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3화
“다 외웠다고?”
윤기철이 깜짝 놀라 물었다.
“네, 도진이 나오는 장면만요.”
“어제 대본 달라고 하더니 외우려고 그런 거야?”
“외우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읽고 싶어서 자꾸 읽다 보니까 저절로 외워졌어요.”
하준은 극 중 엄마, 아빠와 아들 도진이 대화하는 장면이 좋았다.
부모님과 함께하는 장면이 너무 좋고, 부러워서 읽고 또 읽었는데, 어느 순간 대사가 다 외워져 있었다.
사실 이건 하준도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예전 양부모와 함께 살 때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아무리 반복해도 외우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준의 양엄마는 공부 잘해서 부모 호강시켜주기는 다 글렀다며 구박했었다.
“이야, 어린 애가 벌써 자세가 됐네.”
“하룻밤 만에 외운 거면 자세가 된 게 아니라 머리도 엄청 좋은 거 아니에요?”
“그렇네! 이거, 점점 더 기대되는데?”
“궁금해 죽겠으니까, 얼른 연기 보자고. 자, 레디, 액션!”
안달이 난 박 대표가 재빨리 연기 시작 사인을 주었다.
그러자 김지숙이 먼저 연기를 시작했다.
“도진아, 절대, 이 안에서 나오면 안 돼. 무슨 소리가 나도 문 열지 말고 여기 숨어 있어. 아빠가 꼭 찾으러 올 거니까, 알겠지?”
“······응.”
김지숙이 슬픔을 애써 누르며 대사를 쳤고, 하준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김지숙은 하준을 꼭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엄마는 도진이를 너무 사랑해. 알지?”
“응, 나도 엄마 사랑해.”
“우리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
“나중에 언제?”
“아주 나중에······.”
하준의 얼굴을 쓰다듬은 김지숙은 재빨리 보이지 않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바깥에서 문고리를 잡은 것처럼 양손을 모아 잡고 울음을 토해냈다.
그 사이 하준은 보이지 않는 문의 안쪽에서 문을 열려는 시늉을 하며 오열 연기를 펼쳤다.
“엄마아! 엄마! 안 돼! 나만 두고 가지마! 으아앙! 엄마아!!”
하준은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궜고 이내 얼굴은 온통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다.
정말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하준의 눈빛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사무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모두 숨도 크게 못 쉬고 하준의 연기에 몰입해 있었다.
훌쩍.
캐스팅 디렉터가 눈물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훌쩍이는 소리를 냈다.
거의 동시에, 제작사 대표가 박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로 이거야! 내가 원한 연기가 바로 이런 거였다고.”
“제가 엄청나다고 말씀드렸죠? 연기 천재라니까요!”
윤기철이 박 대표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윤 감독님 보시는 눈이 정말 정확했네요. 저 눈물 나서 혼났어요.”
캐스팅 디렉터가 눈물을 닦아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고, 다른 사람들도 이에 동조해 한마디씩 했다.
“진짜 진주네, 진주야.”
“정말 연기해 본 적이 없는 애 맞아요? 그럼 정말 말도 안 되는 건데······!”
“난 눈물 진짜 안 흘리는 사람인데, 저 연기는 참······.”
“맞아, 연기 그 이상의 심금을 울리는 뭔가가 있어.”
다들 칭찬 세례를 퍼붓는 가운데, 김지숙은 하준을 품에 꼭 안아서 달래주고 있었다.
“아휴, 어쩜 이렇게 잘해······. 자, 이제 그만 울자. 뚝.”
하준은 서서히 안정이 되었고,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계속 김지숙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진짜 엄마 품처럼 따뜻했기에.
“하준이는 지숙 씨가 엄청 마음에 드나 본데? 나중에 촬영하면 엄마 껌딱지 되겠어.”
박 대표가 하준이 계속 김지숙에게 안겨 있자,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윤기철이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들어 확인했다.
“그럼 캐스팅 확정된 겁니까, 대표님?”
“난 이보다 더 잘할 애는 없을 것 같은데,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십니까?”
“전 찬성이요.”
“저도요.”
박 대표의 물음에 조감독과 캐스팅 디렉터가 찬성표를 던졌고, 다른 주요 스태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홍현표 제작 프로듀서가 아무 말이 없었다.
