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25화
최선희는 하준의 손을 잡고 동궁전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호, 엄마가 하준이 덕에 세자마마랑 같이 걸어보네.”
최선희는 세자로 변신한 하준을 흐뭇하게 바라보느라 바빴다.
반면 하준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집들과 풍경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한국민속촌 같이 옛날 집들이 즐비한 곳에 한 번도 안 가봐서 사극 세트장이 너무 신기했던 것이다.
“와아······! 저 집들 엄청 신기해. 기와집도 있고, 초가집도 있네!”
“그렇게 신기해?”
연신 ‘우와’를 외치고 있는 하준에게 최선희가 웃으며 물었다.
“응. 여기 다 구경하고 싶다······.”
“그럼 이따가 시간 나면 쭉 돌아보자. 어차피 여기 며칠 있어야 하니까, 시간 날 때마다 구경하지, 뭐.”
하준과 최선희는 촬영 기간 동안 머물기 위해 아예 이 근처에 숙소를 잡아두었다.
하준이 왕복 4시간 거리를 매일 왔다 갔다 하는 것은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응, 좋아.”
하준이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주변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두 사람은 동궁전에 도착해 있었다.
동궁전에는 스태프들이 촬영 준비를 모두 해둔 상태였고, 오늘 하준의 상대역으로 나오는 여자 아역 배우 임세아도 와 있었다.
임세아를 대본 리딩장에서 만난 적이 있는 하준은 먼저 다가가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 세아야.”
임세아는 대본을 보고 있다가 하준의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하준과 최선희에게 차례로 인사했다.
“응, 안녕.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세아는 댕기 머리를 해도 예쁘구나.”
임세아는 수라간 생각시 역할이라서 생각시 복장에 댕기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도 단아하니 예뻤다.
“감사합니다.”
임세아는 두 손을 다소곳하게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감사인사를 했다.
하준과 동갑인 임세아는 화려하게 예쁜 얼굴이 아니라 착한 인상에 수수한 매력이 있는 얼굴이었는데, 성격도 얼굴처럼 차분하고 조용했다.
그래서 그런지 단정한 댕기머리가 참 잘 어울리는 듯했다.
“근데 어머님은 어디 계시니?”
“제가 목마르다고 해서 물 가지러 가셨어요.”
“그렇구나. 아, 대본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계속 보렴.”
“네.”
임세아는 대본을 다시 집중해서 보기 시작했다.
하준은 임세아의 대본이 너덜너덜한 것을 보고 정말 열심히 하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대본을 더 봤어야 했나?’
하지만 하준은 대본을 한 번만 봐도 그냥 외워졌다. 그러니 더 볼 필요가 없었다.
‘음, 촬영 위치나 확인하러 가야겠다. 동선도 좀 보고.’
하준은 최선희와 동궁전 주변을 돌아보며 오늘 촬영 장면에 등장하는 위치들을 파악하러 다녔다.
<월야>는 가상 사극 로맨스로 수라간 궁녀인 윤서와 훗날 조선의 왕이 되는 이준의 사랑 이야기였다.
그래서 오늘 하준과 임세아가 촬영할 부분은 이준과 수라간 궁녀 임윤서의 어린 시절의 만남에 관한 내용이었다.
잠시 후,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조연출이 주변을 조용히 시켰다.
“자, 다들 준비됐죠?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조용히 해 주십시오.”
하준은 동궁전의 연못 옆 바위에 앉아서 찬합을 들고 대기했고, 곧 오 PD의 사인이 떨어졌다.
“자, 레디······ 액션!”
하준은 네모난 찬합을 열어 안에 든 작은 약과를 확인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동궁전 담벼락 바로 옆에 있는 커다란 벚꽃나무로 달려갔다.
“오케이, 컷! 다음 장면 촬영할게요.”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은 세자 이준이 약과 찬합을 들고 벚꽃나무 위에 올라가 약과를 먹다가 담벼락 밑을 지나던 윤서의 머리 위에 약과를 떨어뜨리는 장면이었다.
먼저 세자의 내시들이 세자가 위험할까 봐 발을 동동 구르며 나무에 오르는 것을 막으려 하는 장면부터 촬영했다.
하지만 극중 세자는 무척 개구쟁이였고, 아무도 세자를 막을 수 없었다.
하준은 천진난만한 표정과 장난꾸러기 표정을 넘나들며 풍부한 표정 연기로 세자의 개구진 성격을 자연스럽게 표현했고, 오 PD는 나무랄 게 없다며 극찬했다.
“컷! 세자 아주 좋았어! 내가 말이야, 얼마 전에 그 한범우 뮤직비디오를 봤거든? 그거 보고 하준이를 잘 뽑았다 싶었다니까. 표정 연기가 진짜 어려운 건데, 이거 봐, 엄청 잘하잖아. 아하하.”
오 PD의 말에 스태프들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쩜 이렇게 연기를 잘할까. 이뻐 죽겠네!”
