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24화
“하준아, 여기.”
최선희는 유성붓펜을 꺼내 하준에게 건넸다.
유성붓펜은 하준이 사인을 하게 될 때를 대비해 가지고 다니던 것이었다.
하준은 생애 처음으로 사인을 하게 돼서 긴장된 마음으로 유성붓펜을 건네받았다.
가장 먼저 사인을 받은 사람은 네이블리 매장 매니저였다.
하준은 유성붓펜으로 마치 하나의 캘리그라피를 적듯 멋지게 자신의 이름과 날짜를 카탈로그의 표지에 적어주었다.
하준의 멋들어진 사인을 본 매니저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 사인이 무슨 예술작품 같네! 고마워. 이건 정말 간직해야겠다.”
다른 사람들도 하준의 사인을 보더니 더더욱 받고 싶은지 알아서 줄을 서기 시작했다.
“하준 군, 이쪽에 앉아요. 여러분, 사인은 이쪽에서 받으세요.”
네이블리 매장 매니저는 자기 매장 한편을 사인회 장소로 제공했고, 하준에게 사인을 받으라고 사람들에게 카탈로그도 나눠주었다.
하준에게 사인을 받은 사람들은 다들 하준의 사인이 캘리그라피 같다면서 멋있다고 칭찬을 쏟아냈다.
“연예인들 사인 중에 제일 멋있는 것 같아.”
“와, 멋있다. 어른들도 이렇게 이쁘게 글씨 쓰기 쉽지 않은데 애기가 어쩜 이렇게 글씨를 잘 쓰지?”
“글씨도 하준이 닮았네! 잘생겼어.”
하준은 그들의 칭찬에 감사하다며 연신 고개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한편, 백화점 5층에 방금 도착한 사람들은 네이블리 매장에 사람들이 몰려 있으니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네이블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아, 사인 받으려고 줄 선 거예요.”
“누가 왔는데요?”
인파 때문에 하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에 일부 사람들은 줄을 선 사람들에게 물었다.
“하준이요. 엊그제 한범우랑 <유이열의 음악노트>에 나왔던 아역 배운데, 여기 모델이래요.”
줄을 선 사람들은 네이블리 매장 벽면에 크게 걸린 하준의 사진을 가리키며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아하! 그 하준이가 여기 모델이었어요? 오! 우리도 받아 가야겠다.”
나중에 네이블리 매장에 도착한 사람들도 관심을 보이며 하준에게 사인을 받으려고 줄을 섰다.
아동복이 몰려 있는 5층이니만큼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사인받기를 기다리면서 네이블리의 옷들도 구경했다.
또한 사인을 받고 난 사람들도 네이블리의 옷들을 구경했기에 매장 매니저는 매우 흡족해했다.
‘홍보 효과 최고겠는데? 여기 입점하길 정말 잘했어.’
30분 정도의 미니 사인회가 끝난 후, 하준은 원하는 사람들과 사진도 찍어주고 팬 서비스를 제대로 해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쇼핑 재밌게 하세요. 저는 이만 갈게요.”
하준이 떠나며 어른스럽게 사람들에게 인사하자, 사람들은 반가웠다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최선희가 하준에게 물었다.
“하준아, 안 힘들었어?”
팬 서비스를 해주는 것이 혹시 힘들었을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아니. 너무 즐거웠어! 모두 날 너무 좋아해 주시니까 고마웠어.”
하준은 무관심으로 방치된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관심받고 사랑받는 게 좋았다.
“다행이네. 근데 그래도 혹시 힘들면 엄마한테 말해. 눈짓만 해도 엄마가 알아서 정리해 줄 테니까.”
“응, 헤헤.”
하준은 자신을 걱정해주는 부모님이 계신 것도 너무 좋아서 활짝 웃었다.
그때, 윤기철이 하준에게 물었다.
“하준아, 근데 진짜 뭐 갖고 싶은 거 아직도 없어?”
“응, 아직······.”
“그럼······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갈까?”
“응, 좋아! 먹는 게 남는 거랬어.”
“하하,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
“TV에서 개그맨이 그러던데?”
“하준이도 같은 생각이야?”
“응! 맛있는 거 너무 좋아!”
“그래, 그럼 오늘은 파스타랑 스테이크 어때?”