“홍 피디는? 왜, 별로야?”
박 대표가 유일하게 아무 대답도 안 하고 있는 홍 프로듀서에게 물었다.
“괜찮긴 한데, 그래도 이렇게 바로 확정할 게 아니라, 이따 온다고 한 아역 배우 오디션도 보고 결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차차, 맞다, 그 스타우드 엔터 애 말이지? 흠······.”
스타우드 엔터테인먼트는 대형 기획사로 가수, 배우, 개그맨을 모두 매니지먼트하고 있는 국내 3대 기획사 중 하나였다.
사실 대형 기획사의 소속 배우를 캐스팅하면 그쪽에서 알아서 홍보를 많이 해주기 때문에 이득이 많았다.
“그래, 보긴 봐야지. 아, 근데 하준이는 소속사가 없는 거지, 윤 감독?”
박 대표가 윤기철에게 물었다.
“네, 아직 없습니다. 근데 이 정도 외모에 실력이면 다들 못 데려가서 안달 날걸요?”
“그럼 스타우드에 소개해 줄까?”
“으음, 그건 하준이 의견도 들어보고 결정해야겠죠. 근데 개인적으로 그런 대형 기획사에서는 워낙 소속 연예인들이 많으니 애가 치일 것 같아서 좀······.”
윤기철은 하준이 혹시라도 기획사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또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부모님이 안 계시면 아이 보호가 안 된다. 그래서 하준의 경우 더욱 걱정이 많이 되었다.
하준에게는 대형이냐 아니냐보다 하준이 안심하고 소속될 수 있는 기획사가 필요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 아무튼, 홍 피디, 그 스타우드 아역은 언제 온댔지?”
“3시에요.”
“한 시간 정도 남았네. 그럼 그 아역 한번 보고 나서 확정하는 걸로. 오늘 안에 결정 내리자고.”
***
1시간 후, 제작사에는 30대 중반의 여자가 한 남자아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녀는 이 추운 날씨에도 연한 핑크빛 코트와 치마를 입고 한껏 꾸민 모습이었고, 같이 온 남자 아이 역시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귀공자 같은 모습이었다.
남자아이는 8세의 아역 배우 이민혁, 여자는 아이의 엄마이자 매니저였다.
사실 이민혁은 홍 프로듀서가 열심히 찾아다녀서 겨우 건진 도진과 비슷한 이미지의 아이였다.
홍 프로듀서는 직접 스타우드에 연락해 이민혁에게 오디션을 보러 한 번 와보라고 했고, 분명 이민혁이 이 역을 따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준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하준은 홍 프로듀서가 보기에도 연기를 참 잘하긴 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이 찾아낸 이민혁이 연기를 더 잘해서 도진 역을 따내길 바랐다.
“그럼 곧바로 오디션 시작할게요. 어머님은 밖에서 기다려주세요.”
이번에도 조금 전처럼 감독인 윤기철을 비롯해, 박 대표와 홍 프로듀서, 영화 제작의 주요 스태프들은 사무실에 모여 있었고, 이민혁이 오디션을 보기 위해 안으로 들어왔다.
이민혁이 오디션을 볼 장면은 아까 하준이 연기했던 바로 그 장면이었다.
아까와 똑같이 엄마 역할은 김지숙이 해주었고, 이민혁은 대본을 보며 도진의 역할에 임했다.
이민혁은 연기를 꽤 잘 해냈다. 눈물도 금방 펑펑 흘리고, 대사 전달력도 좋았다.
“엄마아! 엄마! 안 돼! 나만 두고 가지마! 엄마아!!”
“컷! 그래, 잘하네.”
박 대표가 컷을 외치자, 이민혁은 언제 울었냐는 듯 금세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와 눈물을 쓱쓱 닦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음, 수고했어요.”
박 대표는 이민혁의 어머니에게 내일 전화로 결과를 통보해 주겠다고 알리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자, 그럼 회의해봅시다. 이민혁 군 연기 어땠나요?”
“연기를 잘하긴 잘하더라고요.”
“맞아요. 애가 발음도 또박또박 잘하고, 눈물 연기도 좋았어요. 근데······.”
캐스팅 디렉터가 칭찬 후에 잠깐 뜸을 들였다.
“좀······ 너무 연기하는 티 나지 않았어?”
