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이렇게 간단해도 되는 건가?"
"빨리해, 누구 올라온다."
"네."
너무 간단해서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적의 심장부에 너무 간단하게 침투했다.
그곳에 있는 적의 보물에 너무 쉽게 손이 닿았다.
본래 경계가 삼엄해야 하는 곳에 너무 쉽게 도달했다.
하지만 의심하고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우리가 쉽게 도달했듯 그 누구나 쉽게 올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도 누군가 올라오고 있었다.
"할게요."
"그래."
서준의 선에서 검은색의 균열이 일어났다. 그 너머에는 재배지 섬이 흐릿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검은색의 균열은 붉은 보석의 중간쯤에 걸쳐졌다.
이대로 게이트를 폐쇄하면 모든 게 끝이 난다.
"거기 누구요?"
그때 밑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위만의 아래에서 일하는 자들이 게이트의 파동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젠장! 서둘러!"
서준은 서둘러 게이트를 닫았다. 그와 동시에 보석의 절반이 사라지면서 시계탑 상단에 달린 시계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서준은 약국으로 게이트를 열었다.
"흔적 지워요!"
"알고 있어!"
서준은 서둘러 게이트를 넘었고 련은 검을 꺼내 들었다.
악룡의 시신을 이용해 만든 검이었다. 공중을 몇 번 베더니 만족한 표정을 지은 련이 서준이 넘어선 게이트를 따라 넘었다.
"빨리 닫아!"
"네!"
서준이 게이트를 닫았다. 시계탑 내부에 있던 게이트가 사라지면서 공중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련의 참격이 지금에서야 나타난 것이다. 이로써 게이트 두 개의 흔적은 모두 지워졌다.
"휴, 십년감수했네."
"까닥하다간 추격당할 뻔했어. 놈들이 예상보다 빨리 눈치챘어."
"어쨌든 성공이네요. 이제 다시는 지구에 게이트가 열릴 일은 없어요."
"그래."
서준과 련은 자축하며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씩 꺼내 들었다.
이렇게 기쁜 날 술이 빠질 순 없다.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뭘?"
둘이 맥주병을 깡 소리 나게 부닥치며 말했다.
탄산을 잔뜩 머금은 맥주가 병 위로 거품을 흘려보냈지만 개의치 않았다.
기쁜 날이니까.
"돌아가실 거예요? 이제 여기 있을 이유 없잖아요."
서준의 말에 련은 바로 답하지 않고 맥주로 목을 축였다.
그렇다. 련은 이제 이곳에 머물 이유가 남지 않았다.
추적장치는 이미 제거되었다. 저 넓은 세상에서 위만에 쫓길 위험은 없다.
추격자가 붙더라도 여의주를 소유한 지금 웬만큼 대규모 집단이 아닌 이상 련을 잡을 수 없다.
그동안 서준의 목표를 도우려고 남았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그것조차 끝이 났다.
련이 이제 지구에 남을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글쎄? 그냥 남아있으려고 했는데?"
"진짜요? 정말인가요?"
련이 맥주 한 모금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왜? 싫어?"
"그럴 리가요. 저야 사부님이 남으면 너무 좋죠."
서준이 웃으며 답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서준은 진심으로 련이 남길 원했다.
그동안 함께 지내며 쌓아온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떠난다고 하면 굉장히 섭섭했을 것이다.
"거기 가봐야 이제 아는 사람 한 명 없어."
"위만 있잖아요."
"이 새끼가."
련이 지구로 넘어온 후 시간이 상당히 흘렀다. 시간 괴리 때문에 그곳의 시간은 이미 5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련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이제 남아있지 않다.
그곳에서 련을 기억하고 있다는 건 곧 련의 적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두고 내가 어떻게 가겠냐."
련이 휴대폰을 툭툭 건드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컴퓨터도 있었고 TV도 있었다.
련은 이미 현대 문물의 노예가 되었다. 엄청난 단련을 쌓아 올린 련조차도 헤어나올 수 없었다.
