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진짜 중요한 내용은 그 뒤에 있었다.
련은 마지막 페이지를 해석해 내면서 크게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준은 지금까지 련이 이렇게까지 놀라는 건 본 적 없었다.
서준으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왜 그러세요?"
"놀랍구나……. 놀라워."
련은 서준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서준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계속 감탄만 하고 있었다.
"이런 게 정말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것인가?"
련은 혹시라도 해석이 잘못됐을까 다시금 일기를 읽으며 펜을 굴렸다.
썼다 지웠다를 몇 번 반복하던 련은 숨을 내뱉으며 일기를 덮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아! 뭔데 그러세요."
"자, 봐라."
그제서야 련은 서준에게 일기를 해석해 적은 종이를 건네주었다.
서준은 재빠르게 종이를 낚아채어 눈앞에 가져다 댔다.
서준 역시 련을 놀라게 할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많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내가 이렇게 죽고 나면 놈들은 결국 차원문을 열어 다른 차원을 공격할 것이다. 물론 위대한 짐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 뒤통수에 칼을 꽃은 놈들의 계획이 성공하게 가만둘 생각은 단 하나도 없다. 내 힘을 차원 너머로 이양할 생각이다.
내 힘을 받은 차원 너머의 사람들이 놈들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위대한 짐의 힘을 나눠 받은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될 것이다.
저열한 용과 손을 잡아 차원문을 열어 식민지를 개척하겠다는 놈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아……."
충격적이었다. 련이 작성한 일기 마지막 페이지 해석본을 읽은 서준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서준을 비롯한 지구의 초인들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비밀이 밝혀졌다.
지구의 초인들이 별다른 훈련 없이도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비밀이 밝혀졌다.
모두 별의 안배였다. 물론 그 목적이 사악한 집단을 막겠다는 순결한 의지는 아니었다.
자신의 뒤통수를 친 놈들의 목적을 막겠다는 불순한 의도였다.
그러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쩌면……. 하필이면 네가 별과 만난 게 우연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그렇겠죠……. 차원문을 열고 넘어오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었을 테니까요."
별을 만나려면 우선 차원문을 열어야 했다.
그래야 이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지구에만 있었어도 별의 영혼이 담긴 아티팩트를 대부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괴수들은 결국 게이트를 넘어 지구로 넘어왔을 테니까.
그러나 별의 영혼이 담긴 아티팩트를 아무리 많이 얻어봐야 별과 대화할 수는 없었다.
별의 의식이 담긴 영혼은 이곳에 있던 단검 속에 있었으니까.
다른 영혼은 힘을 강대하게 해줄지언정 별과 통할 수는 없었다.
결국 별의 의식을 깨우려면 이 방에 들어와야 했다.
그래야 단검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리고 단검을 손에 얻어야만 별을 깨울 수 있었다.
결국 별을 깨울 수 있는 건 게이트를 열 수 있고, 이 방에 올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서준이 유일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강제로 주입한 사람이다."
"그렇죠, 정말 대단하네요. 별은……. 자기 자랑으로만 듣다가 이렇게 직접 목도하니 놀랍네요."
"그리고 그런 사람이 아무에게나 차원문을 여는 능력을 주었을 리 없지."
련의 생각은 이러했다. 차원 너머에 있는 사람들에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능력을, 그것도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차원을 넘어 나눠주었다. 그런 일이 가능한 별이 무분별하게 능력을 뿌렸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자신을 깨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차원문을 여는 능력을 여러 명에게 줄 수는 없었겠지. 그만큼 강력한 능력이니까……. 분명 영혼의 파장이 가장 잘 맞는 사람을 선별했을 거다."
"그럼 그게 저라는 이야긴가요?"
"그렇지. 열두 조각이 났다고는 해도 보통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인 건 확실하지. 그 상태로 이런 엄청난 일을 벌인 거니까…….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렇죠."
보통 사람의 영혼이었어도 영혼의 파장이 맞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리 강력한 영혼을 소유하고 있어도 다른 사람의 영혼을 품는다는 건 부담이었다.
근데 그 영혼이 별의 영혼이라면 부담은 더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영혼이 열두 조각이 나뉜 상태로도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이다. 네가 아니었다면 영혼을 품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지. 아마도 별은 자신과 영혼의 파장이 가장 흡사한 사람이 나올 때까지 참고, 참고 또 참은 듯하구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래, 영혼이 찢겨나갔다. 한번 봉인을 당했던 육체도 불안정했을 거다. 그런 상태로 용을 잡았다. 게다가 지구로 능력을 전이했다. 기억을 잃은 것은 봉인 때문이 아닌 그 때문이었을 거다. 너무 많은 힘을 사용했어."
서준에게 별의 능력이 전달될 때까지 어떤 시간과 노력이 투자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서준은 그동안 별이 혼자 숨어서 해왔을 노력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동안 별은 외로웠을 것이다. 위만과 내통한 용을 잡은 후 흩어져가는 영혼을 붙잡으며 괴로워했을 것이다.
기억은 서서히 소실되어 가는데 영혼의 파장이 맞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오랜 세월 그 고통을 홀로 참았을 것이다.
영혼이 찢겨나가 정신적인 성장 역시 멈추었을 것이다. 어린 아이인 채로 남아서 오랜 세월을 이 좁은 방에서 홀로 숨어 지냈을 것이다.
서준은 눈물이 흐르려던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별을 빨리 찾아야겠어요."
"그래, 그러자. 육체를 찾았든, 영혼 상태로 있든 어딘가에는 분명 있을 거다. 그리고 그 장소는 분명 너와 관련이 있을 거야."
