 신포도일 거야’라고 자기 위안을 했던 여우의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자기 위안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난 일단 신포도라도 맛은 보고 싶어. 먹어 보고 시면 도로 뱉으면 되니까!’
하준은 언젠가 이런 멋진 집에 꼭 한번 살아보리라 다짐했다.
“하준아, 이런 집은 구경하기도 쉽지 않은 집이니까, 이번 드라마 촬영을 최대한 즐겨! 이런 집에서 살려면 돈도 많이 들고 관리도 힘든데, 이렇게 촬영으로 체험만 해보면 얼마나 좋아. 역시 배우는 이런 게 진짜 좋다니까.”
김유택이 하준을 부러워하며 당부했다.
“네, 형.”
하준은 새로운 드라마에 들어가는 것도 기대되고 신났는데, 그것도 평범한 소시민들은 구경하기도 힘든 대저택에서 촬영하니 더 신이 났다.
하준은 2동 앞에 내려서 곧장 연출을 맡고 있는 우영만 감독에게 향했다.
우 감독은 조감독에게 촬영에 사용할 차가 왜 안 오냐고 한창 꾸지람 중이었다.
“야, 차 왜 안 와?”
“죄송합니다. 지금 오고 있는데, 차가 막힌답니다······.”
“그러니까, 원래 촬영 시간에 딱 맞춰서 오게 하지 말고 한 1시간 일찍 오라고 했어야지!”
“네, 시정하겠습니다.”
“그래서 언제 온대?”
“1시간······ 정도 걸린답니다.”
“뭐, 한 시간? 낮에 외부 촬영 다 해야 하는 거 몰라? 해 다 지고 올 거야? 하, 참. 첫 촬영부터 열 뻗치게 하네!”
우 감독이 두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소리를 질렀고, 조감독은 쫄아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하준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이밀고 활짝 웃으며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우 감독은 하준을 예뻐했기에 금방 반색하며 하준에게 인사했다.
“오, 하준이 왔구나!”
“네, 점심 드셨어요?”
“응, 먹었지. 너는?”
“저도 먹고 왔어요. 근데 무슨 일 있으세요? 화나신 것 같은데······.”
“아, 아니야. 오늘 하준이가 탈 차가 아직 안 와서 그것 때문에 조감독이랑 대화 좀 한 거야.”
“차 늦게 온대요?”
“응, 1시간 늦을 것 같다네······. 밝을 때 외부 촬영 다 해야 하는데, 후우.”
지금 시간이 오후 3시니까, 차는 4시에 온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지금은 7월 중순이라 해가 8시 정도까지는 떠 있었지만, 촬영은 다각도에서 여러 번 촬영하는 데다가, 여러 변수가 있어서 시간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감독님, 제가 NG 안 내고 최대한 빨리 잘해볼게요.”
하준이 이런 말을 한 것은 나름대로 우 감독의 화를 풀어주려는 노력이었다.
그리고 그 뜻을 파악한 우 감독은 정말 화가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으하하하. 우리 하준이 말하는 거 봐라. 어쩜 이렇게 이쁜 말만 골라 할까? 차 늦어서 촬영 다 못 할까 봐 걱정하니까 자기가 잘하겠대. 아이고, 이뻐라.”
우 감독은 하준이 이뻐서 죽겠다는 듯 하준을 꼭 안고 잠깐 흔든 다음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조감독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잘 준비해. 가서 일 봐.”
“네! 감사합니다!”
조감독은 얼른 그 자리를 피하며 하준에게 슬쩍 눈짓으로 고맙다는 의미의 윙크를 보냈다.
잠시 후, 하준은 정장을 입고 헤어 메이크업을 한 뒤, 2동의 1층 거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자신의 아빠로 나오는 한강필과 가정부로 나오는 진유주, 자신의 운전기사
역할의 서윤식이 대리석 테이블에 둘러앉아 서로 대본을 보며 대사를 맞춰보고 있었다.
“하준아! 이리 와, 앉아 봐. 여기 소파 진짜 좋다?”
진유주가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를 어루만지며 하준을 불렀다.
“안녕하세요!”
하준은 밝게 인사하고는 진유주의 옆에 앉았다.
“하준이는 대사 다 외웠댔지?”
서윤식이 물었다.
그러자 한강필이 하준이 대신 대답했다.
“당연한 걸 뭘 또 물어? 대본 연습 때 봤잖아. 쿡 찌르면 대사가 줄줄줄 나오는 대사 자판기.”
“야, 나도 아는데, 그냥 밥 먹었냐, 뭐 이런 안부 인사 같은 거였어.”
친구인 두 사람이 투닥이며 말을 주고받았다.
“그럼 안부는 됐고, 다른 얘기 하지 뭐. 엊그제 <죽지 않는 백화점> 상영 마지막이었지? 진짜 아깝더라. 며칠만 더 상영했으면 천만 될 수도 있었는데!”
어제로 막을 내린 <죽지 않는 백화점>은 최종관객수가 약 940만 정도였다.
900만을 넘었을 때, 다들 천만 가는 거 아니냐고 기대하긴 했는데, 막판 스퍼트가 그리 세지는 않아서 940만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하준 가족은 생각보다 너무 잘 나온 거라 아쉬움보다는 기쁨이 훨씬 컸다.
“괜찮아요. 우리 가족은 대만족이거든요. 예상보다 한 2배는 나온 거라서요. 그리고 다음에 천만 넘으면 되죠. 헤헤.”
“그래, 그래. 그건 그렇지.”
