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33화
세자 처소로 꾸며진 세트는 실제로 하준이 촬영했던 <월야> 세트장보다는 소품들이 적었지만, 분위기는 비슷했다.
“엄마, 이거 봐. 자개장인가 봐. 이쁘다.”
하준이 소품으로 가져다 놓은 낮은 자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 우리 하준이 자개가 뭔지 알아?”
“응, 금조개 껍데기 조각. <월야> 소품실장님이 알려주셨어. 여기 반짝이는 장식이 다 그 금조개래.”
“그랬구나. 우리 하준이, 사극 찍으면서 많이 배웠네.”
최선희는 하준이 다양한 경험으로 아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아 흐뭇했다.
하준은 자개장 위에 올려진 도자기도 구경하고, 이따가 촬영 때 앉을 방석과 그 뒤에 세워진 병풍의 그림도 살펴보았다.
“와, 산수화 되게 멋있다······! 나도 이런 거 그려보고 싶다.”
“집에 가서 그려보면 되지.”
“응, 그럴래.”
“그럼 사진 찍어 갈까?”
“아냐. 안 찍어도 돼.”
하준은 사진을 안 찍어도 다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고개를 저었다.
대신 병풍 그림을 하나하나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는 와중, 드디어 내시 역할을 할 배우 이강명이 도착했다.
“아, 강명 씨, 오셨군요.”
“안녕하세요. 엇, 하준 군이 벌써 와 있었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하준 군이 일찍 온 거고, 강명 씨는 딱 맞춰서 온 건데요. 하준 군!”
진 우유의 백 실장이 하준을 불렀다.
병풍을 구경하던 하준은 얼른 세트에서 내려와 이강명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하준이에요.”
“와, 하준 군. 반가워요. <월야>에서 연기 잘 봤어요. 연기도 잘하고 엄청 귀여워서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광고를 같이 찍게 돼서 영광이네요. 잘 부탁해요.”
이강명은 하준의 손을 덥석 잡고 흔들며 인사했다.
“아, 감사합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편하게 하준이라고 불러주셔도 돼요. 백 실장님도요.”
하준은 삼촌뻘인 두 사람이 자신에게 존대를 하는 것이 좀 불편하기도 하고 작업할 때 어색할 것 같아 말을 편하게 해달라고 했다.
“알겠어. 하준이가 편한 대로 해줘야지.”
백 실장이 먼저 말을 놓자, 이강명도 조심스럽게 말했다.
“음, 나도 그럼 말 놓을게. 하준아, 사실 나 오늘 광고 처음 찍는 거야. 그래서 엄청 떨린다?”
이강명은 무척 설레는 눈치였다. 광고가 처음인 그는 사실 약속 시간보다 미리 가는 것도 실례인가 싶어 일부러 딱 약속 시간에 맞춰 온 것이었다.
“저도 이런 광고는 처음이에요. 전에 옷 광고 하나 찍었는데 그건 특별히 대사가 있는 건 아니었거든요.”
“오, 그래? 그럼 우리 둘 다 열심히 잘해보자.”
“네!”
이강명은 주먹을 불끈 쥐며 첫 광고에 대한 열의를 다졌다.
백 실장은 곧 콘티 설명을 해주었고, 콘티 설명 후에는 하준과 이강명이 각자 세자복과 내시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하준은 아청색의 곤룡포에, 공정책이라 불리는 정수리가 열리고 커다란 비녀가 꽂힌 세자가 쓰는 모자를 썼는데, 그 모습이 위엄있으면서도 귀여웠다.
“아, 귀여워!”
스태프들은 하준이 세자로 변신해 나오자 귀엽다며 탄성을 내질렀다.
“감사합니다.”
하준은 배시시 웃으며 인사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어디서 고소한 냄새가 나는데요?”
“아, 타락죽 냄새야. 진 우유로 끓인 타락죽.”
백 실장님이 대답해주었다.
“와, 그럼 제가 먹을 거예요?”
“응, 그렇지. 냄새는 일단 맛있을 것 같지?”
“네!”
타락죽은 옛날 왕들의 보양식으로 우유와 찹쌀을 넣고 끓인 죽을 말했다.
이번 광고에서 세자로 변신한 하준이 타락죽을 먹는 장면이 나오기에 ‘진 우유’ 측에서는 궁중요리전문가를 초빙해 맛있는 타락죽을 준비했던 것이다.
하준은 타락죽은 먹어본 적이 없어서 엄청 기대가 되었다.
“자, 그럼 죽도 준비됐으니 촬영 들어가죠. 하준이는 저기 방석에 가서 앉고, 강명 씨는 쟁반 들고 대기해주세요.”
촬영감독님의 지시에 따라 하준과 이강명은 각자 자신의 자리로 이동했다.
그리고 자잘한 동선을 맞춰 보고 대사 리허설도 해본 후,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그럼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레디, 액션!”
