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43화
며칠 후, 하준이 방과 후에 집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는데, 최선희가 하준을 불렀다.
“하준아, 그 곡만 끝내고 간식 먹으러 나와.”
“응.”
하준은 치던 곡을 마무리한 뒤 곧바로 주방으로 나왔다.
“오, 타락죽이네! 고마워, 엄마.”
하준은 진 우유 광고가 나간 뒤 진 우유를 팔아줘야 한다며 최선희에게 간식으로 타락죽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아참, 진 우유로 만든 거 맞지?”
하준이 환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며 노파심에 물었다.
하지만, 최선희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엔 진 우유로 만든 거 아니야.”
“응? 왜?”
하준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자기가 광고한 진 우유를 두고 다른 우유로 타락죽을 만들었다니!
“그게, 진 우유 못 샀어. 아까 마트에 갔는데 글쎄, 진 우유가 품절이지 뭐야?”
“정말?”
하준은 이게 잘 된 일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진 우유가 품절된 것은 잘 팔린다는 뜻이니 좋지만, 그래서 엄마가 다른 우유를 사서 타락죽을 끓여 줬으니 말이다.
하지만 최선희는 방긋 웃으며 설명했다.
“사실 잘하면 살 수 있었는데, 그냥 다른 사람들 많이 먹어보라고 일부러 냅뒀어. 내가 마트 우유 코너로 갔는데······.”
최선희가 마트 우유 코너에 갔을 때, 아줌마들 여러 명이 진 우유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게 그 진 우유지? 세자가 광고하는 그거.”
“응, 맞아. 우리 애가 그 광고 보더니 타락죽 먹고 싶다고, 꼭 진 우유로 해줘야 된다고 난리 났잖아.”
“난 내가 좀 해 먹일라구. 하준이 걔가 엄청 똑똑하대잖아. 얼굴도 잘생겼고, 키도 8살에 비해 큰 편이고.”
“피부도 찹쌀떡처럼 뽀얀 게, 진 우유 먹어서 그런 걸까? 걔가 진 우유 광고하는 이유가 진짜 진 우유를 먹어서 광고하는 거라더라구.”
진 우유 앞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모여들더니 다들 진 우유를 집어갔다.
최선희는 뿌듯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중에 가보니 진 우유는 모두 동이 나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번만 다른 우유 샀어. 작은 걸로. 마트 직원이 다음엔 진 우유 주문을 더 많이 넣을 거랬어. 호호.”
“와, 잘 됐다!”
하준은 그제야 활짝 웃었다.
진 우유를 마트에서 더 많이 가져다 놓으면 진 우유는 더 많이 팔릴 거고, 최선희도 진 우유를 살 수 있을 테니까.
“그치? 그러니까 이번만 하준이가 이해해줘.”
“응, 진 우유가 많이 팔린다니 다행이야.”
하준은 기뻐하며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
드디어 뮤지컬 오디션을 보는 날이 되었다.
월드 엔터테인먼트의 최원상 대표는 오디션에 동행하기 위해 직접 하준을 데리러 왔다.
“하준아, 안녕! 오늘 완전 귀공자구나!”
“안녕하세요. 대표님이 맞춰 주신 옷이 엄청 멋있어요.”
오늘 하준은 최 대표가 준비해 준 대로 피아노 공연 같은 무대에서 입는 밝은 색의 정장을 입고 있었다. 조끼까지 있는 깔끔한 정장에 나비 넥타이까지 한 하준은 누가 봐도 귀공자 같았다.
“맘에 든다니 다행이네. 잘 어울리니까 그것도 다행이고. 아, 안녕하세요, 작가님.”
최 대표는 최선희에게도 인사했다.
최 대표는 최선희의 단편 시나리오가 드라마로 방영된 후로는 꼬박꼬박 그녀를 ‘작가님’이라고 불렀다.
최선희는 처음에는 작가님이라는 호칭이 민망했지만, 자꾸 듣다 보니 좋았다.
자기를 작가님이라고 칭해주는 사람은 최 대표가 거의 유일하기도 했고, 작가님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받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같이 가주셔서 감사드려요. 대표님이 같이 가주신다고 하니까 저도 마음이 놓이고, 하준이도 든든하대요.”
“하하, 하준이가 이번에 뮤지컬 오디션은 처음 보는 거잖습니까. 우리 회사 에이스인데, 제가 당연히 같이 가서 멘탈 케어를 해줘야죠.”
최 대표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하준이 짐짓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에이스요? 제가요?”
“그럼! 성인들 빼고는 네가 완전 에이스지. 실력이나 성장성을 보면 성인들 포함해서도 네가 에이스고.”
