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40화
“하준아, 재밌겠지?”
하준의 환한 표정을 본 한범우는, 하준이 무조건 허락하리라 짐작하고 물었다.
“네, 재밌을 것 같아요! 저 새로운 거 하는 거 좋아하거든요.”
“좋았어! 우리 하준이는 도전 정신이 있어서 좋아.”
“근데 저 콘서트도 한 번도 안 가봐서 어떻게 진행되는지 몰라요.”
“어차피 미리 연습도 하고 리허설도 할 거라서 콘서트 안 가봤어도 별 상관은 없어. 사실 음악 프로그램이랑 특별히 다를 것도 없고. 그래도 하준이가 콘서트 못 가봤다니까 내가 아는 지인 콘서트 티켓 구해다 줄게.”
“와, 정말요? 감사합니다!”
한범우와 하준의 대화가 끝나고, 최 대표가 말했다.
“그럼 하준이 스케줄 봐서 날짜 조율하면 될 것 같네요.”
그때 마침 윤기철과 최선희가 볼일을 마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고, 최 대표는 그들에게도 이 사실을 전달했다.
당연히 그들은 하준의 결정에 동의했다.
한범우는 원하는 답을 얻었기에 기분 좋게 작별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가려 했다.
그런데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대표님, 하준이 연습시켜 봤는데요, 하준이는 춤에도 재능이 엄청납니다!”
“정말?”
춤 선생님인 전종일이 최 대표에게 흥분해서 말하자, 최 대표가 놀라서 눈이 커졌다.
거기다 옆에 있던 윤기철과 최선희도 놀라서 물었다.
“하준이가 정말 춤도 잘 춥니까?”
“와······ 근데 잠깐 가르쳐보셨는데, 그렇게 금방 재능을 알 수 있는 건가요?”
“아휴, 제가 춤 짬밥이 얼만데요. 잠깐 봐도 압니다. 아, 춤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알 수 있을 정돈데, 다들 한 번 와서 보시겠어요? 하준아, 괜찮지?”
전종일은 자신 있게 답했고, 하준에게 춤을 한번 보여주자고 했다.
하준은 어차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춤을 보여줘야 할 테니,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자, 그럼 연습실로 가시죠.”
전종일이 세 사람을 이끌고 연습실로 향하려는데, 불쑥 한범우가 나타났다.
“저······.”
“어? 한범우 씨, 아직 안 가셨어요?”
“그게, 제가 가려고 했는데요, 하준이가 춤을 잘 춘다는 얘기를 들어버렸지 뭐예요. 그래서 궁금해가지고······ 저도 살짝 구경하고 가면 안 될까요? 하준아, 그럼 안 될까? 부담스럽니?”
한범우가 주저리주저리 이유를 말하고는 하준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뭐, 전 구경하셔도 상관없어요.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하준이 쿨하게 답하자, 다른 사람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고맙다. 내가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기도 하고, 하준이에 대해 워낙 관심이 많아서 그래.”
이리하여, 최 대표, 윤기철, 최선희, 그리고 한범우는 다 함께 하준의 춤을 구경하게 됐다.
“자, 하준아, 아까 배운 10가지 스텝 차례로 한번 해보자.”
전종일은 곧바로 댄스 음악 하나를 틀었고, 하준은 음악이 흘러나오자마자 음악에 맞춰 업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좋아, 자, 첫 번째 스텝부터. 파이브, 식스, 세븐, 에잇! 원, 투, 쓰리, 포······.”
전종일의 카운트에 맞춰 하준은 조금 전에 전종일에게 배운 스텝을 선보였다.
전종일도 하준의 옆에서 함께 춤을 췄는데, 두 사람의 리듬과 박자가 딱딱 맞아서 단지 간단한 스텝을 보여주는데도 군무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와아! 둘이 한 몸 같아.”
“어머, 춤 선생님이랑 하준이랑 몸 움직임이 똑같아. 엄청 잘한다!”
“이야, 두 사람이 박자 딱딱 맞네. 진짜 잘한다······!”
윤기철과 최선희, 한범우는 입을 쩍 벌리고 박수를 치며 놀라워했다.
최 대표는 처음에는 집중해서 하준의 춤을 감상하다가 이내 헛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허, 내가 아이돌 여럿 키워봤지만, 저렇게 라인이 예쁘게 춤추는 애는 처음 봐.”
하준의 춤추는 라인은 최 대표의 말처럼 물 흐르듯 부드럽고 동작 하나하나가 아름다웠다.
전종일은 다섯 번째 스텝 즈음 춤을 멈췄다.
