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27화
“이게 다 얼마야? 일, 십, 백, 천, 만······ 천만······ 삼천백오십만 원? 나 맞게 센 거 맞아, 엄마?”
하준은 믿기지 않는지 최선희에게 자신이 센 것이 맞는지 확인했다.
“응, 맞아. 그거 다 우리 하준이 돈이야.”
“정말? 우와, 삼천백오십만 원이면 돈가스를 도대체 몇 개 사 먹을 수 있지?”
하준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돈가스로 돈의 크기를 가늠해 보려 했다.
“돈가스가 9000원이니까······ 잠깐만, 엄마가 핸드폰 계산기로······.”
최선희는 아무래도 계산기가 빠를 것 같아 화장대 위에 놓아둔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최선희가 휴대폰에서 계산기 앱을 켜기도 전에 하준이 알아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음, 헉! 삼천오백 개 사 먹을 수 있어!!”
“어? 정말이야? 어떻게 알았어?”
“응, 내가 암산해보니까 딱 삼천오백 개야. 그럼, 삼시 세끼 돈가스만 먹어도, 음, 천백육십육일 넘게 먹을 수 있네!”
최선희는 후다닥 계산기 앱으로 하준의 말이 맞는지 확인해보았다.
계산을 해 본 최선희는 깜짝 놀랐다.
정말 하준의 암산이 맞았던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암산을 빨리 했어?”
최선희가 흥분해서 물었다. 그러자 하준이 별거 아니란 듯 씽긋 웃었다.
“어······ 그냥 됐어. 그건 별로 어려운 건 아닌데. 나눗셈할 줄 알면 할 수 있는 거야.”
“암산이 쉬운 건 아니야. 어른인 엄마도 암산 못 하고 이렇게 계산기로 하잖니. 아니, 잠깐만. 하준아, 너 근데 나눗셈도 할 줄 아는 거야?”
생각해보니 곱셈, 나눗셈은 초등학교 3학년이나 되어야 배우는 것으로 아는데, 하준이 나눗셈을 할 줄 아는 것도 의아했다.
하지만 하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아.”
“엄마는 가르쳐 준 적 없는데, 혹시 학교에서 배웠어?”
“아니, 그냥 책이랑 인터넷에서?”
“와······ 우리 하준이는 정말 영재구나!”
하준이 뭘 잘하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에 최선희는 꽤 적응이 되었지만, 매번 신기하고 기특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너무 다행이었다.
하준이 앞으로도 연기를 하느라 학교도 자주 빠질 수 있는데, 이렇게 습득을 빨리하면 학교 공부도 뒤처지지 않고 잘 병행해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엄마, 근데 이 돈 정말 내가 다 가져?”
“그럼. 하준이 돈인데 하준이가 다 갖지.”
“내 마음대로 써도 되는 거야?”
“음, 그렇지? 근데 되도록 쓰지 마.”
“왜?”
“하준이가 필요한 건 엄마, 아빠가 다 사줄 거고, 먹고 싶은 것도 다 사줄 거니까. 그거 차곡차곡 모아서 나중에 하준이 크면 집도 사고, 차도 사고 그래.”
“나도 엄마, 아빠한테 맛있는 거 사주고 싶은데?”
“아구, 우리 하준이는 이쁜 말만 하네. 말만으로도 고마워. 그럼 지금은 말고 나중에 커서 사줘. 적어도 성인 될 때까지는 엄마, 아빠가 하준이한테 다 해주는 게 맞는 거니까.”
“알았어. 엄마가 그러라고 하면 그럴게.”
최선희는 엄마, 아빠를 생각하는 하준의 마음이 이뻐서 하준을 안고 볼을 비볐다.
“자, 그럼 통장은 하준이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이제 촬영하러 가자!”
“응!”
***
다음 날, 하준은 학교를 빠지고, 아침 일찍 <월야> 촬영을 위해 최선희와 함께 실내 세트장으로 향했다.
“하준아, 한자 쓰는 거 연습해 왔니?”
하준이 실내 세트장에 도착하자마자 <월야>의 오 PD가 물었다.
“네, 해 왔어요.”
오늘 실내 촬영 중에 세자 이준이 수라간 생각시 윤서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이 있었다.
그래서 오 PD는 하준이 할 수 있으면 직접 글을 쓰게 하려고 연습을 해오라고 했다.
“그럼 이쪽으로 와 볼래? 여기 이분은 사극에서 대필해주시는 서예가 선생님이야.”
“안녕하세요.”
서예가는 수염도 길고 마치 서당의 훈장 선생님처럼 생겨서 딱 봐도 서예를 잘할 것 같아 보였다.
“네가 하준이구나. 반갑다. 네가 그렇게 서예를 잘한다며? 네가 쓴 글 봤는데, 정말 대단하더구나. 직접 한 번 보고 싶은데, 한번 보여주겠니?”