“맞아, 저렇게 완벽하게 연기하는 애는 처음 봤어. 대본 리딩 때 대본 완벽하게 외워온 거 봤지?”
“봤지! 동선이나 행동도 한번 알려주면 그냥 척척이야, 척척.”
스태프들은 하준이 연기를 잘해서 오 PD의 기분이 좋은 것도 다행이었고, NG가 없어서 촬영이 빨리빨리 끝나는 것도 좋았다.
그러니 하준이 예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엔 위험할 수 있으니까, 조심해라, 하준아.”
나무 위에서의 촬영에 앞서 조연출이 하준에게 주의를 주었다.
“네, 조심할게요.”
하준은 스태프 형들이 놔준 사다리를 타고 벚꽃나무 위로 올라갔다.
나무 위에서 약과를 먹는 장면을 촬영할 때는 혹시라도 하준이 떨어질 수 있으니 스태프들이 밑에서 하준의 다리를 꽉 잡아주었다.
하준이 반쯤 먹은 약과를 담벼락 너머로 떨어뜨리는 장면을 촬영하고 나자, 다음은 임세아 차례가 되었다.
한 스태프가 반 자른 약과를 담벼락 위에서 준비하고 있다가 임세아가 그 밑을 천천히 지나갈 때 머리 위에 약과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약과가 머리 위에 딱 붙어 있지 않고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몇 번 더 같은 장면을 반복 촬영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약과가 임세아의 머리 위에 잘 안착한 장면을 얻을 수 있었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세아야, 한두 걸음 걷다가 멈칫하고 대사하는 거야. 알겠지?”
“네.”
“오케이. 레디, 액션!”
오 PD의 사인이 떨어지자, 임세아는 머리 위에 약과 반쪽을 얹은 채 터덜터덜 걷다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흠, 어디서 달달한 냄새가 나는데······.”
임세아가 맡은 수라간 생각시 윤서는 말괄량이 성격의 여자아이라서 실제 임세아와는 정말 다른 캐릭터였다.
하지만 임세아는 촬영에 들어가자 바로 윤서로 돌변해서 걸음걸이부터 표정까지 털털한 어린 생각시의 모습을 잘 표현해냈다.
“컷. 잘했다! 다음!”
다음으로 세자 이준이 머리 위에 약과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어디선가 달달한 냄새가 난다고 중얼대는 생각시 윤서를 보며 키득대는 장면을 촬영했고, 드디어 세자 이준과 생각시 윤서가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으흠.”
“엇, 세자저하?”
“내 약과를 찾으러 왔느니라.”
“약과요? 무슨······?”
“네 머리에 내 약과가 붙었거든.”
“네?”
윤서는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머리 위를 더듬거렸고, 약과가 만져지자 얼른 집어 이준에게 돌려주었다.
이준은 윤서의 머리 위에 붙어 있던 약과를 당연히 먹지 않고 버리려 했다.
그러자 윤서가 다급하게 외쳤다.
“앗, 그거 버리실 거면 저 주십시오.”
“왜? 설마 먹으려고?”
이준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하지만 윤서는 당당했다.
“땅에 떨어진 것도 아니고, 제 머리에 떨어진 것인데 먹으면 안 되나요? 제 머리는 깨끗하옵니다.”
“식탐이 많은 아이인가 보구나.”
이준은 피식 웃으며 윤서를 은근슬쩍 놀렸다.
“아뇨, 아, 아닌 건 아니고, 그게······ 으악!! 엄마야!!”
윤서 역의 임세아가 연기를 잘하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팔딱팔딱 뛰었다.
“왜, 왜 그래?”
“세아야?”
오 PD와 조연출, 스태프들이 깜짝 놀라 세아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때, 바로 곁에 있었던 하준이 무엇 때문인지 눈치를 채고 세아를 뒤에서 살짝 안아 진정시켰다.
“세아야, 잠깐 가만 있어 봐. 내가 떼줄게. 가만 있어야 떼 줄 수 있어.”
세아의 치마 앞자락에 엄지손톱만 한 정체 모를 까만 곤충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세아는 바로 뒤에서 들리는 하준의 차분한 목소리에 믿음이 갔던지 잠시 숨을 멈추고 움직임도 멈췄다.
하준은 세아가 멈춘 순간, 순식간에 그 곤충을 툭 쳐서 날려버렸다.
곤충이 세아의 치맛자락에서 떨어져 나가자, 그제야 세아가 멈췄던 숨을 내쉬며 울음을 터뜨렸다.
“으흐흑. 엄마아······.”
“어어, 세아야, 엄마 여깄어. 울지 마.”
세아의 엄마가 얼른 뛰어와서 세아를 안아 달랬다.
“세아가 벌레 때문에 놀랐구나! 사극 촬영장이 산에 둘러싸여 있어서 벌레가 많아. 어머님, 세아 좀 달래 주세요. 잠깐 쉬었다 갑시다.”
