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10화
상대 엄마는 충격을 받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차우민의 아들이면, 설마 차우민 아들 역할하는 아역 배우?! 근데 또 윤 감독님의 부인의 아들이라고?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도대체 얜 뭐지?’
여자아이의 엄마는 멘붕에 빠져서 윤기철과 차우민, 최선희와 하준을 휙휙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준과 이 사람들의 관계는 불투명했지만, 곧 그녀는 두 가지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하준은 자신이 이렇게 무시할 아역 배우가 아니라는 것과 그럼에도 이 아이를 무시한 자기는 이제 큰일 났다는 것을.
“당신 근데 하준이랑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하준이 다음 촬영 들어가야 하는데······.”
윤기철 감독이 여자아이와 그 엄마에게 힐끗 눈길을 주며 최선희에게 물었다.
“아, 그게······.”
최선희가 막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는데, 여자아이의 엄마가 얼른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해를 했네요. 하준이라고 했던가요? 하준아, 우리 딸이 비명 질러서 놀랐지? 놀라게 해서 미안해. 야, 오수영, 빨리 사과 안 해?”
“아니, 내가 왜에······?”
눈치가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한 오수영은 짜증을 냈다.
“야, 이 기집애야, 엄마 말 들어, 얼른.”
오수영의 엄마는 이젠 자기 딸을 쿡 찌르며 억지로 사과를 시켰다.
결국 오수영은 입이 댓 발 나와서는 퉁퉁거리는 목소리로 하준에게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사과를 시킨 오수영의 엄마는 얼른 오수영을 잡아끌고 사라졌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다들 의아해하며 최선희와 하준에게 물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그래?”
“분장한 거 보니 우리 좀비 엑스트라 아역 중 하나인가 본데, 뭐 잘못했어요?”
최선희의 방금 당한 황당한 상황을 빠짐없이 설명했다.
“당신이랑 차 배우가 안 왔으면 아주 우릴 칠 기세였어. 기가 막혀.”
“아니, 뭐 저런!”
윤기철 감독은 화가 치밀었다.
이미 상처가 많은 아이라, 상처를 안 받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별일도 아닌 걸로 애한테 막말을 하고 난리를 치다니.
그럼에도 윤 감독은 일단 하준의 마음부터 챙겼다.
“하준아, 괜찮니? 그 아줌마가 때리진 않았어?”
“네, 때리진 않았어요. 그리고 때마침 엄마가 와 주셔서 제 편 들어주셨어요.”
하준은 의외로 밝게 웃었다.
지금 하준은 아까 그 아줌마에게 들었던 막말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엄마가 있다는 사실에 기쁠 뿐이었다.
조감독이나 차우민은 하준의 ‘엄마’ 발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방금 상황은 최선희가 엄마라고 나서야 할 상황이었을 거라 생각했고, 하준은 영화 속 엄마 역할인 김지숙에게도 엄마라고 불렀으니까.
게다가 차우민 역시 하준이 극중 아들임에도 평소에 아들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니, 호칭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제가 FD한테 얘기해서 저 아이, 촬영에서 빼라고 하겠습니다.”
조감독은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대신 사과하며 알아서 윤기철의 마음을 헤아렸다.
윤기철은 다시는 하준과 그 모녀를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침묵으로 긍정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하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 괜찮아요. 그냥 촬영하게 해주세요. 그 여자아이는 분장도 이미 다 준비했는데, 저 하나 때문에 새로 다른 아이 뽑으려면 스태프 형들이 힘드시잖아요. 그리고 그 애는 저한테 별말 안 했어요.”
“우구, 우리 하준이는 어쩜 이렇게 착할까?”
“그러게요. 너무 착해.”
윤기철과 차우민은 하준의 착한 마음씨에 반한 듯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윤기철은 하준의 말을 존중하기로 했다.
“조감독, 그냥 찍게 둬. 잠깐 찍는 건데, 빼면 괜히 하준이 마음이 불편할 거 아냐.”
“아, 네.”
“감사합니다, 감독님.”
하준은 윤기철에게 배꼽 인사를 했다.
윤기철은 빙긋 웃으며 하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그럼 다음 촬영하러 가자! 아, 우리는 화장실 갔다가 갈 테니까, 당신은 하준이 먼저 분장실로 데려가. 분장할 거 좀 있을 거야.”