현대 문물은 련의 인내심조차도 뚫어버렸다.
"그거 중독이에요. 치료해야 돼요."
"됐다. 내 알아서 한다."
련은 그렇게 말하며 노트북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생각해보니 좀 이상하군.
서준은 그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별이 딴지를 걸었다.
'뭐가?'
-너무 쉬워.
'운이 좋았지.'
물론 너무 쉬웠다.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서준은 운이 좋았다고 믿고 있었다.
-그게 아니야. 놈들이 아티팩트를 그곳에 둔 이유가 단지 크기가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럼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크기가 큰 물건은 훔치기 힘들다.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법칙은 아니다.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거대한 물건을 훔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리고 시계탑 중앙에 박혀있는 아티팩트는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이었다.
상식적으로 그런 물건을 그렇게 가만히 놓아둘 리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 정도 아티팩트가 발동하기 전이라고 아무런 기운도 내뿜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돼!
'그럼 아무 기운도 느끼지 못한 게 잘못됐다는 이야기야?'
-그래! 너나 련 정도 되는 놈들이 아티팩트에서 뿜어나오는 기운을 하나도 못 느꼈다는 게 말이 돼? 그것도 그렇게 큰놈을!
'젠장, 그럼 어떻게? 지금이라도 다시 넘어가야 하나?'
지금 넘어가면 너무 위험했다. 련의 말처럼 시계탑 중앙에 박힌 보석이 위장이었다면 놈들은 더욱 경계를 강화했을 것이다.
심지어 서준은 아티팩트가 숨겨진 위치를 모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 재도전하는 건 옳지 않다.
-일단 기다려 보자. 급하게 움직이지 마라. 방법을 생각해보자고.
'그래.'
서준이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워?”
“아, 사부님. 일어나셨어요?”
어제 별과 대화한 이후 서준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혹시 일이 잘못된 건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에 서준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나 종일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만약 서준이 파괴한 아티팩트가 가짜였다면 다시 놈들을 찾아가 정면 대결을 하는 것 말고는 생각나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위만은 수많은 병력을 지니고 있었고 물량 공세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언제든 잘 통하는 최고의 전술이었으니까.
“어제 별과 대화를 좀 해봤는데 불안하네요.”
“뭐가?”
“별이 말하는 걸 들어보니 그럴 듯해서요.”
“그러니까 뭐가?”
련이 답답한지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몇 갠지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여의주를 뭉쳐 만든 아티팩트잖아요.”
“그렇지.”
“그런 엄청난 물건이……. 아무리 잠들어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런 에너지를 품고 있지 않다는 게 말이 되나요? 사부님이나 저나 둘 다 아무것도 못 느끼는 게 말이 돼요?”
“흐음…….”
서준의 이야기를 들은 련이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위험해서 빠르게 빠져나와야 생각해서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돌아와서는 성공했다는 기쁨에 되짚어보지 못했다.
너무 경솔했다.
“그럴듯한 이야기네. 그 정도 힘을 품고 있다면 미발동 상태여도 누출되는 힘이 있기 마련인데……. 단 한 줌의 힘도 세지 않았다는 건 있을 수 없지.”
“그렇죠?”
“그래. 우리가 너무 방심했구나.”
방심했다. 너무 쉽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심 쉬워서 좋다는 생각을 했다.
단지 운이 좋다고 치부했다. 충분히 되짚어 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성공한 후에도 성취감에 휩쓸려 되짚어보지 못했다. 평소였으면 몇 번이나 다시 생각해 봤을 상황에도 무시했다.
맥주를 마시며 자축했다. 그래선 안 됐다.
“하지만 지금 확인할 방법은 없죠.”
“넘어가서 정찰을 좀 해볼까요?”
“아니, 너무 위험해. 지금은 경계가 더 삼엄해졌을 거야. 그 물건이 진짜든 아니든 누군가 침투했다는 건 분명하니까.”
“그렇겠죠…….”
놈들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도 불가능했다. 차라리 여의주의 힘을 이용해 정면으로 붙으면 붙었지 염탐하는 것은 더 힘들었다.
