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41화
강현기는 하준과 대화하면서 통통한 볼에 계속 눈길이 갔다.
하지만 처음 만났고, 친하지도 않은데 대뜸 볼을 만지면 하준이 당황스러워할 것 같았다.
그래도 너무 탐이 났기에 강현기는 조심스럽게 부탁을 했던 것이다.
하준은 뭔가 대단한 부탁일 줄 알고 걱정을 했는데, 황당한 부탁 내용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선배님은 그런 걸 뭘 심각하게 부탁까지 하세요? 그냥 만져보셔도 되는데······.”
“정말? 고마워! 아, 선배님이라고 하지 말고 형이라고 불러. <월야> 메이킹 영상에서 보니까, 재혁이한테도 형이라고 부르던데.”
“아, 메이킹 보셨군요. ······네, 형.”
“그래, 그럼 볼 한 번만 만져 본다?”
“네.”
하준은 살짝 미소를 띤 상태로 얼굴을 강현기 쪽으로 조금 들이댔다.
강현기는 커다란 손으로 하준의 볼을 살살 쓰다듬어 보더니 검지로 살짝 찔러보기도 했다.
“오, 너무 말랑말랑해. 귀여워 죽겠다, 으흐흐.”
하준의 볼을 만져본 강현기는 말랑한 볼을 가진 하준이 너무 귀엽다면서 빙구 웃음을 지었다.
‘현기 형 엄청 무서운 줄 알았더니, 되게 의외네.’
강현기는 연기에 몰입을 강하게 하는 편인 데다가 맡은 역할들이 대부분 고생하거나 복수의 칼을 가는 피폐한 역할들이라서 사람들에게는 심각하고 어두운 이미지로 많이 인식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강현기는 귀여운 것을 엄청 좋아하는 듯했다.
심지어 휴대폰 배경화면이 토실토실한 고양이, 일명 뚱냥이였다.
“형, 이 고양이, 형이 키우는 고양이예요?”
하준이 강현기의 휴대폰 배경화면을 보고 물었다.
“아, 아니야. 난 촬영 때문에 집에 못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서 애완동물 안 키워. 혼자 하루종일 있으면 동물들이 외롭잖아. 나중에 일 안 하면 키워야지. 이건 그냥 내 휴대폰을 지키는 고양이지. 난 이렇게 토실토실한 거 보면 너무 귀여워서 기분이 좋아지거든.”
“아하, 토실토실한 거 좋아하시는구나요.”
“응, 그래서 네 볼이 너무 탐났어. 하하. 귀여워······.”
강현기는 하준의 볼을 한 번 더 슬쩍 쓰다듬으며 좋아했다.
하준은 무서워 보였던 강현기가 자신을 이렇게 귀여워하니 얼떨떨하면서도 마음이 편해졌다.
“그럼 형은 다시 대본 좀 볼게. 너도 대본······.”
강현기는 하준에게 대본을 보라고 말하려다가 하준의 주변에 대본이 없다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어? 너 대본 어딨어?”
“아, 대본 안 가져왔어요.”
“뭐? 왜? 잃어버렸어?”
“아뇨. 그게, 대사 다 외웠거든요.”
“아······ 근데 대사 다 외웠어도 씬 몇인지도 알아야 하고, 지문 내용도 봐야 하잖아?”
강현기는 하준이 대본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강현기는 연기에서 대사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체 내용의 맥락, 행동 등도 연기를 하는데 무척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기에 대사만 외웠다고 대본을 가져오지 않은 하준이 좀 불성실하게 느껴졌다.
“그것도 다 외웠어요.”
“뭐? 그것도 다? 몇 씬인지, 지문이 뭔지도 다 외웠다는 얘기야?”
강현기가 화들짝 놀라 다시 물었다.
“네, 대본을 통으로 그냥 다 외웠어요.”
“교과서를 통으로 외운다는 애들이 가끔 있다더니, 대본을······! 와, 대단하구나.”
시험 때 교과서를 통째로 외운다는 애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대본을 그렇게 외우는 애가 있을 줄이야.
강현기는 입을 쩍 벌리며 놀라움을 표출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믿기지 않아서 이따가 한번 유심히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모든 배우들과 연출팀이 모였고, <메모리즈> 대본리딩이 시작되었다.
1화에는 주인공 하태산의 어린 시절 이야기였다.
첫 장면은 하태산의 아빠 역할인 배우 김진철과 하태산의 엄마 역할인 배우 한주경이 협의이혼 후 헤어지는 장면.