“응, 알겠어. 하준아, 가자!”
최선희는 하준의 손을 잡고 분장실로 향했고, 화장실 앞에 남은 윤기철은 차가운 목소리로 조감독에게 조용히 지시를 내렸다.
“오수영이라고 했던가? 걔는 일단 오늘 촬영은 하고, 다음부터는 부르지 마. 알지?”
“네, 그럼요.”
“그리고 그 애 말고 다른 좀비 애들도 몇 있지?”
“네, 두 명 더 있습니다.”
“뭐, 이번 장면에서는 좀비 떼 사이에 애들 둘 정도만 보여도 되지 않겠어?”
“아, 네. 편집 때 신경 쓰겠습니다.”
조감독은 무슨 말인지 단박에 알아듣고 대답했다.
영화 최종본에서는 잘려나가는 장면들이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엑스트라나 조연으로 촬영을 했어도 정작 상영 때 전혀 나오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니 촬영은 하되, 편집할 때 그 아이 출연 장면은 잘라버리라는 뜻이었다.
이것은 하준에게 막말을 한 것에 대한 아빠 윤기철의 자연스럽고도 작은 복수였다.
***
“우리 차 배우님 잘 부탁드립니다. 맛있게 드세요.”
저녁 식사 시간, 첫 촬영이라고 차우민의 팬클럽에서는 도시락을 준비해 왔고,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주고 있었다.
“와, 도시락이 엄청나네. 잘 먹을게요.”
도시락을 받는 사람들은 한우 스테이크, 랍스터, 볶음밥, 샐러드 등 맛있는 요리가 가득한 도시락에 감탄하며 차우민과 그의 팬클럽에 감사함을 전했다.
하준도 최선희와 함께 도시락을 받으러 갔는데, 차우민의 팬클럽 회원들은 하준을 알아보고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와, 안녕! 너 되게 잘생겼다.”
“어머, 네가 우리 차 배우님 아들로 나오는 하준이구나! 실제로 보니까 사진보다 더 귀엽다아! 아이, 예뻐라.”
차우민의 팬클럽 회원들은 차우민 관련 기사들은 모두 공유하며 보기 때문에, 하준의 기사와 대본 리딩 현장 기사도 이미 다 확인해서 하준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차 배우님이 카페에다가 이번 영화에 나오는 아들이 잘생기고 연기도 잘하고 그렇게 이쁘다고 자랑을 잔뜩 써 놓으셨는데, 왜 그러셨는지 이해가 가네.”
“애가 벌써부터 얼굴에 잘생김이 묻었어. 나중에 크면 엄청 인기 많겠다.”
“지금도 인기 많겠는데? 역시 차 배우 아들 역이라는 게 납득이 되는 얼굴이야.”
“너무 귀여워!”
팬클럽 회원들은 하준이 귀여워 어쩔 줄을 몰랐다.
하준은 자신을 예뻐해주는 누나들이 고마워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누나들, 감사합니다.”
“누나? 호호, 애가 사회생활 만렙이네. 아, 귀엽다, 진짜!”
“깨물어주고 싶어!”
“아, 하준아, 이거 더 줄까?”
차우민의 팬클럽 누나들은 후식으로 준비한 쿠키와 푸딩, 과일을 아예 종이봉투에 잔뜩 담아 주었다.
“감사합니다, 누나.”
“아참, 하준아, 누나들이랑 사진 좀 같이 찍어주면 안 될까?”
“사진이요?”
하준은 사진 요청은 처음 받아보는 거라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응, 하준이 유명해지면 자랑하게! 물론 우리 팬카페에도 올리고.”
“네, 좋아요.”
“고마워!”
하준은 차우민의 팬클럽 누나들과 사진을 찍어주었다.
단체로도 찍고, 개개인과도 찍고.
최선희는 하준이 누나들에게 예쁨 받는 모습을 바라보며 기뻐했다.
‘그동안 많이 못 받은 사랑, 앞으로 실컷 받으면 좋겠네, 우리 하준이.’