서준이 그들보다 앞서는 건 화력이었지 실력이 아니었으니까.
“일단 기다려 보자. 기다리는 것밖에 답이 없구나.”
“네.”
련과 이야기해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기다리는 것, 그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서준은 무력감에 몸을 비틀었다.
“형님!”
그와 동시에 약국 문이 열리며 오세근과 김비서가 찾아왔다. 오세근은 여느 때와 같이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약국 문을 열었다.
“어, 왔어?”
“뭐 하고 계셨습니까? 동생 며칠 안 왔다고 울고 계신 거 아니죠?”
“그래, 심심해 죽는 줄 알았네.”
굳이 오세근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저렇게 밝은 녀석을 괜히 걱정에 빠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그거 형님이 하신 거죠?”
“뭘?”
“아 그거 있잖아요! 그저께 번개로 게이트 싹 쓸어버리신 거. 형님 맞죠?”
“그래.”
“아! 역시!”
스물세 개의 게이트를 단 세 번의 벼락으로 무력화시켰다. 당연히 대서특필될 수밖에 없었다.
벌써 이틀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텔레비전을 틀면 그 이야기만 나온다. 물론 그 발원지가 서준이라는걸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와, 여의주가 진짜 대단하긴 대단하네요. 그것만 있으면 용도 쉽게 잡겠어요.”
김비서가 감탄하며 말했다. 곳곳에 있던 CCTV나 위성 사진에도 벼락이 치는 모습이 똑똑히 찍혔다.
그 정도로 강력한 전류가 흐른다면 주변의 전자기기를 망가트릴 법도 했지만 서준은 정확히 게이트만을 타격했다.
그 외의 장소에 조금의 전류도 새어나가지 않게 조절했다.
덕분에 벼락이 내리치는 장면은 유튜브만 들어가도 누구나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아니요, 용한테는 안 먹힌다던데요?”
“아! 맞다. 그랬던 거 같네요.”
여의주를 들고 용과 싸우는 것처럼 바보짓은 없다.
여의주는 애초에 용이 부리던 물건이다. 그런 물건을 용에게 들이미는 것은 나 바보요! 하고 자랑하는 것밖에 안 된다.
오히려 여의주의 제어권을 뺏겨 내 공격에 내가 당할 뿐이다.
“그래서 위만 그놈들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글쎄다……. 계획을 세워 봐야겠지.”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요? 게이트 발생 빈도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그래야지.”
오세근과 김비서에게는 어제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둘이 간다고 하면 두 사람이 반대하고 나설 게 뻔했다.
그렇게 위험한 곳을 두 사람만 보낼 수 없다며 따라나설 게 뻔했다. 그런 모습을 볼 수는 없었기에 말하지 않고 갔는데 일이 틀어져 버렸다.
괜히 불편해졌다.
“그래도 그저께 게이트가 열렸으니 한동안은 안전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통계로만 보면 그렇지.”
한번 게이트가 열린 곳은 한동안 게이트가 열리지 않았다. 지금은 게이트 발생 빈도가 매우 늘어나서 또 모르는 일이지만 그래도 적어도 한 달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물론 호랑이 약국 주변이 아닌 다른 곳에는 언제든 그 가능성이 열려있었다.
“그래도 우리 집 마당에 안 열리면 마음이 좀 편하더라고요. 적어도 내 가족은 안전한 거잖아요. 제가 너무 이기적인가요?”
“사람이면 다 그렇죠, 뭐. 저도 여기서 게이트 열리면 신비 걱정부터 들더라고요.”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게이트가 열려도 아무 걱정 없는 사람들이다. 게이트가 몇 개 열리든 가뿐히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변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 이들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설마……. 이거?”
“그럴 리 없는데!”
그때였다. 네 사람의 감각에 무언가 걸려들었다. 너무 익숙한 파동이었다.
“게이트…….”
게이트였다. 시계탑의 보석이 진짜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실패했군.”
어제의 모험은 실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