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54화
‘있다!’
교탁 위 검은 상자에는 열쇠 구멍이 하나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하준이 교탁 앞에서 검은 상자를 살펴보고 있자, 왜 저러는지 의아해하며 하준을 주시했다.
하준은 다른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상자를 열어도 될지 고민이 되었다.
고민을 하던 하준은 잠시 검은 상자를 교탁 밑으로 내려서 열어보고 다시 올려놓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고, 판단과 거의 동시에 검은 상자를 두 손으로 들었다.
그런데 그때.
“야, 하준! 남의 물건을 그렇게 함부로 건드리면 안 돼!”
한 남자아이가 이렇게 말하며 교탁으로 달려 나왔다.
그러고는 하준이 든 검은 상자를 함께 탁 잡고 명령했다.
“손 놔. 이건 여기 그대로 둬.”
“이거 잠깐 밑에 내렸다가 다시 올려놓을 거야. 그리고 이거 네 물건도 아니잖아?”
“내 것도 아니지만, 네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여기 그냥 그대로 두자고.”
“하참······ 그냥 잠깐이면 된다니까 그러네.”
하준은 당황했지만, 절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자 그 남자아이는 검은 상자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까 안내해주시는 분이 우리 전부 가만히 대기하랬는데, 넌 왜 혼자 왔다 갔다 하면서 멋대로 교실 물건을 만지는 거야? 왜 안내를 따르지 않는 거냐고. 누군 돌아다니기 싫어서 가만히 있는 줄 알아? 다들 참고 이렇게 앉아 있는 거잖아.”
하준은 여기서 차마 게시판의 꽃 속에서 열쇠를 발견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게 다 테스트 같다고 말을 할 수도 없고······.’
물론 이것이 진짜 테스트인지, 하준만의 추측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하준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 눈에서 불꽃을 튀기며 서로를 응시했다.
그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하준이었다.
“너 이름이 뭐야?”
“내 이름은 왜?”
“넌 내 이름 알잖아. 난 네 이름을 모르고. 나도 네 이름을 알아야 공평하지.”
“음, 그건 그렇네. 내 이름은 정환이야. 공정환.”
하준은 이름을 듣고 흠칫 놀랐다. 이름까지 성격과 너무 잘 어울리게 공정한이라니.
“공정한? 진짜 네 이름이야?”
“아니, 한이 아니라 환! 공정환!”
“아······ 공정환. 나이는 나랑 동갑 맞지? 8살.”
“어.”
“그래, 알았어. 공정환, 너 잠깐 가까이 와봐.”
“왜, 왜······?”
공정환은 하준이 갑자기 가까이 오라니까 오히려 몸을 뒤로 뺐다.
“너한테만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잠깐이면 돼. 귀 좀 대봐.”
공정환은 하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귀를 가까이 댔다.
“나한테 열쇠가 있는데, 이 검은 상자 열쇠 구멍에 한 번만 넣어볼게. 안 맞으면 깨끗이 포기하고 자리로 들어가고. 어때?”
“진짜지? 근데 이 교탁 위에 둔 채로 해.”
공정환은 오로지 이 검은 상자를 그 자리에 두는 것만이 목적인 듯했다. 웬만한 애들 같으면 열쇠는 어디서 났냐고 물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뭐, 그래, 알겠어.”
이미 공정환이 열쇠에 대해 알게 됐으니 비밀로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 하준은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하준은 마침내 게시판 꽃 속에서 찾아낸 열쇠를 검은 상자의 열쇠 구멍에 꽂아볼 수 있게 됐다.
딸깍.
역시 그 작은 열쇠는 검은 상자의 열쇠가 맞았다.
검은 상자가 정말 열리자, 공정환은 깜짝 놀라 낮은 탄성을 질렀다.
“엇?!”
하준은 과연 이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기대하면서 검은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런데, 그 안에 든 것은······
또 다른 작은 열쇠였다.
“뭐야······?”
하준은 의아함에 공정환과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건 어딘가에 또 열쇠가 들어갈 구멍이 있다는 소린데······?’
일단 하준은 그 열쇠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공정환은 하준에게서 열쇠를 빼앗거나 거기 그대로 두라고 하지 않았다.
하준이 의아해서 공정환을 쳐다보았다.
공정환은 지금 약간 혼란스러운 상태로 보였다.
‘이 검은 상자 열쇠를 가진 거 보니 이 상자가 진짜 얘 거? 혹시 하준이는 오디션을 보러 온 게 아니라 다른 애들에게 뭔가 테스트를 하려고 온 건가? 그럼 그냥 둬야 할까, 아니면 도와줘야 하나? 근데 저 열쇠는 도대체 뭐지?’