서예가는 하준을 매우 흥미롭게 쳐다보며 부탁했다.
“네, 해 볼게요.”
하준은 곧바로 서예가가 건네준 붓을 들고, 연습해 온대로 한자들을 슥슥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스태프들과 다른 배우들은 하준이 붓글씨를 잘 쓴다는 얘기만 들었지,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무척 궁금하던 차였는데 하준이 시범을 보인다니 하나둘씩 구경을 하러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하준의 붓은 마치 물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듯이 화선지 위를 부드럽게 흘러 아름다운 먹선으로 멋진 글씨를 만들어냈다.
“와······!”
스태프들은 어린 아이가 한자를 다 외워서 저렇게 쓰는 것도 신기하고, 또 그 한자들이 줄도 딱 맞고 형태가 아름답기까지 해서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 PD는 이번이 두 번째 보는 것임에도 신기해서 하준의 글씨에서 눈을 못 떼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직관 중이던 서예가도 믿을 수가 없다는 듯 하준과 하준이 쓴 글씨를 번갈아 보며 헛웃음을 웃었다.
“허허······.”
사람들이 감탄을 하는 사이 하준은 단 한번도 멈추지 않고 서찰 전체 글자를 순식간에 완성했다.
하준이 글자를 모두 쓴 후, 조심스럽게 화선지에서 붓을 떼자, 주변에서는 자동적으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와, 진짜 잘 쓴다!”
“글자가 예술 작품 같아.”
“애기가 저렇게 차분하게 글을 잘 쓰는 건 처음 봤어. 집중력이 엄청나네.”
서예가도 하준의 실력을 인정한다는 듯 열심히 박수를 치더니 한마디 했다.
“너 정말 대단하구나! 글 쓰는 자세도 좋고, 붓도 바르게 들었고, 글씨도 너무 멋져.”
“감사합니다.”
“PD님, 하준이가 직접 써도 되겠어요. 아, 근데 이거 이러다 제 자리 빼앗길까 봐 걱정되네요. 하하.”
서예가가 걱정 반 농담 반으로 말하자, 오 PD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설마요. 하준이 말고 다른 분들 서찰도 많으니 걱정마세요.”
그러고는 기특하다는 듯 하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다, 하준아. 어째, 저번보다 더 실력이 는 것 같구나. 이따가 촬영 때도 이렇게만 써 주렴.”
“네, 그럴게요.”
“이번 서찰 쓰는 장면은 하준이 풀로 잡아서 갑시다.”
오 PD가 촬영감독에게 외쳤고, 촬영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듯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원래 서찰 쓰는 장면에 대역을 쓰면 보통 전체 샷을 찍지 못하고 손만 클로즈업했다가 얼굴 한번 찍었다가를 왔다갔다 하면서 찍게 된다.
특히 어린 아이가 글을 쓰는 장면은 어른이 대신 쓰는 것이라 손까지도 나오면 안 된다.
하지만 하준이 직접 글을 쓰면 자유롭게 촬영이 가능해서 훨씬 자연스럽고 편하게 촬영을 할 수 있었다.
하준은 세자 복장으로 갈아입고 실내 촬영에 나섰다.
실내에서는 주로 내시들이나 어마마마와 대화하는 장면을 촬영했고, 거의 마지막에 서찰 쓰는 장면을 촬영했다.
역시 하준은 실전에서도 글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단번에 써냈고, 하준의 서찰 쓰기가 끝나자 스태프들은 이번에도 하나의 퍼포먼스를 본 것처럼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리고 이 장면을 마지막으로 <월야> 아역 분량 촬영은 끝이 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촬영이 끝나자 스태프들은 아역인 하준과 세아에게 몰려들었다.
“이번 아역 촬영은 정말 순조롭게 빨리 끝났네. 다 너희들이 너무 잘해준 덕분이야.”
“빨리 끝난 건 좋은데, 너희 둘을 더 못 보는 게 아쉬워서 어쩌니.”
“둘 다 너무 수고 많았어. 아휴, 아역 촬영 끝난 게 이렇게 아쉽긴 처음이네.”
하준과 세아도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스태프들과 포옹했다.
“촬영장에 꼭 한번 놀러와. 언제든 환영이니까.”
“네, 구경 올게요.”
하준과 세아는 꼭 놀러 오겠다는 약속을 했고, 스태프들과 함께 단체 사진도 찍었다.
긴 헤어짐의 시간을 가진 하준과 세아는 이제는 마지막일 세자 옷과 생각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런데 하준이 나와보니 최선희는 보이지 않고 최 대표가 와 있었다.
“어? 대표님, 언제 오셨어요?”
“응, 아까. 너희 어머니가 급한 일이 있으시다고 나보고 좀 와 달라고 부탁하셨단다.”