하준은 누나들과 사진을 찍으며 배우라는 직업은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어서 참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테이블로 돌아와 도시락을 먹어본 하준은 또 한 번 배우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살살 녹는 한우 스테이크와 고소한 버터 발린 랍스터에 마음을 홀딱 빼앗긴 것이다.
“와, 엄마, 이거, 이거 지인짜 맛있어요! 우와아!”
하준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연신 흘러나왔다.
“그렇게 맛있어?”
“네, 천국 같은 맛이에요!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봐요.”
“엄마 거도 더 줄까?”
“엄마 드셔야 되잖아요. 괜찮아요.”
“아냐, 엄마는 하준이 먹는 거만 봐도 배불러. 자, 여기.”
“와, 감사합니다,”
하준은 최선희가 준 스테이크와 랍스터를 순식간에 다 먹어버렸다.
최선희는 하준이 좋아하니 흐뭇해하다가, 한편으로는 잘 못 먹고 자란 것 같아 마음이 짠했다.
“하준아, 하준이는 평소에 뭘 자주 먹었어?”
“짜장라면이랑 밥이랑 김이요.”
하준의 전 양부모는 하준에게 값싼 라면을 자주 먹였고, 라면도 끓여주기 귀찮을 때는 그냥 조미김에 밥을 싸 먹으라고 줬다.
그 말을 들은 최선희의 입에서는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아휴······. 그럼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뭐야?”
“원래는 김이었는데, 오늘 바뀌었어요. 지금 이거로 할래요.”
“스테이크랑 랍스터?”
“네, 너무너무 맛있어요!”
하준이 함박웃음을 웃으며 신나서 대답했다.
최선희는 행복하게 웃는 하준을 보고 앞으로 맛있는 것들을 많이 사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준아, 앞으로 이런 거 많이 먹으러 다니자.”
“정말요? 이거 엄청 비싼 거 아니에요? 아까 스태프 형들이 비싸다고 하던데······.”
“이 정도는 엄마가 사줄 수 있지. 하준이가 맛있다는데! 이거 말고도 하준이가 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
“와······ 엄마, 정말 감사합니다!”
하준은 너무 기뻐서 엄마를 와락 껴안았다.
그런데 포옹 후에 갑자기 자기 두 볼을 양손으로 힘껏 꼬집었다.
“아앗!”
“어머, 하준아, 아프게 갑자기 왜 그러니?”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꿈인지 진짜인지 확인할 때 이렇게 하더라고요. 꿈 아니네요. 헤헤.”
하준이 배시시 웃었고, 최선희도 그런 하준이 귀여워 웃음 지었다.
***
며칠 후, 하준은 영화 촬영이 없는 날이라서 최선희와 함께 도서관으로 향했다.
“오늘은 무슨 책 볼 거야? 생각해 놓은 거 있어?”
“이거요.”
하준이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해서 최선희에게 보여주었다.
“<신입 도사와 비밀의 종소리>?”
“네, 이거 지금 엄청 인기 있는 판타지 소설이에요. 한국판 마법학교 이야기래요!”
하준은 너무 기대가 되는지 흥분해서 말했다.
“오, 그래? 재밌겠네.”
도서관에 도착한 하준은 후다닥 그 책부터 찾았다.
일단 1권을 들고 온 하준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전에는 어른들이 보는 두꺼운 전공 서적 같은 걸 읽더니······ 오늘은 진짜 8살 같네.’
최선희는 그런 하준을 보며 조금은 안심했다.
아이가 어른스러운 건 좋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준을 지켜보던 최선희는 문득 책에 푹 빠져 있는 하준의 사진을 찍어줄까 싶어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마침 월드 엔터테인먼트의 최원상 대표로부터 전화가 오고 있었다.
무음으로 해놨었던지라 지금 핸드폰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못 받을 뻔했다.
최선희는 얼른 핸드폰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네, 대표님.”
-안녕하세요! 지금 어디세요?
“하준이랑 도서관 왔어요.”
-아······ 혹시 지금 사무실로 하준이랑 같이 오실 수 있으신가요?
“지금이요? 급한 일이세요?”
-네, 급하고, 좋은 일이에요. 하준이한테 아동복 모델 제안이 왔습니다!
“지금 바로 갈게요!”
최선희는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곧바로 답한 후, 하준을 데리러 도서관으로 얼른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