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2화
기철이 감탄해 마지않으며 하준의 눈물 연기를 보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다가왔다.
8살짜리 아이가 서럽게 통곡을 하고,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는 40대 아저씨.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이기 충분했다.
“무슨 일이니? 이 아저씨가 괴롭혔어?”
“애기야, 왜 우니?”
기철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하준을 달랬다.
“연기 한번 시켜본 거예요. 별일 아닙니다. 하준아, 이제 그만, 그만 울어도 돼.”
기철의 말에 하준이 서서히 감정을 추슬러 울음을 그쳤다.
별일이 아닌 것을 확인한 주변 사람들은 다시 각자의 길을 갔다.
“정말 잘했어! 기가 막힌 눈물 연기였어.”
“저 정말 잘한 거예요? 그럼 영화 찍을 수 있어요?”
“응, 아주 잘했어. 이 정도면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꼭 찍어야지. 썩히긴 아까운 재능이니까.”
“와······ 감사합니다.”
눈물을 닦는 하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듯했다.
“근데 아까 2가지 시켜본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랬지. 나머지 하나는 밖에서 해봐야 돼.”
“밖에 추운데······. 안에서 하면 안 될까요?”
“안에서는 하기 좀 힘든 거야. 달리기거든.”
“네? 달리기요?”
하준은 이해가 안 갔다. 연기와 달리기가 무슨 상관이 있길래 달리기를 시키는 건지 말이다.
‘체력을 보려는 건가?’
“신나게 달리면서 웃지 않아야 돼. 그걸 할 수 있어야 한단다.”
“쉽네요.”
“말처럼 쉽지 않을 수도 있어. 대부분의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거거든.”
아이들은 이상하게도 달리기를 시키면 웃는다.
그래서 아이들이 화가 난 표정으로 달리는 장면을 찍기가 정말 어려웠다.
기철의 이번 영화에는 겁에 질려 달리는 장면, 화가 난 상태로 달리는 장면이 있기 때문에 이 두 번째 테스트는 무척 중요한 사안이었다.
기철과 하준은 근처에 긴 직선거리를 달릴 수 있는 길을 찾아갔다.
“지금 갈게요!”
하준이 100미터 떨어진 곳에서 기철에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외쳤다.
“조심해라.”
“네에!”
하준이 기철에게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기철은 두 눈을 크게 뜨고 하준의 표정 변화를 살폈다.
‘완벽해!’
하준은 웃음을 참는 기색도 없이 무덤덤하게 100미터를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헉헉. 아저씨, 보셨어요? 저 한번도 안 웃었죠?”
“그래, 대단했어! 아구, 이쁜 것.”
기철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 준 하준이 너무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기철이 하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예쁘다고 하자, 하준은 갑자기 피식 웃었다.
“아저씨, 근데요, 안 웃었다고 이렇게 칭찬받는 거, 좀 웃긴 것 같아요.”
“이거 어려운 거라니까 그러네. 하하. 근데 너 웃을 줄은 아는구나. 웃으니 더 귀엽네.”
기철은 문득 이렇게 귀엽고 착한 아이를 왜 파양했을까 의아했다.
“하준아, 일단 우리 집으로 갈래? 가서 아저씨랑 좀 더 얘기해보자.”
“무슨 얘기요?”
“뭐, 아저씨 얘기, 네 얘기, 햄버거 얘기, 영화 얘기 그런 것들.”
하준은 기철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까지 하준에게 이렇게 잘해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다쳤다고 약도 발라주고, 햄버거도 사주고, 잘한다고 칭찬도 해주고.
“네, 좋아요.”
하준은 기꺼이 기철을 따라나섰다.
***
“어머, 귀여워라! 네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는 그 보석이구나?”
기철이 하준을 데리고 들어가자, 기철의 부인 최선희가 활짝 웃으며 하준을 반겼다.
“보석이요? 제가요?”
“응, 아저씨가 아까 전화로 그러던걸? 너무 고맙다. 이렇게 나타나 줘서. 여기 아저씨가 딱 마음에 드는 아역 배우를 못 찾아서 엄청 힘들었거든.”
최선희가 반겨주니 하준은 이 집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육원으로 안 들어가길 정말 잘했다.
“하준아, 잠깐 여기 소파에 앉아서 TV 보고 있을래? 아저씨는 아줌마랑 할 일이 좀 있어서.”
