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76화
월드 엔터테인먼트 소속 작곡가 박성배는 밤을 꼴딱 새우고, 아침까지 작곡을 하다가 오후가 돼서야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잠든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요란하게 울리는 자신의 휴대폰 소리에 잠을 깨고 말았다.
“아 누구야······.”
짜증스럽게 중얼거린 박성배는 눈은 감은 채로 팔을 이리저리 휘적여 자신의 휴대폰을 찾았다.
휴대폰을 낚은 그는 겨우 실눈을 떠 발신자를 확인했다.
‘에이, 대표님이잖아······.’
최원상 대표의 전화였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네, 대표님.”
최 대표는 박성배의 잠긴 목소리를 듣고 그가 잘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엇, 미안! 내가 마음이 급해서 박 PD가 잘 시간이라는 걸 깜빡했네······.
“뭐, 괜찮습니다. 그치만 다음부터는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암······ 근데 무슨 일이세요?”
박성배는 다시 눈을 감은 채 물었다.
-있잖아, 하준이가 기타로 작곡한 곡이 있는데 말이야, 어떤지 잠깐만 들어 봐줄래? 후렴 부분만 녹음한 게 있는데.
“하준이가 작곡을요······? 동요라도 작곡했대요?”
박성배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하준의 노래 실력이나 연기력은 다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작곡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게다가 겨우 9살인 아이가 뭘 얼마나 대단한 곡을 작곡했겠나 싶었다.
-동요 아니야. 아무튼, 한 번 들어봐봐!
최 대표는 박성배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도 혼자 신나서 하이텐션을 유지하며 말했고, 곧 김유택의 휴대폰에 녹음된 하준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빠져든다 빠져든다 너에게~ 바다 물결 바다 물결 너에게~
‘바다 물결’의 후렴 부분을 듣자마자 박성배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몸을 우뚝 일으켜 세워 앉았다.
“아니, 잠깐만요. 이게 9살 하준이가 작곡한 곡이라고요?”
박성배가 너무 놀라 고함을 지르듯 물었다.
-깜짝이야! 맞아, 하준이가 작곡한 거. 제목은 ‘바다 물결’이래. 작사, 작곡 다 하준이가 한 거지.
-기타 연주도 하준이가 한 거예요.
옆에 있던 김유택이 최 대표의 설명을 거들었다.
“다, 다시 한 번만 들어볼게요.”
-아, 그럴래? 자다 깨서 아무래도 정신이 없겠구나. 다시 잘 들어봐.
박성배는 귀에서 휴대폰을 떼고 한번 후벼준 다음 정신을 집중해서 ‘바다 물결’ 노래를 들었다.
후렴구를 다시 들은 박성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니, 어떻게 9살 애가 이런 멜로디에 이런 가사를······!’
노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후렴구다. 후렴구가 귀에 쏙쏙 들어와야 하는데, 하준의 ‘바다 물결’은 딱 그랬다.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그에 딱 어울리는 가사.
가사 자체만 보더라도 멜로디 못지않게 좋았는데, 순수하면서도 중의적인 표현이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박 PD? 박 PD! 왜 아무 말이 없어? 끊겼나?
“아, 아닙니다. 노래가 참······ 좋네요.”
-그렇지? 으하하하. 진짜 장난 아니지? 난 벌써 흥얼거리고 있다니까!
-유퀴스 MC분들도 바로 따라서 흥얼거리시면서 앨범 내라고 그러셨어요.
이번에도 김유택이 옆에서 첨언했다.
-아무튼 이 노래 박 PD도 인정한다, 이거지?
최 대표가 흥분된 목소리로 확인했고, 박성배는 침을 꼴깍 삼키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정말 좋네요.”
-좋았어! 박 PD 확인을 받으니까 더 확신이 서네. 이거 당장 앨범 준비할 거니까, 조만간 프로듀싱 도와줘. 알겠지?
“싱글 앨범이요?”
-응, 일단은. 혹시 다른 자작곡 있으면 들어보고 미니 앨범으로 낼 수도 있고.
“네. 아, 근데 하준이 혹시 오늘 사무실 오나요? 이 곡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거 들어보고 싶은데······.”
박성배는 하준이 정말 이 노래를 작곡한 것인지도 궁금했고, 전곡도 너무 궁금했다.
-나도 당장 부르고 싶은데, 지금 부르긴 좀 그렇고, 내일 학교 끝나고 오후에 바로 오라고 할 거야. 그럼 그때 박 PD도 올래?
“네, 1시쯤 가면 되죠?”
-응, 근데 그때 박 PD 자는 시간 아니야? 괜찮겠어?
“피곤이 호기심을 이기지는 못하거든요. 갈 수 있습니다.”
-하하, 그래, 창작가들은 그럴 수 있지. 그럼 내일 보자.