촬영감독님의 사인이 떨어지자, 내시 이강명은 허리를 구부린 채 타락죽 한 그릇과 숟가락을 올린 쟁반을 조심조심 들고 세자 처소로 입장했다.
그리고 하준의 앞에 놓인 개다리소반 위에 타락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세자 저하, 요즘 저하의 예체가 예전 같지 않으신 듯하여 보양식으로 타락죽을 준비했사옵니다.”
하준은 타락죽이라는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타락죽? 그 우유로 쑨 죽 말이냐?”
“예, 저하,”
“저번에 먹어봤는데, 별로였다. 도로 물리거라.”
하준은 안 먹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가져가라는 손짓을 했다.
“이번에는 참으로 진한 우유로 맛있게 만들었으니 한 입만 잡숴보시지요.”
“그래?”
하준은 숟가락을 들어 타락죽을 조금 떠 입 앞에 가져온 후 혓바닥만 낼름 내밀어 맛을 보았다.
그런데 처음 맛본 그 타락죽이 참 고소하고 맛있어서 세자 하준이 아닌 진짜 하준의 찐 리액션이 나오고 말았다.
“와! ······아, 죄송합니다. 다시 할게요.”
하준이 얼른 사과했는데, 스태프들은 하준의 진짜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을 터뜨렸다.
타락죽을 만든 궁중요리 전문가는 하준이 맛있어서 눈이 휘둥그레지니 무척 뿌듯한 표정이었다.
촬영감독은 괜찮다면서 하준에게 물었다.
“타락죽이 그렇게 맛있었어?”
“네. 이거 엄청 고소하고 맛있네요! 흰 우유 싫어하는 애들도 이건 맛있다고 잘 먹을 것 같아요. 따뜻하게 하니까 희한하게 찬 우유보다 더 고소하고 달달해요.”
“맞아. 나도 우유는 안 좋아하는데, 타락죽은 좋아하지. 아, 방금 혀로 낼름 맛보는 거 좋았어. 그게 더 귀여움을 살리는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맛보는 걸로 다시 가자.”
원래 콘티 상에는 그냥 숟가락을 입에 넣는 걸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준은 어떤 맛인지 맛만 보려고 할 때 혀만 내밀어서 살짝 맛을 보는 편이어서 습관적으로 혀를 내밀어 맛을 본 것이었다.
“네!”
“그럼 다시 맛보는 부분부터, 레디, 액션!”
하준은 다시 의심의 눈빛을 장착하고 숟가락을 살짝 핥아 타락죽을 맛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세자처럼 위엄있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 정말 다르구나!”
하준은 이제는 숟가락으로 타락죽을 푹푹 크게 떠서 와앙 하고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하준은 진짜로 타락죽이 너무 맛있었기에 이 부분은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으으음! 좋구나, 좋아.”
하준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타락죽을 퍼먹었다.
한 네다섯 번 죽을 퍼먹었을 때, 촬영감독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컷을 외쳤다.
“컷! 잘했어. 하준이는 먹는 것도 복스럽게 잘 먹는구나. 이뻐! 근데 이제 그만 먹어야 돼. 이따가 우유 마시는 장면도 찍어야 하니까.”
“네, 근데 그럼 이거 남은 죽은 어떻게 해요?”
“왜, 그거 네가 다 먹고 싶어?”
“네. 촬영 끝나면 먹어도 되죠?”
“하하, 그럼, 그럼. 자, 메이크업 수정 좀 하고 다음 장면 이어갈게요.”
메이크업 담당 스태프는 하준에게 와서 입가도 닦아주고, 전체적인 하준의 모습을 깔끔하도록 수정해주었다.
그 사이 소품 담당 스태프는 하준의 앞에 놓인 죽 그릇은 깨끗이 다 비워진 그릇으로 바꿔놓았고, 다음 촬영이 시작되었다.
“아니, 어떤 우유로 만들었기에 이리 진하고 고소한 것이냐?”
하준이 놀란 표정으로 내시 이강명에게 물었다.
그럼 이강명은 씨익 웃으며 옷자락에서 ‘진 우유’를 바로 꺼내 하준에게 건네야 하는데, 이강명이 옷자락 속의 우유를 빨리 못 꺼내 더듬거렸다.
당황한 이강명은 차분함을 잃고 허둥지둥 옷자락 깊숙이 손을 넣어 휘저었다.
그러자 촬영감독은 컷을 외치려 했는데, 갑자기 하준이 자연스럽게 애드리브를 했다.
“왜 그러느냐? 우유가 사라진 것이냐?”
“아, 예······ 분명 여기다 넣어놨는데, 너무 맛있어서 누군가 훔쳐 갔나······.”
“누가 훔쳐 갈 정도로 맛있단 말이냐? 오호, 얼마나 맛있길래······. 진짜 없느냐?”
“아! 찾았습니다!”
이강명이 겨우 진 우유를 손에 넣어 얼른 옷자락에서 우유를 꺼냈다.
“바로 이 우유입니다, 저하.”
그런데 이강명은 빠르게 우유를 꺼내다가 손을 놓치고 말았다.