“네.”
하준이 TV를 보는 사이, 기철은 최선희에게 하준의 사정을 설명했다.
“어머, 어린 애가 마음고생이 심했겠네. 근데 파양됐으면 보육원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 아니야?”
“내가 오는 길에 슬쩍 물어봤는데, 어떻게 된 건지 말을 안 하더라고. 그래서 일단은 우리가 좀 데리고 있을까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때?”
“난 당연히 괜찮지. 이런 일엔 당신 덕분에 이골이 났잖아.”
기철은 영화를 찍으면서 알게 된 무명배우들이나 스태프들이 오갈 데가 없으면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오기 일쑤였다.
하지만 최선희는 그런 기철의 마음을 이해했다.
원래 이 바닥이 어렵게 생활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 역시 그런 무명 배우였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최선희는 무명 배우 시절 기철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 과정에서 사랑에 빠져 이렇게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다행히 기철의 영화 한 편이 흥행에 웬만큼 성공해서 이런 번듯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지만, 그 전에는 기철 부부도 친한 영화감독들에게 도움도 많이 받았다.
“매번 이해해줘서 고마워. 내가 어떻게 이런 천사랑 결혼했나 몰라.”
“알아주니 고맙네.”
기철이 최선희를 꽉 끌어안으며 고마워하자, 최선희가 새침하게 웃었다.
기철은 방에서 영화 시나리오와 대본을 챙겨 거실로 나왔다.
“하준아, TV 더 볼래? 아니면 아저씨 영화 설명해 줄까?”
“아저씨 영화 무슨 영화인지 궁금해요. 얘기해주세요.”
“그래, 근데 너 공포영화, 아니지, 8살인데 공포영화를 볼 수가 없지, 참. 좀비 아니?”
“좀비요? 알긴 알아요. 죽은 사람이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거잖아요. 맞죠?”
“응, 맞아. 어떻게 알아?”
“우리 반 애들이 나는 좀비네 뭐네 하면서 이렇게 팔 들고 돌아다니는 장난 치더라고요. 막 물려고도 하고요.”
하준은 양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좀비 흉내를 냈다.
“하하, 그래, 바로 그 좀비가 나오는 영화야. 내가 너한테 맡기고 싶은 건 주인공 아저씨의 아들 역할이고.”
“아하, 그래서 아까 달리기 시켜보신 거예요? 좀비한테서 도망가야 하니까?”
“그렇지. 그럼 대사 좀 연습해 볼까? 몇 장면만.”
“네.”
사실 기철의 의견이 가장 영향력이 크긴 하지만, 배우 캐스팅은 기철 혼자만의 의견으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제작사 대표와 프로듀서의 동의를 얻기 위해 하준은 그들 앞에서 연기를 해보여야 했다.
그래서 먼저 여러 장면의 연기를 연습시켜 제작사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여기 대사랑 설명 보이지? 그거 보고 대사 한 번 해볼래?”
“네, 근데 여기 엄마 역은요?”
“잠깐만. 여보! 이리 좀 와봐.”
기철은 최선희를 불러 엄마 역할을 해주라고 부탁했다.
최선희는 하준의 옆에 앉아 다정하게 대사를 시작했다.
“우리 아들, 오늘 엄마랑 백화점 놀러 갈까? 운동화 사줄게. 맛있는 것도 먹고.”
“아싸, 좋아!”
하준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부르며 좋아했다.
기철은 하준의 해맑은 표정과 자연스러운 동작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근데 아빠도 같이 가는 거야?”
“아빠는 일하러 가셨잖아. 아빠는 바빠서 같이 못가.”
“치이, 아빠는 맨날 바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신나서 어쩔 줄 모르던 하준은 갑자기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삐죽 내민다.
그때, 최선희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하준을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하준아, 너 정말 연기 잘한다. 귀여워 죽겠네!”
그러더니 곧 흐뭇한 표정의 기철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여보, 진짜 얘 너무 귀엽다. 연기도 진짜 자연스러워. 연기 배운 애들은 대부분 연기하는 티 많이 나는데. 하준이는 진짜 애들이 평상시에 말하는 투야.”
“그러게. 어쩜 이렇게 잘하지? 근데 얘 우는 연기를 더 잘해. 아주 보는 사람 마음이 찢어질 것 같다니까.”