최 대표는 싱글벙글 웃으며 전화를 끊었고, 박성배는 이번엔 잠에 방해를 받지 않으려고 아예 휴대폰 전원을 끄고 자리에 다시 누웠다.
하지만 박성배는 잠이 오지 않았다.
‘9살에 작곡이라니······! 그것도 이런 대중적인 곡을? 허참, 천재다, 천재다, 해도 작곡까지 벌써 할 줄은······. 근데 진짜 하준이가 만든 곡이 맞을까?’
박성배는 놀라움과 의심, 궁금함으로 한참 동안 잠을 못 이루다가 해가 거의 저물 때쯤 겨우 잠이 들었다.
***
다음 날, 하준은 방과 후 곧장 월드 엔터테인먼트 사무실로 향했다.
하준이 기타를 메고 사무실에 등장하자, 직원들이 평소보다 더 하준을 반겼다.
“어머, 우리 하준이 왔구나! 어깨에 멘 거 기타야?”
“하준아, 안녕! 하준이 벌써 작곡도 한다며?”
“기타 멘 거 봐! 너무 귀여워.”
“하준아, 유퀴스에서 한 얘기, 유택이한테 들었어. 우리를 위해서 구내식당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다며? 우리 다들 그 얘기 듣고 너무 감동받았잖아.”
“맞아, 어쩜 우리 하준이는 마음씨도 이렇게 고울까!”
“이쁜 짓만 한다니까. 우구, 이뻐라.”
매니저 김유택은 유퀴스에서 하준이 했던 구내식당 이야기를 다른 직원들에게 벌써 다 전했다.
김유택 역시 하준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받았기에 다른 직원들에게도 하준의 따뜻한 마음씨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 맛있는 밥 먹는 게 중요하잖아요. 헤헤.”
쏟아지는 칭찬에 하준은 쑥스러워하며 웃었고, 곧 대표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대표실에서는 최 대표가 미리 와서 대기하던 박성배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최 대표는 하준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하준에게 달려갔다.
“하준아, 하준아! 아이고, 이쁜 우리 복덩이!”
최 대표가 하준을 와락 껴안으며 외쳤다.
하준은 이때까지만 해도 최 대표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하준을 더 이뻐하는지 정확히는 몰랐다.
그냥 최 대표도 구내식당 이야기에 감동받은 줄 알았을 뿐.
최 대표는 하준에게 ‘바다 물결’ 노래 전곡을 듣고 싶다는 말만 했고, 앨범을 내자고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일단 전곡부터 들어보고 확인한 후에 말을 해도 늦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준은 잠시 최 대표에게 안겨 있다가 박성배에게도 인사했다.
“어? PD님도 와 계셨네요? 안녕하세요!”
하준은 저번 크리스마스 캐럴 앨범 때 박성배가 프로듀싱을 해주었기에 서로 안면이 있었다.
“응, 하준아, 나 하루 동안 궁금한 거 참느라 혼났어. 얼른 ‘바다 물결’ 노래부터 좀 불러봐라, 응?”
“아하하, 그래, 박 PD가 네 노래 후렴 부분만 듣고 감질난다면서 전곡 듣겠다고 왔어.”
“아하, 네, 그럼 바로 불러볼까요?”
하준은 메고 있던 기타 가방에서 기타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노래를 시작했다.
“처음 본 바다 물결은 내 마음을 닮았네~ 간질간질 반짝반짝~ 흔들리고 어지럽지만 네가 좋아~”
최 대표와 박 PD는 하준의 노래를 들으며 계속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입을 벌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가 하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노래가 끝나자, 손이 터져라 박수를 쳐댔다.
짝짝짝짝짝!!
“와, 좋다, 너무 좋아! 그치, 박 PD?”
“네, 진짜 너무 좋네요. 가사도 멜로디도, 기타 연주도, 거기다 보컬까지 전부 기가 막혀요. 후렴 부분만 듣고도 좋아서 이건 이 후렴 부분만으로도 무조건 차트 20위권엔 들겠다 싶었는데, 전곡 들어보니까, 이건 차트 5위권엔 들겠는데요?”
“정말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확신합니다.”
“아니, 근데 이렇게 남의 노래는 순위권을 척척 예언하면서 왜 자기 노래는 예측을 못 해?”
최 대표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박 PD를 타박했다.
박성배 PD는 월드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월드 엔터 소속 아이돌들의 곡 중 절반 정도가 박성배의 노래였다.
그 중 타이틀곡도 서너 곡 있었는데, 1위를 한 곡은 하준이 불렀던 작년 캐럴송 ‘이루어질 거예요’가 유일했다.
“에이, 대표님,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왜 있는데요? 그래도 ‘이루어질 거예요’는 1위 했잖아요. 물론 하준이 빨이 있긴 했지만요.”