공정환도 드디어 마음 속에서 호기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공정환의 태도는 돌변했다.
“하준! 그거에 맞는 거 찾으면 되는 거야?”
“응? 어어.”
하준은 왜 갑자기 공정환이 자기를 도와주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공정환은 하준이 가지고 있던 열쇠가 검은 상자의 열쇠고, 그렇다면 그 검은 상자의 주인은 하준일 확률이 높으므로 도와주는 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이 결론을 도출하는 데에는 자신의 호기심도 한몫했다.
하준과 공정환이 교실 여기저기를 뭔가를 찾는 듯 돌아다니자, 대기하던 다른 아이들은 황당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준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걸 말리던 공정환까지 하준처럼 교실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으니, 당연히 어이가 없을 수밖에.
둘이 열쇠에 맞는 구멍을 찾기 위해 교실을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는데, 드디어 안내직원이 다시 나타났다.
하준과 공정환은 얼른 자기 자리에 착석했다.
“226번, 나오세요.”
“네!”
한 아이가 불려 나갔고, 하준과 공정환은 안내직원이 나가자마자 다시 교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
한참 후, 하준의 오디션 차례가 되었다.
“247번, 나오세요.”
“네!”
하준은 오디션장으로 안내를 받았고, 하준은 가방과 지팡이를 들고 오디션장으로 입장했다.
“안녕하세요!”
하준이 유쾌한 어조로 인사하고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심사위원들은 총 5명이었는데, 모두들 환한 미소로 하준을 맞아주었다.
“하준 군, 반가워요. 실제로 보니까 더 귀엽네요.”
“감사합니다!”
심사위원들 중 가운데 앉은 사람은 유일하게 하준도 아는 얼굴이었는데, 그건 바로 <신입 도사와 비밀의 종소리>의 작가 주미연이었다.
아마도 원작자인 주미연은 이번 오디션에서 가장 날카롭게 심사를 할 것이라 짐작되었다.
“먼저 캐릭터와 잘 어울리는지 외모부터 좀 살펴볼게요.”
N플릭스의 유 CP가 이렇게 말하며 안내직원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안내직원은 머리에 두르는 띠를 가져와 하준의 머리에 매어주었다.
“왼쪽 바라보고, 다시 오른쪽.”
“활짝 웃어볼래요?”
“고민하는 표정 지어보세요.”
“놀라는 표정이요.”
심사위원들은 하준의 전체적인 얼굴을 살펴본 다음, 다양한 표정도 요구했다.
하준은 훌륭한 표정 연기를 선보였고, 심사위원들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배우는 다르긴 다르네. 그쵸?”
“그러게요. 이제 대사 시켜보죠.”
안내직원이 하준에게 짧은 대본을 건네주었고, 하준은 대사를 읽기 시작했다.
“쉿! 조용히 해봐. 어디서 종소리 들리지 않아? 진짜 이 소리 안 들려? 이 소리, 우리 입학할 때 들리던 소린데, 그럼 너희들은 도대체 어떻게 입학한 거야?”
“하하, 남 보고 돼지라고 놀리더니, 너야말로 돼지가 돼 버렸네? 그러니까 내가 입조심하라고 했잖아. 자꾸 돼지, 돼지 거리면 말이 씨가 된다고 말이야,”
하준이 대사를 읽고 나자, 심사위원들은 이번에도 역시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기본적인 테스트가 끝나자, 이제 심사위원들이 한 명씩 하준에게 질문을 던졌다.
“오디션에 지원하게 된 이유는 뭔가요?”
“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보면서 정말 이런 도술 학교가 정말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랬는데, 그걸 드라마로라도 직접 경험하고 생생하게 느껴보고 싶었거든요. 솔직히······ 진짜 도사가 되고 싶어요. 아, 그리고 마법보다 도술이 훨씬 멋있다고 생각해요.”
“도사 얘기할 때 표정에서 진실성이 느껴지네요. 하하. 근데 마법보다 도술이 훨씬 멋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뭔가요?”
“마법은 짧은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말로만 하잖아요? 근데 도술은 주문도 외우지만, 부적도 쓰고, 또 지팡이는 액션용으로 사용하니까 보기에 더 멋져요. 아, 그건 옷도 한몫하는 것 같아요. 긴 옷자락을 휘날리는 게 너무 멋지잖아요.”
하준은 신이 나서 조잘조잘 말했다.
“그리고 참, 하늘을 나는 것도 마법사들은 빗자루 타고 나는데, 도사들은 구름 타고요. 구름이 훨씬 멋있잖아요. 책으로 읽었을 때도 이런 게 상상돼서 너무 멋졌는데, 이걸 영상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얼마나 멋질까 싶어요.”