“우와, 좋아. 빨리 가자요!”
하준은 신나서 윤기철과 최선희의 손을 잡아끌며 앞장섰다.
윤기철은 웃으며 하준에게 기꺼이 끌려가 주었고, 하준에게 줄 선물은 알아서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엄마, 학교 다녀왔습니다!”
하준이 학교에서 돌아와 우렁차게 인사했다.
하준을 픽업해 데려온 윤기철도 하준을 따라 들어오며 말했다.
“여보, 미션 클리어.”
“어, 수고했어. 다들 배고프지? 얼른 손 씻고 와. 점심 먹자.”
하준과 윤기철은 후다닥 손을 씻고 와서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하준아, 밥 먹고 오늘 갈 데가 있어.”
“어디 가?”
“가 보면 알아.”
최선희가 윤기철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씽긋 웃었다.
하준은 곧 알게 될 일이니 더이상 묻지 않았다.
“아참! 나 좋은 소식 있는데!”
하준이 손뼉이 짝 치며 말했다.
“오, 좋은 소식? 뭔데?”
“아까 집에 오는 길에 최 대표 아저씨한테 전화 왔었어. 범우 삼촌이 <유이열의 음악노트>에서 같이 부른 노래 듀엣 음원 내고 싶어 한다고.”
“어머, 정말? 그래서?”
“그래서 당연히 좋다고 했지. 곧 녹음 날짜 잡재.”
“아휴, 아들, 축하해! 장하다, 장해.”
최선희는 하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랑스러워했다.
하준은 싱글벙글 웃으며 밥을 먹었고, 식사를 마친 후, 최선희는 하준에게 하얀 셔츠에 청바지를 꺼내 주었다.
“하준아, 이거로 갈아입어.”
“응.”
하준이 방에서 옷을 입고 나와보니, 최선희와 윤기철도 자기처럼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 아빠랑 엄마도 같은 옷이네! 세트네, 세트?”
“응, 맞아. 일부러 세트로 샀어. 우리 하준이랑 세트 복장 좀 하려고.”
하준은 좋아라 하며 최선희와 윤기철을 따라 집을 나섰다.
잠시 후, 세 사람은 예약해 둔 동네 사진관에 도착했다.
“하준아, 오늘 우리 가족 사진 찍으러 온 거야. 이거 이쁘게 찍어서 우리집 거실에 크게 걸어놓자.”
최선희는 그제야 하준에게 오늘 사진관에 온 이유를 알려주었다.
“와, 신난다!”
하준은 엄마, 아빠와 찍은 사진이 거실에 걸려 있는 상상을 해보니 너무 좋았다.
이미 하준은 최선희와 윤기철을 부모님으로 인정하고 있었지만, 함께 찍은 사진까지 있다면 정말 한 가족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볼 때마다 행복할 것 같았다.
사진사는 세 사람을 긴 소파에 앉게 하고 카메라를 조절하며 말했다.
“애기가 정말 잘생겼네요. 아역 배우 한 번 시켜 보세요.”
“감사합니다. 이미 하고 있어요.”
윤기철이 허허 웃으며 답했다.
“오, 정말요? 어디 나왔어요?”
“곧 나올 예정이에요.”
“아하. 내가 딱 처음 보자마자 아역 배우상이다, 했어요. 대성하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하하. 자, 그럼 이제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사진사는 조금씩 다른 포즈로 여러 장의 사진을 촬영했다.
하준 가족은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 커다란 액자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
며칠 뒤, 하준이 하교 후 집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하준은 누군가 궁금해서 슬그머니 거실로 나왔다.
“엄마, 누구야?”
“사진사 아저씨. 우리 가족 사진 가져 오셨대!”
최선희의 말에 하준은 바로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가 아저씨가 올라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준은 사진사 아저씨에게 문을 열어주며 배꼽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사진사 아저씨.”
“오, 안녕, 아역 배우님! 사진 진짜 예쁘게 나왔어.”
사진사는 직접 사진도 배달해주고 거실에 걸어주기까지 했다.
사진사가 돌아간 뒤, 하준 가족은 모두 가족 사진 앞에 서서 사진을 감상했다.
“여보, 우리 정말 행복해 보인다. 그치?”
“응, 다 우리 하준이 덕분이지.”