“에이,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에요.”
“겸손하기는. 그래, 그럼 성장 가능성 에이스 정도로 타협하자.”
최 대표는 이렇게 말하면서 재빨리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아, 우리 얼른 가야 돼. 샵 예약 시간 다 돼 간다.”
“네네, 얼른 가요.”
세 사람은 후다닥 채비를 해서 최 대표의 차를 타고 헤어샵으로 향했다.
헤어샵에 들어서자마자, 하준을 발견한 헤어디자이너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어머, 오늘 하준이 엄청 멋있다!”
“귀공자네, 귀공자. 귀여워!”
“꺄아, 하준이 너무 이쁘다! 대표님, 하준이 오늘 스케줄 뭔데 이렇게 멋있게 차려입은 거예요?”
하준을 둘러싸고 호들갑을 떨던 헤어디자이너 중 한 명이 최 대표에게 물었다.
“오늘 오디션 있거든. 아, 머리는 자연스러운 곱슬 느낌으로 해줘. 멋있게!”
“무슨 오디션인데요?”
“그건 비밀. 오디션 통과하면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아, 궁금해······. 하준아, 꼭 통과해서 무슨 오디션 본 건지 누나도 알게 해줘. 알겠지?”
하준 담당 헤어디자이너가 하준에게 부탁했고, 하준은 노력해보겠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준아, 이쪽으로 앉아. 누나가 오늘 최고 멋있게 해줄게.”
“네, 부탁드려요.”
하준은 미용실 의자에 올라앉았고, 헤어디자이너는 심혈을 기울여 하준의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최 대표와 최선희는 대기 의자에 앉아 하준을 보며 대화를 나눴다.
“근데요, 대표님, 왜 이번엔 이렇게 의상과 헤어에 신경 쓰시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최선희의 물음에 최 대표가 이유를 설명했다.
“이번 오디션 심사위원들이 그걸 바랄 것 같아서요. 이번에는 기본적으로 지정곡, 지정안무, 지정연기를 보잖아요. 자유는 준비하되, 안 볼 수도 있다고 했고요. 그걸 보면 아무래도 캐릭터에 딱 맞는 배우를 뽑고 싶어 하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최대한 베토벤 느낌으로 준비해 가는 거예요.”
“아하! 확실히 기획사 대표님은 다르네요.”
“하하, 당연히 달라야죠. 그래야 소속 연예인들을 잘 키워줄 수 있으니까요.”
잠시 후, 하준은 귀여운 복슬 강아지처럼 변신해서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났다.
“엄마, 나 어때?”
“우리 하준이 너무 귀엽네! 아이, 이뻐라.”
최선희는 새로운 하준의 스타일이 마음에 드는지 두 손을 모으고 엄마미소를 보였다.
최 대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워했고, 세 사람은 이제 오디션장으로 출발했다.
“하준아, 떨려?”
운전을 하던 최 대표가 하준에게 물었다.
“조금요. 오늘 오디션은 보여줘야 할 게 많으니까요.”
“연습 많이 했으니까, 잘할 거야. 그리고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이거 안 되면 다른 거 하면 되니까. 하준이가 할 수 있는 건 많잖아.”
하준이가 혹시 부담감 때문에 제 실력을 다 보여주지 못할까 걱정이 된 최 대표는 하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 애썼다.
“네, 감사합니다.”
그때, 최선희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하준에게 물었다.
“하준아, 우황청심원 조금 먹을래? 안 떨리게 하는 건데.”
“아니, 안 먹어도 될 것 같아. 약 먹을 정도로 많이 떨리는 건 아니라서.”
“그, 그래? 그럼 엄마가 먹는다?”
“엄마가? 엄마가 왜?”
“내가 더 떨리니까 그렇지. 후우.”
최선희는 이번 오디션은 하준이 준비도 많이 하고 여러 가지를 다 잘해 내야 하는 거라 걱정과 긴장이 동시에 되고 있었다.
“내가 오디션 보는데, 왜 엄마가 떨려?”
하준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원래 엄마들은 그런 거야. 자식 걱정이 얼마나 된다구.”
최선희는 대답을 하자마자 얼른 우황청심원을 먹었다.
하준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서 긴장을 하는 최선희가 고맙고, 최선희에게 그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든든하고 행복했다.
“헤헤, 엄마, 나 잘 할 테니까 걱정 마.”
하준은 최선희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최선희를 꼭 안아주었다.
그 모습을 룸미러로 본 최 대표는 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입장이 바뀐 것 같은데요? 하하.”
“어머, 그, 그렇죠? 미안, 하준아. 엄마가 하준이를 응원해줘야 하는 건데······.”