박 PD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내가 그 곡 1위 해서 박 PD한테 아직 기대를 걸고 있어. 올해도 1위 하나 만들어봐. 알겠지?”
“네, 그래서 밤낮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 아무튼, 대표님, 하준이 이 곡, 바로 앨범 준비하시죠.”
“당연히 그래야지! 하준아, 이거 싱글 앨범으로 내자!”
하준은 진짜로 이 곡을 발매하자고 할 줄은 몰랐기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진짜요?”
“그럼, 진짜지! 방금 박 PD가 한 얘기 못 들었어? 최소 차트 5위. 이래 봬도 박 PD가 자기 노래 순위 예측은 못 해도, 남 노래 순위 예측은 80프로 이상 맞추거든.”
“와······ 감사합니다!”
이리하여 하준은 우연히 방송에서 자작곡을 공개했다가 앨범 준비를 하게 되었다.
***
“이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여보.”
윤기철이 머리를 감싸며 난감해했다.
하지만 입은 웃는 표정. 좋은 건 확실했다.
왜냐하면 오늘 드디어 <죽지 않는 백화점>이 관객수 700만을 넘었기 때문이었다.
“호호, 여보 예측이 기분 좋게 빗나갔네! 뭐, 어쩔 수 없지. 기쁘게 춰야지.”
최선희는 윤기철을 놀리듯 말했다.
윤기철이 이렇게 난감해하는 이유는, 맨 처음 무대인사에서 했던 춤 공약 때문이었다.
원래 그 공약은 배우들이 하기로 했지만, 하준이 윤기철에게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윤기철은 장르도 그렇고, 청불 영화기도 해서 아무리 많이 나와도 700만은 못 넘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승낙을 했었다.
그런데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일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으아, 나 춤 진짜 못 추는 거 당신도 알잖아······.”
“그러게, 누가 약속하래? 그래도 700만 넘었으니까 저절로 춤이 나올 만도 하지 않아?”
최선희는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때, 하준이 안방 문을 열고 외쳤다.
“700만 영화 감독 아빠! 얼른 가자! 레츠 고우!”
하준도 700만이 넘어서 기분이 좋은지 한껏 업된 목소리로 윤기철을 불러냈다.
“그, 그래. 음,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아주 엄청난 춤 실력을 보여주겠어!”
하지만 최선희는 윤기철을 말렸다.
“여보, 당신 춤 실력 믿지 말고 하준이한테 잘 가르쳐달라 그래. 하준이가 하라는 대로 해. 알겠지? 그럼 둘 다 잘 다녀와.”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올게.”
하준과 윤기철은 700만 공약 때문에 <죽지 않는 백화점>의 출연 배우들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월드 엔터의 최원상 대표는 그들을 위해 연습실을 흔쾌히 제공해주었고, 두 사람은 월드 엔터 사무실로 향했다.
월드 엔터 사무실 입구에서 그들은 <죽않백>의 다른 배우들도 만났다.
“아휴, 칠백만 감독님, 오셨습니까!”
“아휴, 칠백만 배우님들, 감사합니다.”
배우들과 윤 감독은 서로 칠백만 감독님, 배우님을 칭하며 즐거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준에게 <유퀴스> 이야기를 꺼냈다.
“오, 우리 하준이 <유퀴스> 출연으로 난리 났더라? 너튜브 동영상에 네 그 노래 앨범 내달라고 난리야.”
“노래 정말 좋더라. 나도 요즘 계속 듣고 있어. 너튜브에 누가 네 노래만 1시간 반복으로 만들어 놓은 게 있더라고.”
“그거 앨범 안 내? 진짜 좋던데.”
“사실은······ 곧 기사 나갈 거긴 한데, 싱글 앨범 준비 중이에요.”
하준이 쑥스러워하며 말하자, 배우들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오, 축하해!”
“축하해, 잘됐다. 너희 대표님이 뭘 좀 아시네. 이럴 때 딱 앨범 내야 하는 거거든.”
“대표님이 하준이 엄청 이뻐하시겠다. 하긴, 그러니까 이렇게 연습실도 빌려주시는 거겠지?”
배우들은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며 연습실로 들어갔다.
“우리 근데 무슨 춤 춰요?”
유송이가 다른 배우들에게 물었다.
“음, 당연히······ 하준이가 추자고 하는 춤! 왜냐? 우린 춤을 못 추니까, 하준이한테 배워야 하거든.”
차우민이 웃으며 말했고, 다른 사람들도 이의가 없다는 듯 하준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연습실 불이 탁 꺼졌다.
“어엇, 정전인가?”
다들 당황해하며 휴대폰으로 라이트를 비추는데, 연습실 문이 활짝 열리며 월드 엔터의 직원들과 아이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촛불을 밝힌 커다란 3단 케이크를 천천히 밀고 들어오는 최원상 대표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