"네. 최대한 빨리 찾아야겠어요."
"그래, 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단지 영혼의 파장이 맞다는 이유로 서준을 선택했다. 물론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 거다.
서준을 찾는 데만 해도 이리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
그리고 서준을 찾아낸 게 놈들이 게이트를 열어 대침공을 일으킨 타이밍과 맞춘 건 단지 천운에 불과했을 거다.
별은 그렇게 서준을 찾아내 힘을 전해주었다. 지금은 영혼을 되찾은 상태지만 육체는 없을 가능성이 크다. 육체가 남아있기에는 흐른 시간이 너무나도 길다.
아마도 영혼 상태로 어디선가 서준을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리고 그렇다면 서준과 관련이 있는 장소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리고 서준은 짐작 가는 장소가 두 곳이 있었다.
"어디 무언가 떠오른 표정인데?"
그것을 눈치챘는지 련이 물어왔다. 과연 련의 통찰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네, 두 군데가 있어요. 이게 아니면……. 저도 더는 모르겠네요."
"어디지? 일단 가보자. 가보면 해결될 일이다. 고민은 그 이후에 해도 문제없다."
역시 련이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련의 선택을 따르면 된다.
지금까지 련의 선택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서준은 련을 믿고 그냥 가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 두 군데가 어디지?"
"한 군데는 약국입니다. 별과 제가 가장 오랜 시간 머물렀던 곳이죠."
"일리가 있군."
약국은 별과 서준이 가장 오래 머무른 곳이었다.
약국이 곧 서준의 집이기도 했다. 약국은 곧 서준의 일터이자 서준의 집이었다.
서준에게 종속되어 있는 별은 어쩔 수 없이 약국에 오랜 시간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곳은?"
"재배지 섬입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군."
재배지 섬은 약국 이후로 서준이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다.
별은 초창기 서준이 재배지 관리에 무척이나 힘을 쓸 때부터 함께했다.
물론 신대륙을 발견하고 별과 함께하면서 그 빈도는 줄어들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서준은 재배지 섬에서 일과의 대부분을 보냈다.
별이 만약 어딘가에 있다면, 그것도 서준과 관련된 곳이라면 약국과 재배지 섬 둘 중 한 곳일 거라고 서준은 확신했다.
"둘 다 짧은 시간에 갈 수 있는 곳이구나."
"네, 대신 탐색 범위가 마냥 좁은 건 아니죠."
약국의 경우에는 탐색 범위라고 할 것도 없었다.
3층짜리 건물에다 조금 넓은 마당 정도가 다였다.
몇 분이면 모두 찾아볼 수 있는 작은 크기였다.
그러나 재배지 섬은 달랐다. 섬의 크기가 일단 상당히 컸다.
예전 서준이 본격적으로 탐색할 때에도 한 달 이상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인원도 많아지고 무력도 강해진 상태라 거리낌 없이 움직일 수 있기에 더 짧은 시간에 탐색을 완료할 수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넓은 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네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반응할지 안 할지도 모르지. 영매가 아닌 우리가 영혼 상태를 볼 방법은 없다. 결국, 네가 찾아야 해결된다는 이야기지."
"그럼, 일단 약국으로 가봅시다. 짧은 시간에 끝낼 수 있는 곳부터 끝내 보죠."
서준은 그대로 약국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열었다.
약국이든 재배지 섬이든 모두 좌표가 저장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없었다.
"일단 방부터 한번 돌아다녀 보겠습니다."
"그래. 우린 좀 쉬고 있겠다."
다른 일행들은 소파에 몸을 기대 편히 쉬기 시작했다.
좁은 약국을 돌아다니는데 다른 일행이 굳이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서준은 작아진 별의 동상을 오른손에 쥔 채로 약국을 구석구석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별의 영혼이 약국 안에 있다면 분명 동상에 반응이 올 것이다.
"여긴 없네요."
"마당으로 가 봐라."
"네."
하지만 아쉽게도 약국에서는 별 반응이 나타나질 않았다.
서준은 아쉬움을 무릅쓰고 약국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섰다.
-어흥! 어흥!
-캬앙! 캬앙!
-크릉! 크릉!
호랑이들도 약국에만 있기 따분했는지 서준이 문을 연 틈을 타 약국 밖으로 빠져나갔다.
서준은 호랑이들이 마당에서 뛰어노는 걸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호랑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는 것도 매우 즐거웠지만 지금은 별을 찾아야 할 때였다.
더 이상 별이 시간을 혼자 보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오랜 시간을 홀로 버티며 싸워왔던 별이다.
이제는 고통의 시간을 끊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마당에서 별을 찾는 일은 없었다.
“없네요.”
“그렇군. 아무래도 재배지를 뒤져봐야겠어.”
“네, 지금 바로 가보려고요.”
“함께 가야 하나?”
“아니요, 어흥이만 데려가려고요. 여기서 쉬고 계세요.”
“그래.”
어차피 이제는 재배지 섬 안에서 서준에게 위협이 될만한 괴수는 없었다.
혼자 잡은 것도 아니고 봉인 당한 상태기도 했지만 어쨌든 서준은 용을 잡았다.
아직 여의주를 소화한 것은 아니었지만 평범한 괴수가 지금의 서준을 공격한다 해도 상처 하나 입히기 힘들다.
지난날 서준을 힘들게 했던 거대 원숭이 괴수도 지금의 서준을 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서준은 단기간에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서준은 빠른 이동을 위해 어흥이만을 데리고 게이트를 넘어갔다. 아무리 서준이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어흥이만큼 빨리 달릴 수는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