윤기철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어 물었다.
“맞아요! 제가 하려던 말이 그거였어요. 나 연기한다, 뭐 이런 느낌이 있어서······. 울림이 좀 부족하달까요?”
“나도 같은 생각이야. 마지막에 내가 컷 하니까, 바로 눈물 닦고 멀쩡해 보이던 것도, 기계적인 느낌이 들더라고.”
역시 사람들이 느끼는 건 다 비슷한지, 다들 이민혁이 연기는 잘하는 것 같은데, 인위적인 느낌이 든다고 입을 모았다.
홍 프로듀서도 그렇게 느끼긴 했는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약 10분간의 토의 끝에 드디어 도진 역이 확정되었다.
“스타우드 엔터의 홍보력이 아쉽긴 하겠지만, 그래도 연기를 더 잘하는 애를 뽑는 게 맞지.”
“그렇죠. 그리고, 요즘은 너튜브 같은 것도 있고, 홍보방법은 많잖습니까.”
“오케이. 하준이로 간다!”
윤기철은 결정이 나자마자, 하준이 대기 중인 옆 사무실로 후다닥 달려갔다.
“하준아! 하준이가 도진이 역할 하게 됐단다!”
윤기철이 양팔을 벌리며 기쁜 소식을 전했다.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하준은 활짝 웃으며 윤기철에게 달려가 안겼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아, 감독님.”
“하하, 그래. 영화 촬영할 때만 감독님이라고 부르고, 지금은 그냥 편하게 아저씨라고 불러도 돼.”
“네, 정말 감사합니다, 아저씨.”
하준은 너무 기뻤다.
영화를 찍으면 밥도 먹을 수 있고, 잠도 재워준댔으니까 보육원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근데, 영화 찍으면 TV에도 나오고 할 텐데, 보육원에서 나 잡으러 오면 어쩌지?’
하준은 고민 끝에 보육원 이야기를 윤기철에게 털어놓기로 했다.
“저, 아저씨, 사실은요······.”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윤기철은 하준에게 더욱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부모 없이 보육원에 버려진 것도 서러운데, 보육원에서는 괴롭힘을 당하고, 입양돼서 행복하려나 했는데 4년 만에 파양되고······.
‘세상에, 어린 나이에 벌써 이 많은 아픔을 겪었다니······.’
윤기철은 하준이 더 이상은 상처받을 일 없이 살도록 도와주리라 마음먹었다.
윤기철은 백방으로 정보를 수집해 하준을 보육원으로 보내지 않고 자신이 보호하고 있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하준아, 혹시 아저씨가 하준이의 후견인이 되어 줘도 될까?”
윤기철이 조심스럽게 하준에게 물었다.
“후견인이 뭔데요?”
“후견인은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도와주고 보호해주는 사람이야. 부모님이 해주는 보호를 대신해준다고 생각하면 돼.”
“그건 입양이랑 뭐가 달라요?”
“음, 법적으로 부모 자식 관계가 되는 건 아니고, 비슷한 역할만 해주는 거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
윤기철은 정확하진 않지만, 8살 아이가 이해할 정도로만 쉽게 설명했다.
“입양은 아닌데, 부모님처럼 나를 대해주는 거예요?”
“뭐, 비슷해.”
“그럼 아저씨랑 이 집에서 같이 살아요?”
“그렇지?”
“아줌마도 괜찮으시대요······?”
“그럼, 당연하지! 음, 그리고 말이야, 지금 너의 후견인은 보육원 원장님으로 되어 있어.”
“네? 보육원 원장님이요?”
하준은 자길 괴롭히던 애의 엄마가 자신의 후견인이라는 사실에 경악했다.
처음에 윤기철은 하준이 보육원으로만 돌아가지 않고, 자신이 돌봐 줄 수 있도록 위탁 가정 신청만 하려 했었다.
그런데 알아보니 하준이 돌아가기 싫어하는 그 보육원의 원장이 하준의 후견인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응, 그래서 아저씨가 보육원 원장님 대신······.”
더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후견인이 그 누구라도 보육원 원장님보다는 나을 텐데, 후견인이 되어주겠다는 사람이 기쁘게도 윤기철 아저씨다. 그러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요! 무조건 아저씨가 제 후견인이 되어주세요. 감사합니다, 아저씨. 정말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