극중 검사인 하태산의 아빠는 극중 변호사인 하태산의 엄마와 같은 사건을 맡게 되면서 서로 극명한 입장 차이로 싸움을 반복하다가 결국 사이가 틀어져 이혼을 하게 되었다.
“태산이는 내가 잘 키울게. 그래도 가끔 만나서 아빠 노릇 해줘. 애가 당신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알지?”
한주경이 담담하게 연기하자, 김진철도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동안 미안했어. 너 고생만 시킨 것 같아서 마음이 좀 그렇네.”
“알긴 아네······. 음, 나도 심하게 말했던 거 미안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충고 하나만 할게. 너무 윗사람들한테 충성하지 마. 사냥개는 사냥이 끝나면 버려진다는 거, 많이 봐서 알고 있잖아.”
“사냥개는 버려지지만 자기 팔은 자르지 않아. 내 처신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걱정 마.”
고집스러운 김진철의 대사 후, 한주경은 말이 안 통한다는 듯 답답해하며 말했다.
“후, 이러니까 우리가 헤어지는 거야. 몸조심해. 간다.”
첫 장면이 끝나자, 김학수 PD가 간단히 몇 가지 지적했다.
“전체적인 톤은 좋았는데, 진철 씨, 대사가 조금 빠른 것 같아요. 약간 느리게 해주고, ‘내 처신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걱정 마’ 여기는 좀 더 원래 성격이 드러나게, 차갑고 딱딱하게 연기해줬으면 좋겠어요. ‘내 처신~’ 그 부분 다시 한 번 해볼래요?”
“네, 내 처신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걱.정.마.”
“좋습니다. 그렇게요.”
김진철은 김 PD가 지적한 것을 대본에 열심히 적었다.
그런데 김진철이야 자기 대사니까 지적한 부분을 적는 게 이상하지 않지만, 강현기 역시 그걸 적고 있었다.
강현기는 사실 타고난 연기파가 아니라 엄청난 노력파였다.
자기가 언제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될지 모르니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분석하고 참고사항을 적어놓는 것이다.
‘와, 현기 형은 지금도 연기 엄청 잘하는데 아직도 엄청 노력하는구나.’
하준은 그런 강현기를 보고 존경심이 생겼다. 그리고 아까 자신이 대본을 안 가져왔다고 할 때 보였던 황당한 표정이 이해가 갔다.
‘날 열심히 안 하는 애로 봤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하준은 그게 아니었다. 뛰어난 기억력 덕분에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뿐인데······.
하준은 강현기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기에, 오늘 연기는 더 잘해 보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자, 그럼 다음 장면.”
김 PD가 조연출에게 사인을 보내자, 조연출은 다음 장면의 지문을 읽었다.
다음 장면은 하태산의 아빠가 검찰에서 사건 조사를 하는 장면이었고, 뒤이어 하태산의 엄마가 변호를 하는 장면까지 리딩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어린 하태산 역의 하준이 등장하는 장면이 되었다.
“씬 8, 하공철의 집, 늦은 오후, 태산을 데려다주러 온 수정, 태산은 공철을 보고 달려가 안긴다.”
조연출의 설명이 끝나고, 하준이 연기를 시작했다.
하준은 양팔을 위로 뻗으며 명랑하고 귀여운 목소리로 외쳤다.
“아빠아!”
“읏차. 우리 태산이 잘 지냈어?”
“응, 요즘 엄마가 갑자기 착해졌어. 나 해달라는 거 다 해줘. 돈가스도 많이 사주고, 로봇 장난감도 사줬다?”
그러자 한주경이 멋쩍은 헛기침을 한번 했고, 하준은 방긋 웃으며 김진철에게 천진하게 물었다.
“아빠는 나쁜 놈들 많이 때려잡았어?”
“그럼! 엄청 많이 잡았지.”
“그래, 그럼 됐어. 원래 영웅은 바쁜 거니까, 내가 이해할게.”
“고마워, 아들.”
김진철은 고맙다는 대사를 하면서 허공에 대고 얼굴을 비비는 듯한 시늉을 했고, 하준 역시 지문에 나왔던 대로 아빠의 애정표현을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듯 얼굴을 빼는 시늉을 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내일 애 학교 잘 데려다줘. 오후에 학교 픽업은 내가 갈 테니까.”
한주경의 대사 후, 김진철은 고개를 끄덕였고, 한주경은 하준에게 말했다.
“태산아, 엄마 갈게. 아빠랑 오늘 잘 놀고, 내일 보자.”
“응, 엄마, 안녕.”
다들 대본을 보며 대사만을 주고받았지만, 대본을 모두 외운 하준은 직접 그 사람들을 바라보며 행동과 대사를 했다.