“아하.”
그러고 보니 하준이 마지막 촬영 즈음부터 엄마가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 하준은 엄마가 화장실에 갔나보다고 생각했는데, 바쁜 일 때문에 가신 모양이었다.
하준이 최 대표를 따라 세트장을 나서려는데, 임세아가 달려와 하준을 잡았다.
“하준아!”
“어, 세아야.”
“너 촬영장 놀러 올 때 꼭 연락 줘. 너 올 때 나도 오게.”
“응, 알겠어.”
“그리고······ 너랑 촬영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 다음에 또 보자.”
세아는 마치 고백을 하듯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그래, 나도 즐거웠어. 담에 또 보자. 잘 가.”
“응······.”
세아는 못내 아쉬운지 하준의 떠나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한편 하준은 세아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최 대표의 차에 올랐다.
하준은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되어 차에 타자마자 최 대표에게 물었다.
“근데, 무슨 일인지 아세요?”
“너희 어머니? 나도 잘 몰라.”
“안 좋은 일 같았나요?”
“아니, 그런 것 같진 않았어. 집에 가서 물어보렴.”
“아, 네.”
얼마 후, 하준이 집에 도착했다.
최 대표는 하준을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고, 하준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 아빠아. 나 왔어.”
하준이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엄마, 아빠를 불렀다.
그러자, 최선희와 윤기철이 후다닥 달려나왔다.
머리에는 미키마우스 귀 모양의 머리띠를 한 채로.
“우리 아들! 우리 진짜 아들 왔구나!”
윤기철이 먼저 하준을 번쩍 들어 올렸고, 최선희는 하준에게 그들이 한 것과 똑같은 미키마우스 머리띠를 하준에게 씌워주었다.
“어? 이게 웬 머리띠야?”
하준이 머리띠를 살펴보니 엄마가 한 머리띠에는 ‘엄마’, 아빠가 한 머리띠에는 ‘아빠’, 그리고 자신이 한 머리띠를 현관 거울에 비춰보니 ‘아들’이라고 적혀 있었다.
“여보, 당신이 얘기해.”
윤기철이 싱글벙글 웃으며 최선희에게 희소식 전달을 미뤘다.
최선희는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하준에게 발표했다.
“하준아, 이제 하준이는 법적으로도 진짜 엄마, 아빠 아들이 됐어! 가정 법원에서 드디어 허가가 나와서 곧바로 구청 가서 신고했단다.”
“정말? 진짜요?”
하준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높아졌다.
“응, 진짜로! 이제 하준이는 누가 뭐래도 우리 아들이야. 법적으로도 완벽히 우리 아들이니까 아무도 건드리지 못해.”
윤기철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말했다.
“우와아!! 너무 좋아! 엄마, 아빠, 감사합니다! 저 진짜 좋은 아들이 될게요.”
하준이 윤기철을 꼬옥 껴안으며 말했다.
그러자 최선희도 거기에 가담해 윤기철과 하준을 함께 껴안았다.
“우리가 더 고맙지. 이렇게 우리 아들이 되어 줘서. 그리고 하준아, 넌 이미 우리한테 너무 좋은 아들이야. 벌써 너무 많은 행복을 주고 있단다.”
“맞아. 하준이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 만큼 엄마, 아빠도 더 좋은 엄마, 아빠가 될게.”
세 사람은 부둥켜 안고 행복을 만끽했고, 잠시 후, 식탁으로 향했다.
식탁의 한 가운데에는 오늘을 축하하기 위한 커다란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하트 장식이 가득한 케이크 위에는 ‘행복한 우리 가족, 윤기철, 최선희, 윤하준’이라는 문구도 적혀 있었다.
“우와아!”
하준은 케이크에 써진 문구만 보고도 무척 행복해했다.
“자, 우리 여기 촛불 동시에 불어서 끄면서 소원 빌자.”
“응, 좋아!”
“하나, 둘, 셋! 후우!”
최선희의 제안에 세 사람은 촛불을 불며 각자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엄마, 아빠, 저,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주세요.’
‘우리 하준이 이제 더이상 상처받지 않고 행복하게만 해주세요. 우리 남편도 이제 진짜 좋은 아들 생겼으니까 마음의 짐은 내려놓고 행복하게 해주세요.’
‘우리 하준이와 선희, 제가 꼭 행복하게 지켜줄 수 있도록 해주세요.’
소원을 빈 세 사람은 머리띠를 한 채 케이크를 들고 기념 사진 촬영을 했고, 드디어 하준은 법적으로도 진짜 윤기철과 최선희의 아들이 되었다.
윤기철과 최선희는 이제 법적으로도 확실히 하준의 부모가 되었으니, 하준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항상 행복하게 지켜주리라 다시 한번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