“하준이는 앞날이 창창하네. 첫 영화부터 이렇게 대박을 터뜨리고.”
“하준이는 하는 것마다 대박이지. 참, 이번에 앨범 나오는 건 언제 나와?”
진유주가 앨범에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다음 주에요.”
“오, 금방이네. 이번에도 1위는 따놓은 당상이겠더라. 노래가 너무 좋아.”
“맞아. 그것도 대중이 원해서 내 달라고 한 거니까, 당연히 잘 될 거야.”
“빨리 듣고 싶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너에게~”
“빠져든다~ 빠져든다~ 너에게~”
“바다물결~ 바다물결~ 너에게~”
세 사람은 하준의 노래를 이미 다 기억하고 있는지 갑자기 단체로 후렴구를 불렀다.
하준은 자신의 노래를 이렇게 기억해주니 기분이 좋았다.
“감사합니다.”
그때, 조감독이 배우들을 호출했다.
“배우분들, 리허설 할게요! 밖으로 나와주세요.”
리허설이라는 말에 하준은 차가 의외로 빨리 왔다고 생각하고 나갔는데, 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차 없이 리허설 할게요.”
시간 단축을 위해서 일단 차 없이 리허설을 하려는 모양.
2동 현관 앞에는 간이 의자 2개가 대각선으로 놓여 있었다.
그 중 앞쪽 의자는 서윤식의 이름이 등판에 적힌 의자였고, 대각선 뒤쪽 의자는 하준의 이름이 적힌 의자였다.
“이게 차라고 생각하고 리허설 해볼게요. 두 분 앉으시고······.”
조감독이 간단히 설명한 뒤, 우 감독의 지휘 아래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기사 아저씨 역할인 서윤식은 룸미러로 하준을 보는 시늉을 하며 말문을 열었다.
“대운아, 영희 이모님께서 아프시단다. 그래서 대신 다른 분이 며칠 오시기로 했어. 괜찮······지?”
하준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근데 사실 이모님 없어도 되는데. 저 다 컸어요.”
“그래도 너 혼자 밥해 먹을 순 없잖아. 이모님도 필요하지.”
“시켜 먹으면 되잖아요.”
“아, 시켜 먹는 건 몸에도 해롭고, 먹다 보면 그 메뉴가 그 메뉴라 질리고······.”
“전 햄버거 맨날 먹어도 좋을 거 같은데요? 몸에 해로운 것도 좋고.”
하준이 시크하게 말을 마친 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배우들은 역시 소품이 중요하지 않았다. 없어도 있는 양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말했으니까.
“차 없이도 둘이 아주 잘하네. 하하. 다음 장면은 하준이가 차에서 내려서 유주 씨 만나는 장면 해봅시다.”
하준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차 문을 열고 내리는 시늉을 했고, 2동 현관으로 걸어가다가 진유주와 마주쳤다.
진유주는 극중에서 무한긍정녀 캐릭터였기에 한껏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대운이구나! 안녕, 내 이름은 다정이야. 안다정. 며칠이지만 잘 지내보자.”
“네.”
하준은 진유주를 힐끗 쳐다보고는 휙 지나쳐갔다.
그러자 진유주는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곧 다시 활짝 웃으며 하준을 따라 붙었다.
“대운아, 이름이 참 멋지네. 거기다 성이 최. 최대운. 이름부터 최대운이니 운이 엄청 좋겠다. 아, 그래서 이렇게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나?”
진유주의 말에 하준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더니 홱 뒤를 돌아보았다.
“아줌마 이름은 참 일관성이 없네요. 이름은 다정, 성을 붙이면 안다정. 우리 집에 오실 때 저에 대한 설명은 못 들으셨나요? 운이 좋다니······.”
하준이 차갑게 말한 다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다시 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좋네, 좋아. 근데 유주는 하준이 쫓아갈 때 좌우로 좀 부산스럽게 움직여 봐. 하준이는 조금만 느리게 걷고.”
우 감독은 대사는 좋다며 행동을 더 많이 체크했고, 차가 없는 동안 미리미리 리허설을 해놓았다.
그래서 차가 도착해서 촬영할 때는 진도를 쭉쭉 뺄 수 있었다.
하준은 이렇게 대저택에서 촬영을 하니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관광을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른 배우들이 촬영을 할 때는 2동 주변을 돌아보기도 했고, 허락을 맡고 내부 정원에도 가보았다.
“엄마, 여기 미로는 아닌데 미로처럼 해놨다, 그치?”
“그러게. 구불구불하게 해놨네. 근데 조각상이랑 꽃들이 진짜 멋지다!”
“나무도 다 예쁘게 잘려있어. 신기해.”
하준은 최선희의 손을 잡고 넓은 정원을 돌아다녔다.
두 사람이 다정하게 정원을 걷고 있는데, 어느 순간 하준은 뒤쪽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그래서 뒤를 홱 돌아보았는데, 원뿔 모양의 나무가 흔들리는 걸 발견하고 물었다.
“거기 누구세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최선희는 정원을 감상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그런지 인기척을 못 느꼈기에 하준에게 물었다.
“하준아, 왜 그래? 누가 있었어?”
“응, 저기 저 나무 뒤에 누가 있는 것 같은데. 저기요, 누구세요?”
하준이 나무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러자, 그 뒤에서 하준의 또래로 보이는 한 여자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너 누구야? 여기서 뭐해?”
처음 보는 얼굴에 하준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러자 공주 드레스를 입은 그 아이가 수줍게 대꾸했다.
“여기 우리 집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