“하준아, 이제 혼자 해보는 거야. 6번 스텝, 파이브, 식스, 세븐, 에잇!”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전종일의 지시에 따라 하준의 단독 무대가 펼쳐졌다.
하준은 한 번 스텝을 알려준 뒤, 한 번 노래에 맞춰봤을 뿐이었는데, 이미 모든 스텝을 익히고 있었다.
하준은 전종일 없이 10번까지의 스텝을 모두 완벽하게 보여주었고, 심지어 전종일이 스텝 번호만 말하면 바로바로 스텝을 바꿔 춤을 췄다.
최 대표를 비롯한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까까지야 전종일을 따라서 잘 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혼자서 스텝을 다 외워서 완벽하게 춤을 췄기 때문이다.
“와아, 잘한다!”
“우리 하준이 장하다, 장해.”
하준의 춤이 끝나자, 한범우와 최선희가 박수를 보내며 외쳤다.
최 대표와 윤기철은 입을 쩍 벌리고는 손이 터져라 박수를 쳤고, 하준은 쑥스러워하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박수 소리가 또 있었다.
“응?”
전종일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연습실 유리문 밖에 아이돌 연습생 아이들 몇 명이 붙어있었다.
“어? 애들이 벌써 왔네.”
전종일이 문을 열어주자, 고등학생 아이들은 우르르 들어오더니 말을 쏟아냈다.
“와, 쟤 하준이 맞죠? 귀엽다! 근데 춤 엄청 잘 추네요!”
“하준아, 안녕! 너 춤 되게 잘 춘다. 대박이야!”
“노래만 잘하는 게 아니었네. 춤 엄청 잘 춰!”
하준은 뜬금없는 구경꾼들 등장에 당황했지만, 일단 배꼽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러자 고등학생 아이돌 연습생들은 하준이 귀엽다며 활짝 웃었다.
“아, 근데요, 쌤, 쟤 벌써 아이돌 준비하는 거예요?”
한 연습생이 합리적 의심을 하며 물었다.
하준이 노래를 원래 잘하고, 얼굴도 잘생겼고, 게다가 지금 이렇게 춤 연습을 하고 있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의심이었다.
“하하, 그럼 좋겠지만, 아직은 아니야. 곧 뮤지컬 오디션이 있거든. 그거 때문에 춤 연습하는 거야.”
“와, 뮤지컬이요? 하준이 벌써 저 나이에 뮤지컬 하는 거예요? 대박.”
“하긴, 하준이 연기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니까 뮤지컬도 할 수 있겠다! 지금 보니까 춤도 잘 추고요.”
“근데 말이야, 하준이 방금 스텝 밟은 거 조금 전에 처음 배운 거다?”
전종일은 하준의 재능을 자랑하고 싶어서 연습생 아이들에게 넌지시 말했다.
“네에? 저게 오늘 배운 거라고요?”
“그렇다니까. 내가 딱 한 번 가르쳐줬다. 하하. 하준이는 연결된 몸이야.”
“헛! 쌤이 그렇게 말하던 그 ‘연결된 몸’이요?”
“그렇다니까. 스텝만 알려주면 상체는 알아서 움직여. 게다가 기억력도 엄청 좋아서 벌써 스텝 다 외웠고.”
“우와······ 부럽다! 아무래도 하준이는 영재인가 봐요. 영재발견단에 나가야 될 거 같아요.”
한 연습생이 이렇게 말하자, 다른 아이들도 맞다며 영재발견단에 나가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자자, 난 하준이 레슨 더 해야 하니까, 너희들은 3연습실 가서 연습하고 있어.”
전종일은 연습생들을 내보냈고, 다시 최 대표에게 와서 하준의 장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표님, 하준이는 팔을 뻗으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가슴에서 손을 시작해서 바깥으로 뻗어요. 그게 춤 동작이나 라인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거든요. 하준아, 해봐.”
전종일이 하준에게 지시하자, 하준은 양팔을 가슴으로 접었다가 바깥으로 펼쳤다.
“보세요, 이 라인! 너무 이쁘죠! 제가 봤을 때, 하준이는 이번 뮤지컬에서 춤은 무조건 통과될 거예요. 외우는 것도 잘하고 보고 따라하기도 잘해서 지정안무도 걱정없고요.”
“오, 전 선생, 그럼 춤은 금방 준비될 거 같다는 거지?”
“네, 하준이는 스펀지처럼 금방금방 흡수하니까요. 그래도 다양한 거 가르쳐 놓을게요.”
“좋아, 좋아. 이거 엄청 기대가 되는구만. 하하.”
최 대표는 껄껄 웃으며 기대에 부푼 표정을 지었다.