오 PD님은 어린 세아가 당연히 놀랄 수 있다며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을 주었다.
그러고는 하준에게 잘했다며 칭찬을 했다.
“하준아, 아주 잘했어. 판단력도 빠르고, 완전 상남자였어. 크, 다들 봤지?”
스태프들도 하준의 빠른 대처가 멋졌다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네, 엄청 멋있었어요!”
“무슨 영화의 한 장면 같았어요.”
“아니, 근데 하준아, 넌 벌레 안 무서워? 어릴 때는 남자애나 여자애나 벌레 무서워하던데.”
한 스태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 저는 어릴 때부터 벌레 많이 봐서 안 무서워요.”
하준은 보육원에서도 벌레들이 자주 방충망을 뚫고 보육원으로 난입하기 일쑤였던데다가 전 양부모 집에서도 다양한 벌레가 있었기에 이미 적응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오, 하준이 진짜 멋있다. 세자복 입고 그러니까 진짜 세자 같았어. 멋짐이 뿜뿜!”
“아까 세아 뒤에서 살짝 안아서 진정시키는 거 대박이더라. 그건 너무 다정한데, 벌레는 또 한방에 딱 처리해주고! 다정한 상남자야.”
여자 스태프들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하준은 연기적으로도 흠잡을 데가 없어서 스태프들에게 매우 호감이었지만, 방금 이 행동 하나로 촬영장의 여심을 모두 훔쳤다.
물론 남자 스태프들도 하준의 멋진 행동을 칭찬하며 기특해했다.
“쑥스럽게 왜들 그러세요······.”
하준이 민망한 듯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진정이 된 세아와 세아 엄마가 하준에게 다가왔다.
세아 엄마가 하준에게 먼저 고맙다고 인사했고, 이어 세아도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말했다.
“고마워······.”
“같이 연기하는 사인데 이 정도는 도와주고 하는 거지, 뭐. 네가 벌레 엄청 무서워하는 거 알았으니까, 다음부터는 내가 혹시 주변에 벌레 있나 잘 봐줄게.”
“응······.”
하준을 올려다보는 세아의 눈빛은 영락없이 하준에게 반한 눈빛이었다.
잠시 후, 촬영이 끊겼던 부분부터 다시 촬영이 재개되었다.
하준이 먼저 세자 이준의 대사를 시작했다.
“식탐이 많은 아이인가 보구나.”
“아뇨, 아, 아닌 건 아니고, 그게······ 제가 수라간 생각시라 다양한 음식을 접하고 공부하라고 배웠거든요.”
“아, 수라간 생각시였구나. 음, 그래, 그럼 내가 네 머리에 약과를 떨어뜨린 값으로 깨끗한 새것으로 하나 주겠다.”
“아······ 네. 감사하옵니다.”
이준은 수라간 생각시라는 말에 약과를 맛보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맛이 어떤지를 물었다.
“그래? 맛이 어떠하냐?”
“아주 맛있습니다. 꿀맛도 나고, 꽃향기도 나고······. 처음 먹어보는 약과 맛이옵니다.”
“오호, 꽃향기? 그럼 무슨 꽃이 들어간 건지 맞춰 보겠느냐?”
“제 생각에는 진달래 같사옵니다.”
맛을 보고 약과에 무슨 꽃이 들어갔는지를 윤서가 단번에 맞히자, 이준은 놀라워하며 어찌 안 것인지 물었다.
“아니, 처음 먹어본다며? 어찌 알았느냐?”
“저는 그저 진달래 향이 나서 진달래라 하였사온데······.”
윤서가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고, 이준은 자기 질문이 좀 이상했다는 것을 인정하고는 곧 다른 것을 물었다.
“재미있는 아이로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임윤서라 하옵니다, 저하.”
“수라간 생각시라 했지?”
“네.”
“내 기억해 두겠다.”
이준은 윤서의 이름을 되뇌며 돌아서 다시 동궁전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윤서가 이준의 옷자락을 슬그머니, 하지만 꽉 잡았다.
“저, 근데 저하, 잠시만요.”
“응? 왜 그러느냐?”
이준이 윤서를 돌아보자. 윤서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혹, 수라간으로 가는 길을 아십니까?”
“알다마다. 근데 그건 왜? 내가 너를 못 찾아갈까 봐 그러느냐?”
“아뇨, 그것이 아니오라, 제가 길을 잃었사옵니다.”
이준은 맛은 그렇게 잘 알던 아이가, 길은 잘 모른다는 것이 왠지 웃겨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래, 그럼 내가 수라간 구경도 할 겸 널 데려다주마.”
“감사하옵니다, 저하.”
윤서는 다소곳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고, 이준은 뒷짐을 지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때, 절묘하게 봄바람이 불어와 벚꽃나무의 꽃잎들이 흩날렸고, 이준과 윤서의 첫 만남 씬은 마치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