“정말?”
“그렇다니까. 음, 여기, 엄마랑 헤어지는 장면도 한번 시켜보자.”
기철은 다양한 감정과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몇 장면을 하준에게 시켜보았다.
하준은 시키는 대로 족족 너무 잘 해냈다.
아직 8살이라 발음이 조금 분명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건 그것대로 8살의 느낌이 나서 좋았다.
기철과 최선희는 연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아이가 연기를 너무 잘 해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사실 하준 역시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나 진짜 연기 잘하나 봐!’
하준은 대화와 지문의 내용에 맞게 감정을 이입해서 대사를 읽은 것뿐인데, 칭찬이 쏟아지니 신기하면서도 너무 기뻤다.
하준은 칭찬을 받으니 연기하는 게 좋았다.
그런데 칭찬뿐만이 아니라 하준의 마음을 사로잡은 연기의 장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연기를 하면 엄마, 아빠가 생긴다는 것!
“아저씨, 영화는 얼마 동안 찍어요?”
하준이 대뜸 기철에게 물었다.
“음, 길면 6개월도 걸리고, 짧으면 두세 달?”
“아하······.”
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몇 달간 엄마, 아빠가 생기는 거잖아?
너무 좋다!
하준은 하루빨리 영화를 찍고 싶어졌다.
***
“이 아이야?”
“네, 얘가 바로 제가 발견한 길 위의 진주입니다.”
제작사 대표의 물음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프로듀서를 포함한 제작사 사람들과 연출부 직원들, 캐스팅 디렉터 등이 우르르 몰려와 하준을 둘러쌌다.
“어머, 진짜 귀엽게 생겼다!”
“아니지, 잘 생겼는데?”
“눈망울 좀 봐요. 너무 예쁘네. 남자애가 어쩜 저렇지?”
일단 외모는 통과인 모양.
다들 예쁘다, 귀엽다, 잘 생겼다 난리였다.
하준은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조금 위축된 듯했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모두 칭찬이라, 곧 적응하게 되었다.
“윤 감독, 얼굴만 보고 데려온 건 아니지? 아무리 이미지가 맞아도 연기 못하면 절대 안 돼.”
“그 말씀은 일단 이미지는 통과라는 말씀이신 거죠?”
“그래, 찰떡이긴 해.”
제작사의 박 대표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래, 믿어보지. 자, 그럼 어디 한번 시켜보자고.”
기철을 비롯해, 박 대표와 홍 프로듀서, 조감독, 캐스팅 디렉터 등 영화 제작의 주요 스태프들은 하준의 연기를 보기 위해 한 사무실에 모였다.
“하준아, 여기 가운데에 앉아서 이 대본 보고 연기하면 돼. 여기 엄마랑 대화하는 장면부터 해볼까?”
“엄마 역할은요?”
“음, 아저씨가 대신 해줄게.”
“엄마는 아저씨가 아니라 아줌마가 해야 되는데······.”
하준은 기철이 엄마 역할을 대신하는 게 영 마음에 안 드는 기색이었다.
“지금은 해줄 사람이 없어서······.”
그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배우 김지숙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제가 좀 늦었죠?”
“어? 지숙 씨, 오늘 일 있어서 못 온다더니 어떻게 왔어요?”
“일이 좀 일찍 끝났기도 했고, 우리 아들도 궁금하고 해서 달려왔어요.”
“역시 우리 지숙 씨 열정은 알아줘야 해. 마침 잘 왔네. 아들 대사 좀 맞춰줘. 방금 여기 윤 감독이 엄마 역할 대신해준다고 했다가 퇴짜 맞았거든. 하하.”
“아, 그러셨어요? 제가 달려오길 잘했네요. 안녕, 아들!”
김지숙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하준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엄마.”
“어머, 얘 낯도 안 가리는 거 봐. 바로 엄마라고 하네요. 귀여워라!”
김지숙은 하준의 엄마라는 말에 감동받은 듯 좋아했다.
“자, 여기 대본. 엄마는 다 외워서 안 봐도 되니까, 너 혼자 봐도 돼.”
김지숙이 하준을 배려하며 대본을 펼쳐 하준 앞에 놨다.
하지만 하준은 뜻밖에도 대본을 덮으며 말했다.
“저도 안 봐도 돼요. 다 외웠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