하준은 이날 기본 스텝에 다양한 팔동작을 추가한 춤들을 배웠고, 춤이 잘 춰지니 스스로도 신나서 열심히 춤연습을 했다.
***
얼마 후, 노은지 작가의 <메모리즈> 대본 리딩 날이 되었다.
하준은 오늘 처음으로 같이 출연할 배우들과 만나게 되는 것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MBS 방송국으로 향했다.
하준이 대본리딩실로 들어서자, 연출팀 사람들과 주조연배우들 여러 명이 하준에게 몰려들었다.
“안녕, 하준아. 반가워.”
“네가 하준이구나! 귀여워라.”
“네가 그렇게 연기를 잘한다며? 얼굴도 잘생겼는데, 연기도 잘하고 나중에 크게 되겠다.”
“하준이 노래도 잘하잖아요. 만능 엔터테이너예요, 만능.”
하준은 언제나처럼 환대에 배꼽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그런데 주인공 하태산 역할을 맡은 배우 강현기는 하준이 등장했음에도 굳은 표정으로 대본만 열심히 보고 있었다.
‘강현기 배우님이다······.’
하준은 <메모리즈> 캐스팅 기사를 봤기에 강현기가 성인 하태산 역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현기는 29세로, 연기와 액션을 모두 잘하는 알아주는 배우였다.
그래서 복수하는 캐릭터를 많이 연기했고, 대박작은 없어도 웰메이드 드라마라고 평가받는 작품에 많이 출연했다.
‘좀 무섭다······.’
하준은 강현기의 날카로운 눈빛과 무표정에 조금 겁을 먹었다.
캐스팅 기사를 보고 찾아본 작품들에서 강현기는 대부분 강인하고 어두운 역할로 많이 나왔다.
그래서 하준은 안 그래도 되게 카리스마 있는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보니까 뭔가 무서운 포스를 내뿜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조금 남을 무시한다는 소문까지 있어서 하준은 강현기가 자신을 안 좋아하나 걱정이 되었다.
하태산의 아역인 하준의 자리는 강현기의 바로 옆자리였다.
하준은 조심조심 이동해 강현기의 옆으로 갔다.
강현기는 여전히 하준을 쳐다도 보지 않고 대본을 읽는 데에 열중해 있었다.
하준은 강현기에게 인사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인사를 안 할 수는 없어서 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강현기는 듣지 못한 것인지 대꾸가 없었다.
하준은 민망해하며 일단 자리에 앉았다.
그때, 맞은편에 앉은 하태산의 엄마 역인 배우 한주경이 강현기의 앞 테이블을 똑똑 두드리며 말했다.
“현기야, 하준이가 인사하잖아. 네 아역인데 인사 좀 해줘.”
“아, 저는 괜찮아요······.”
하준은 괜히 강현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까 싶어 얼른 손사래를 쳤다.
그 순간, 강현기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어엇! 선배님, 얘 언제 왔어요?”
“언제 오긴, 좀 전에 와서 다들 막 인사하고 그랬어. 넌 대본 볼 때는 주변 소리 하나도 못 듣는 게 문제야.”
“아, 죄송해요.”
“나한테 죄송할 건 아닌데, 그래서 너 맨날 오해받잖아. 싸가지 없다고. 하준이도 네 눈치 보느라 어정쩡하게 앉아 있는 거 봐.”
“아, 네. 제가 안 그러려고 하는데, 잘 안 되네요.”
강현기가 한주경에게 미안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는 하준을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하준아, 미안. 내가 대본 보면 너무 집중을 해서 눈에 뵈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없어서 그래.”
“아하······ 전 절 싫어하시는 줄 알고······.”
“아냐, 에휴, 내가 이래서 맨날 오해를 받는다니까. 나 너 안 싫어해. 오히려 엄청 기대하고 왔어. 노 작가님도 네 연기 몰입도가 나랑 비슷하다면서 굉장히 칭찬하셨거든.”
“정말요? 헤헤.”
하준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을 본 강현기는 자기도 하준을 따라 웃더니 곧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근데 지금 네 귀여운 모습 보니까 심각한 연기가 상상이 안 된다. 더 궁금해졌어, 네 연기.”
“선배님도 웃으시니까 안 무서워요.”
“아, 그래? 그럼 요전까지는 무서웠다는 얘기네?”
“조, 조금요?”
하준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강현기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갑자기 하준에게 말했다.
“아하하. 하준아, 근데 초면에 이런 부탁 좀 그런데······.”
“무슨 부탁이신데요?”
뜬금없는 부탁의 말에 하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음, 저, 볼 한 번만 만져 보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