하준은 도사가 되어 구름을 타는 장면을 상상하는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하준의 표정을 본 심사위원들은 그의 천진난만함과 진실성에 벌써부터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근데, 그 지팡이는 왜 가져 왔어요?”
유 CP가 하준이 가져온 지팡이에 관심을 보였다.
하준은 얼른 지팡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지팡이는 아빠랑 제가 직접 나무를 깎아서 도사용 지팡이로 만든 거예요. 그리고 도사는 지팡이로 액션도 하기 때문에 저는 봉술을 조금 익혀왔습니다!”
“와, 열의가 대단하네요. 이왕 연습해 왔으니 한번 보여줄래요?”
“네!”
하준은 합기도장에서 배운 봉술을 심사위원들 앞에서 선보였다.
하준은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지팡이를 8자로 휙휙 돌리고, 머리 위에서 지팡이를 돌리면서 몸을 틀어 옆을 찌르는 동작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으며 멋지게 지팡이를 바깥쪽으로 뻗어 시범을 끝냈다.
그러자, 심사위원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와아! 이건 박수를 안 칠 수가 없네.”
“하준 군, 정말 멋있었어요.”
“하준 군은 타고난 것도 있지만, 굉장히 노력파인가 봐요. 이런 무술도 미리 준비해오고.”
“잘 봤어요!”
하준은 뿌듯하게 웃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심사위원들은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고, 곧이어 주미연 작가가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하준 군은 극중 주인공 박민후가 어떤 아이라고 생각하나요?”
“주인공 민후는 호기심 많고, 영리하고, 용감하고, 장난꾸러기이지만 정의로워요. 그리고 위험한 가운데서도 심각하지 않고, 익살스러운 성격을 보이는 게, 한국적 도사 캐릭터에 딱 맞는 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 캐릭터를 정말 잘 파악하고 있네요.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을 할게요.”
“네.”
“아까 대기실에서 왜 그렇게 돌아다녔죠?”
심사위원들은 대기실로 사용된 교실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그걸 통해 아이들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준은 뜻밖의 질문에 깜짝 놀라 잠시 대답을 못 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이렇게 대놓고 물어볼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돌아다닌 이유를 듣고 싶어서 묻는 거예요.”
주미연 작가가 부드럽게 다시 말했다.
“아, 네. 사실 저는 꼭 박민후 역할을 맡고 싶어서 얼마 전부터 민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연습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상황에서도 민후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생각해봤죠. 교탁 위에 검은 상자를 봤으면 민후는 분명히 호기심이 생겨서 살펴봤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게시판에 꽃도 뭔가 감춰진 것처럼 꽃잎이 모두 오므려져 있어서 그것도 궁금했을 것 같고요.”
하준의 대답에 심사위원들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열심히 오디션을 준비해온 아이가 없었던 것이다.
“대답 고마워요. 수고 많았어요. 이제 나가봐도 좋아요. 아, 검은 상자 안에 있던 열쇠는 돌려줄래요?”
주미연 작가가 하준에게 말했다.
하준은 주머니에 있던 작은 열쇠를 꺼내 주미연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뒤돌아 나오려던 하준은 다시 홱 돌아 주미연에게 대뜸 물었다.
“저, 근데 하나만 여쭤봐도 되나요? 그 열쇠에 맞는 구멍은 도대체 어디 있었어요?”
하준은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심사위원들은 그런 하준이 귀여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박민후가 여기 있었다면 딱 저랬을 거 같네. 주 작가님, 좀 알려주세요.”
유 CP가 주미연 작가에게 말하자, 주미연 작가가 웃으며 알려주었다.
“왼쪽 벽에 걸린 그림 뒤에 있었어. 그림을 떼어봐야 알 수 있지.”
“아, 그림에 뭔가 있을 것 같았는데, 떼어볼 생각은 못 했네요.”
하준이 그림에 뭔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 이유는 <신입 도사와 비밀의 종소리>에서 주인공 박민후가 학교에서 그림액자에서 종소리가 들린다며 다가가서 그림을 꺼내다가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럼 거기를 열쇠로 열면 그 안에는 뭐가 있나요?”
“그냥 그림 액자 뒤판이 열리고 그림을 꺼낼 수 있는 게 다야. 이건 일종의 관찰 카메라일 뿐이지 진짜 보물찾기는 아니었거든.”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속이 시원하네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하준은 정중히 인사하고 오디션장을 나왔다.
하준이 나간 뒤, 심사위원들은 별다른 상의를 더 하지도 않고 곧바로 하준의 지원서를 다른 아이들 것과는 따로 분리해 한쪽으로 옮겨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