“아빠랑 엄마 덕분에 내가 행복해진 거지. 감사합니다.”
하준은 엄마, 아빠를 감사와 사랑의 의미로 꼬옥 끌어안았다.
그런데 그때, 초인종이 한 번 더 울렸다.
“어? 사진사님이 뭐 놓고 가셨나?”
윤기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월패드 화면으로 방문객을 확인했다.
그런데 사진사가 아니라 배달 기사였다.
“아!! 왔다, 왔어!”
윤기철이 뭔가 주문한 게 생각났는지 얼른 공동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아빠, 뭔데? 뭐 시켰어?”
하준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그러자, 윤기철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하준이 선물. 내 마음대로 선물 샀지.”
“응? 정말? 뭔데?”
“직접 봐.”
너무 궁금했던 하준은 이번에도 쪼르르 현관으로 달려가 배달 기사 아저씨를 기다렸다.
곧 배달 기사 아저씨가 가지고 온 것은······.
“디지털 피아노?! 우와아!!”
하준은 피아노를 보더니 환호하며 기뻐했다.
“하하. 하준이 피아노 갖고 싶었다며.”
“응, 어떻게 알았어?”
“아빠는 모르는 게 없거든. 다 알지.”
윤기철은 하준에게 무슨 선물을 해줄까 고민하다가 최 대표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준에게 회사 차원에서 지원해줄 게 없는지, 배우고 싶은 건 없는지 슬쩍 물어보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하준은 사실 한범우가 피아노를 치는 걸 보고 피아노가 배우고 싶어졌다.
피아노 소리도 너무 좋고, 피아노 반주를 하면서 노래도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피아노는 선물로 받기에 너무 비싸서 하준은 윤기철에게 차마 피아노가 갖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윤기철이 하준의 마음을 어떻게 알고 피아노를 선물했다.
하준은 신기하고 행복했다.
“우리 아빠 최고! 최고!”
하준은 더없이 해맑은 웃음을 발산하며 윤기철에게 달려가 안겼다. 윤기철은 하준을 빙그르르 돌리며 물었다.
“그렇게 좋아?”
“응! 응! 너무 너무 좋아!”
기뻐하는 하준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최선희는 문득 하준이 처음에 집에 왔을 때와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크게 웃지도 않고 뭔가 슬퍼 보이더니, 지금은 웃음도 많아졌고, 항상 밝은 얼굴이었다.
또한 기쁨의 표현도 자유로워졌다.
‘그래, 이대로만 자라렴.’
최선희는 앞으로도 하준의 행복을 지켜주리라 다짐했다.
***
4월이 되었다.
하준은 저번 주에 <월야> 대본 리딩을 마쳤고, 오늘은 드디어 <월야>의 첫 촬영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하준아, 멀미약 하나 먹고 가자. 오늘 좀 멀리 가는데 멀미하면 컨디션 안 좋아져서 큰일이니까.”
“응, 엄마.”
하준은 아침 일찍 멀미약을 복용하고 최선희와 함께 문경새재 세트장을 찾았다.
다행히 하준은 멀미약을 미리 먹고 와서 멀미 없이 문경새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경새재에는 역사드라마를 위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야외 세트장이 만들어져 있었기에 사극은 주로 여기서 촬영했다.
세트장 입구에 도착하자, 오 PD와 스태프들이 모여 있는 곳이 보였다.
하준은 얼른 다가가 스태프들에게 배꼽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이고, 우리 귀염둥이 하준이 왔구나!”
“안녕, 하준아.”
스태프들은 하준을 반기며 인사를 해주었고, 오 PD는 하준에게 분장실로 가서 분장부터 하라고 일러주었다.
분장실은 주차장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곳에는 사극 복장이 가득 담긴 여러 대의 트럭이 줄지어 있었다.
“하준아, 이리 와. 옷 입자.”
“네!”
분장실장님이 하준을 불러 세자 옷을 건넸다.
하준은 생애 처음으로 세자 옷을 입고, 머리에 상투도 틀었다.
하준이 세자로 변신하고 스태프들 앞에 다시 나타나자, 다들 잘 어울린다면서 귀여워했다.
드디어 세자로 변신한 하준은 스태프들의 안내에 따라 첫 촬영이 이뤄지는 동궁전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