최선희가 민망해하며 하준에게 미안해하자, 하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이렇게 날 걱정해주는 엄마가 있는데, 내가 무서울 게 뭐 있겠어? 나 항상 내 뒤에 엄마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하나도 안 떨려졌어.”
“오구, 우리 아들은 누굴 닮아서 이렇게 착하고 어른스러울까. 엄마가 배워야겠다.”
이번엔 최선희가 하준을 꼭 안아주었고, 하준은 엄마 품에서 정말 긴장이 모두 풀렸다.
이런 저런 대화가 오가는 사이, 곧 최 대표의 차는 오디션장에 도착했고, 세 사람은 오디션장 대기실로 들어갔다.
오디션장 대기실에는 다수의 아이들과 그들과 함께 온 부모 또는 매니저들까지 대기하고 있어서 시끌벅적했다.
“엄청 시끄럽네······.”
최 대표가 중얼거렸다.
아이들은 저마다 연습을 하느라 난리였다.
어떤 애들은 귀를 막은 채 노래를 불러댔고, 어떤 애들은 연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혹시 모를 자유 안무 시험을 위해 춤을 추고 있는 애들도 몇 명 있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오늘 오디션 지원자가 몇이나 된대요?”
최선희가 한쪽 귀를 막고 물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스무 명 남짓이라고 합니다.”
“꽤 많네요. 하준아, 시끄러우면 엄마처럼 귀 막고 있을래?”
최선희가 하준을 걱정하며 물었는데, 갑자기 서서히 소음이 줄어들더니 조용해졌다.
하준을 바라보던 최선희가 의아해서 돌아보니,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하준에게 쏠려 있었다.
모두들 하준을 알아보고 놀라 잠시 말문이 막힌 것이다.
“하, 하준이다······.”
한 아이가 정적을 깨고 중얼거리자, 고였던 물이 한꺼번에 터지듯 대기실의 사람들은 갑자기 다시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연습이 아니라 하준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떡해, 하준이야, 하준! 쟤 연기 잘하기로 소문난 애잖아.”
“일단 합격자 3명 중에 하나는 쟤겠다······.”
“하아, 하준이 쟤는 왜 왔대······.”
“TV에서도 잘 나가는 애가 왜 뮤지컬까지, 쳇.”
“근데 참, 쟤 노래도 잘하잖아? 힝······.”
아이들은 대체로 탄식과 절망의 소리를 해댔다.
하지만 엄마들과 매니저들은 아이들을 독려했다.
“아냐,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야! 아들, 파이팅!”
“드라마 연기랑 뮤지컬 연기는 달라. 네가 더 잘 할 수 있어.”
“네 특기는 피아노잖아. 이번 건 피아노 연주도 무척 중요해. 점수 합산이니까, 가능성 있어.”
“아, 우리 아들은 춤을 잘 추잖아. 하준이 쟤는 춤은 못 출 거야.”
실망감에 빠져 있던 아이들은 엄마와 매니저의 응원으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시끌벅적하게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하준은 그들의 반응이 좀 당황스러웠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디션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그들을 신경 쓰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준은 집에서 목도 풀고, 손가락도 풀고, 몸도 풀고 왔기에 대기실에서는 괜히 무리해서 연습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하준과 최 대표, 최선희는 그저 편안히 대기실 의자에 앉아 대기했다.
약 10분 후, 안내직원이 나타나 번호표를 나눠주었는데, 하준은 19번이었다.
“음, 매는 먼저 맞는 게 좋은데, 너무 늦네.”
최 대표가 번호가 너무 늦어 아쉽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순서는 변경할 수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차 오디션 시작하겠습니다. 1번 들어오세요.”
안내직원의 호명에 따라 1번 어린이가 오디션장으로 입장했다.
1차 오디션은 지정곡과 지정연기를 함께 보는 오디션이었다.
지정곡은 피아노 연주를 하면서 노래를 불러야 했기에 실질적으로 1차 오디션은 피아노 실력, 노래 실력, 연기 실력을 한꺼번에 다 평가하는 오디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최선희는 안에서 어떻게 오디션을 보는지 궁금해서 귀를 기울여 봤지만, 오디션장의 방음이 잘 되어 있는지, 오디션장의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소리를 들어보려고 조용히 했다가, 곧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각자 다시 연습에 몰두했다.
한 명당 오디션은 약 3분~5분 정도 소요되었고, 약 한 시간 20분 뒤, 드디어 기다리던 하준의 차례가 되었다.
“파이팅!”
최 대표와 최선희는 하준에게 파이팅을 외쳐주었고, 하준은 대기실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오디션장으로 입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