인사할 때도 역시 태산의 엄마 역인 한주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기까지 했다.
“자, 들어가자. 우리 아들이랑 뭐부터 할까······.”
김진철이 씬 8에서의 마지막 대사를 마치자, 김 PD는 하준의 연기를 극찬하며 만족스럽게 외쳤다.
“아이고, 잘한다! 하준이는 명랑한 것도 잘하네!”
저번 미팅에서 하준이 보여준 연기는 깊이 있는 감정 연기였다면 이번 연기는 진짜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느낌을 보여줘야 하는 장면이었다.
물론 이 장면에서 극중 어린 태산은 뛰어난 청력과 기억력을 가진 아이라서 이미 부모님의 이혼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태산은 부모가 원하는 대로 부모의 이혼을 모르는 척하고 있는 상황. 일부러 더 밝고 천진난만하게 행동하는 연기가 필요했다.
사실 연기를 잘한다고 평가받는 아역 배우들도 모든 장면의 감정 연기를 다 잘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김 PD는 이번 장면에서 하준의 연기에 귀를 기울였다.
저번 미팅에서 하준의 우울하고 두려움에 떠는 연기를 봤지만, 그와 반대되는 밝은 연기는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보란 듯이 하준은 완벽한 연기를 펼쳤고, 김 PD의 입에서는 칭찬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준이 엄청 귀엽게 잘한다!”
“와, 하준이는 발음도 좋고, 연기도 잘하네요.”
“저런 아들 있으면 맨날 돈가스 사주고 로봇 사주겠다. 하하.”
김 PD의 칭찬에 이어 다른 배우들도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런데 한 조연 배우가 의아하다는 듯 하준에게 물었다.
“근데 하준이는 대본도 안 보고 하던데, 대사 다 외운 거야?”
그러자 하준 대신 노은지 작가가 웃으며 답해주었다.
“하준이는 이미 대사 다 외웠대요. 맨 처음에 미팅했을 때부터 대사 다 외워왔었어요.”
“와, 머리도 좋구나! 진짜 저런 아들 있으면 좋겠네.”
“하준이 천재라는 소문 돌던데, 진짠가 봐!”
“진짜 그런 소문이 돌아요?”
“응, 하준이랑 작품 같이 한 사람들한테 들었어.”
노 작가의 말에 다들 한마디씩 하며 놀라고 있는데, 강현기가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준이는 제가 봐도 정말 천재 같아요! 혹시 방금 하준이 동작이나 표정 연기 보셨어요?”
“응? 대본 보느라 그건 잘 못 봤는데······.”
김 PD의 대답에 강현기는 자기가 유심히 살펴본 하준의 연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준이는요, 대사만 외운 게 아니라 지문의 행동, 감정까지 다 외웠어요. 그래서 방금 연기하는 걸 보니까, 그 대사에서의 행동 묘사까지 같이 하고, 표정 연기도 하고 있었어요. 특히 마지막에 ‘엄마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던 태산이 돌아서면서 잠시 표정이 어두워진다’고 되어 있었는데, 그거까지 표현하더라니까요!”
“오, 그랬어?”
“와, 하준아, 정말이야?”
김 PD와 노 작가가 감탄하며 하준에게 물었다.
“네, 저는 대사랑 행동, 표정을 같이 묶어서 외워서요. 대사하면 저절로 그렇게 돼요.”
“와······ 부럽네, 부러워.”
“아구, 이뻐라.”
“하하, 하준이는 연기 천재 맞구나!”
다들 하준의 신통방통한 연기력에 감탄하며 하준이 예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준이 진짜 대본의 모든 것을 외우고 있다는 걸 확인한 강현기 역시 하준을 예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준은 이날 대본 리딩에서 명랑과 분노, 우울한 감정을 넘나들며 카멜레온 같은 연기를 선보였고, 대본 리딩장 사람들은 하준이 연기를 펼칠 때마다 놀라워하며 하준을 극찬했다.
또한 대본 리딩장을 찾은 기자들 역시 하준에게 큰 관심을 보이며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대본 리딩이 끝나자, 기자들은 원탑 주인공인 강현기와 그 아역인 하준에게 달려와 동반 인터뷰를 요청했다.
“강현기 씨, 하준 군, 잠깐 인터뷰 좀 해주세요!”
드라마 홍보를 위해 인터뷰는 하는 것이 좋았기에 강현기는 당연히 오케이를 했고, 이제 걸릴 것이 없는 하준도 인터뷰 요청에 응했다.
그리하여 강현기와 하준은 대본 리딩장에 남았고, 곧 인터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