거기다 그걸 또 안 떨어뜨리고 잡아보겠다고 손을 마구 뻗는 바람에 우유는 이강명의 손 위에서 마치 제기차기 할 때 제기가 튀어 오르듯 춤을 추다가 결국 바닥으로 추락했다.
퍽.
“아앗!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강명이 여러 번 고개를 숙이며 미안해했다.
하지만, 촬영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은 웃으며 즐거워했다.
“하하, 괜찮아요. 광고는 애드리브도 하고, 그러면서 찍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해요.”
“네, 감사합니다.”
이강명은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고, 촬영감독은 하준을 향해 말했다.
“아, 방금 하준이 좋았어. 콘티랑 좀 달라져도 즉흥적으로 괜찮은 게 있으면 그렇게 해도 돼. 광고는 드라마나 영화 같은 게 아니라 재미있게 찍어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는 게 중요하니까.”
“네, 해볼게요.”
하준은 사실 일부러 애드리브를 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광고에서는 편집될 거라 생각해서 이강명의 당황스러움을 상쇄시켜주려고 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또 광고에서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니, 하준은 또 새로운 것을 하나 배웠다.
“그렇다고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 알지? 그냥 나오면 나오는 대로, 안 나오면 안 나오는 대로 자연스럽게 해.”
“네.”
“자, 그럼 새 우유 준비해주고!”
바닥에 떨어진 우유는 퍽 소리는 났지만, 터지진 않았다. 그래도 한쪽이 푹 찌그러져 다시 사용할 수는 없었기에 소품 담당 스태프가 이강명에게 새 우유를 가져다주었다.
이강명이 옷자락에서 우유를 꺼내는 장면은 몇 차례 더 NG가 났으나 애드리브를 다양하게 하며 즐겁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래도 이강명이 편히 우유를 꺼낼 수 있도록 아예 그냥 손에 우유를 쥔 채로 옷자락 속에 손을 넣고 있기로 했다.
“레디, 액션!”
이강명은 이번에는 손에 쥔 우유를 옷자락에서 단번에 쑥 뺐고, 씨익 웃으며 하준에게 건넸다.
“바로 이 우유입니다.”
“오, 진 우유? 어디 한번 마셔보자.”
하준은 곧바로 진 우유를 따서 꼴깍꼴깍 마셨고, 카메라는 우유를 마시는 하준을 클로즈업했다.
“캬아. 이름처럼 참으로 진한 우유로구나. 이렇게 맛있는 우유를 나 혼자만 먹을 수는 없지. 온 백성에게 진 우유를 널리 보급하라.”
“예이~”
하준이 팔을 넓게 펼치며 또박또박 대사를 했고, 이강명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컷! 좋습니다. 하하, 하준이 위엄있게 잘하네!”
“감사합니다!”
“강명 씨도 좋았어요.”
촬영감독은 하준과 이강명에게 엄지를 들어 만족스럽다는 표현을 했다.
하준과 이강명은 잠시 지금까지 촬영한 장면을 모니터로 돌려보며 확인했고, 이제 마지막 남은 한 장면을 위해 스태프들이 개다리소반을 치우고 책을 올려놓는 책상인 서안(書案)을 가져다 놓았다.
마지막 장면은 내시가 옆에서 먹을 갈고 있고, 세자는 진 우유 그림이 그려진 화선지에 ‘참으로 진한 우유, 진(眞) 우유’라고 써서 내시에게 건네주는 장면이었다.
하준은 멋진 솜씨로 글자를 써 내려갔고, 단번에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와, 진짜 잘 쓴다.”
“하준이 글씨가 진(眞) 글씨네! 찐이야, 찐.”
“오, 진 우유, 진 글씨, 환상적 조합이야.”
스태프들은 하준의 서예 실력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더 놀랍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끝으로 내시 역의 이강명은 하준이 글을 써놓은 화선지를 건네받아 카메라에 가까이 보여주며 이렇게 외쳤다.
“세자 저하께서 전국에 방을 붙이랍신다~”
이강명의 이 대사를 마지막으로 ‘진 우유’ 광고 촬영은 마무리되었다.
촬영이 끝난 뒤, 궁중요리 전문가는 잘 포장된 타락죽을 하준에게 선물로 주었고, 백 실장은 진 우유에서 나오는 다양한 우유를 하준에게 챙겨주었다.
“하준아, 오늘 안 힘들었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최선희가 물었다.
그러자 하준은 전혀 피곤한 기색 없이 활기찬 목소리로 답했다.
“응, 하나도 안 힘들었어. 너무 재밌었어! 맛있고 몸에 좋은 타락죽도 먹고, 우유 선물도 받고. 광고 촬영 진짜 좋다. 사람들이랑 놀다 온 거 같아.”
“정말? 호호, 우리 하준이는 광고 체질인가 보네.”
“응, 그런가 봐. 다음에 또 할래.”
하준은 오늘도 즐거운 경험 하나를 추가하고 행복하게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