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목약사 백선생-137화 (137/150)

137화.

그리 특별하지 않은 벌판, 어딘가 땅바닥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집중해서 찾아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잘 숨어 있었다.

그러나 서준은 아무렇지 않게 이곳을 찾아내어 자연스럽게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이런 곳이 있었군?"

"그러게요. 꼭 게임 속에 들어온 것만 같네요."

련과 오세근도 놀랐는지 주위를 둘러보며 서준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별을 처음 만났어요."

"여기서?"

"네."

바실리스크, 거대한 뱀의 모습을 한 괴수를 만난 후 별의 영혼이 담긴 아티팩트를 처음으로 얻었다.

그리고 그 아티팩트가 인도하는 것을 따라 재배지 섬에서 나와 바다를 건넜고 신대륙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이 이 지하로 통하는 길이었다.

"여기서 영혼을 발견한 건가?"

"네."

"무슨 영적인 행위라도 한 건가?"

"아뇨."

서준운 별에 대해서는 이미 련에게 대부분 말해주었지만 별을 처음 만났을 때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는 않았다.

련이 궁금해 하지도 않았고 굳이 해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건 없었어요. 단지 별의 영혼이 깃든 아티팩트 하나를 여기서 얻은 것뿐이에요.”

“오, 그게 처음이었나 보군. 영혼이 깃든 보물을 취한 게.”

“아뇨, 그렇지는 않았어요. 전에 얻은 것도 있었죠. 그런데 그때는 이곳으로 길을 알려줄 뿐 별과 만날 수는 없었어요.”

바실리스크를 잡고난 후 얻은 아티팩트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별의 영혼과 만날 수는 없었다.

서준이 별을 만난 것은 이곳에 와서 단검 아티팩트를 얻었을 때였다.

“아티팩트 하나로는 영혼을 깨우기에 모자랐던 건가.......”

“뭐, 뭐가 됐든 중요한 건 별을 처음 만났던 곳이 이곳이라는 거죠.”

“그래, 여기서 무슨 단서라도 찾을 수 있다면 좋겠군.”

서준이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가고 통로를 따라 걸어갔다. 이미 오래전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여전히 신비함을 내뿜고 있는 장소기는 했지만 서준에게는 그리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용의 유적까지 경험해보았던 서준에게는 이제 이런 장소쯤은 그리 신비한 곳이 아니었다.

“오, 문이 저절로 열리는데요? 형님!”

서준이 다가서자 입구를 막아서고 있던 문이 저절로 열렸다. 오세근이 호들갑을 떨며 서준의 뒤를 쫓았다.

서준은 싱겁게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별이 이곳에서 쉬고 있기를 바라면서......

“예상은 했지만 아무것도 없군.”

련이 뒤따라 들어오며 말했다. 방 안에는 련이 예상했던 것처럼 아무도 없었다.

온전한 별의 육체가 존재하지도 않았고, 별의 영혼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별을 찾을 수 있는 그 어떤 단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예상하셨다고요?”

“그래, 사람이 있다면 인기척이 느껴지는 게 당연하지. 네놈도 이제 적당한 거리에선 그 정도는 느낄 수 있지 않나?”

련의 감각은 이미 인간을 초월했다.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나뭇잎이 하나 떨어지는 것까지 감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서준의 감각 역시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 지속된 훈련과 실전으로 벼려진 서준의 감각 역시 련의 수준까지 도달하지는 못 했지만 인간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별이니까요. 저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존재. 만약 있다고 해도 자기 기척 정도는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소설을 너무 많이 봤군.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그 무엇도 자기 존재감을 없앨 수 없어. 기껏해야 조금 옅게 만드는 수준이지.”

아무래도 서준은 지구의 사람이다 보니까 지구의 매체를 많이 접했다. 특히 대침공이 일어나기 전에 한국에서는 무협지가 굉장히 유행했다.

서준 역시 무협지를 즐겨보던 사람이었다. 무협지를 보면 고수들은 자신의 기척을 완전히 숨길 수 있었다.

별은 당연히 고수들은 그 정도쯤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련의 말은 달랐지만......

“좀, 씁쓸하네요. 기척 숨기는 거 연습해서 그놈들 암살이라도 해볼까 했는데.”

정면으로 부딪히기에는 전력의 차이가 너무나도 컸다. 서준의 일행은 끽해야 다섯 명, 호랑이와 신비를 합쳐도 열 명이 되질 않았다.

그러나 상대는 정확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지만 서준의 팀보다는 적어도 몇 배는 많을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전력 역시 련에 필적할 정도로 강할 것이라고 예상됐다. 전면전보다는 암살이 유리했다.

“이래서 만화랑 소설이 문제야. 뭣도 모르고 헛된 상상만 심어주니까 제대로 발전을 못 하지.”

“참나, 우리 중에 소설 제일 많이 보는 건 사부님이에요.”

“나는 이미 그런 것에 현혹되지 않을 수준이니까 괜찮아.”

“그런 분이 눈이 벌개져라 밤 새워가며 소설을 보시나.”

지구의 문물이란 그랬다. 이런 지루한 세계에서 살던 련에게는 모두가 마약과도 같았다.

정말 손쉽게 재미를 충족시켜 주고 손쉽게 중독되고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련은 지구에 적응한 이후로 쉴 틈 없이 유명 소설이라는 소설은 다 읽었다.

“그럼 기척 숨기는 거 사부님도 못 해요?”

“희미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아쉽네요.”

서준이 아쉬움에 몸부림 치고 있을 때 련이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네.”

“갑자기요? 지금껏 계속 안 된다더니 이제 와서 가능하다고요?”

“그래, 너희 지구인들이 말도 안 되는 짓 하고 다니는 거 한두 번 보냐. 너만 해도 그렇지. 고작 그 수준으로 차원문을 열어대는데 기척 숨기는 게 가능한 인간도 어디 있겠지.”

“한번 찾아볼까요?”

“만약 있다 해도 기척 숨긴 놈을 무슨 수로?”

서준만 해도 그랬다. 련조차도 차원문의 흔적을 쫓아 차원문을 열었다. 자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용무기의 힘을 빌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수준이 낮은 서준은 차원문, 즉 게이트를 자유자재로 열었다.

심지어 처음 각성한 바로 그날부터.

지구의 인간이란 이처럼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원인도 모른 체 마음껏 사용해왔다.

서준의 게이트처럼 한계를 넘어선 능력을 사용하는 초인들은 매우 많았다. 여의주를 얻어야만 다룰 수 있는 자연현상을 단지 각성했다는 이유만으로 다루는 자들도 있었다.

물론 현상의 강도를 여의주 사용자에 비교해보면 매우 작았다. 사용자 본인의 능력이 수준 미달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어디를 가봐야 할까? 뭐 떠오르는 거 없냐?”

“글쎄요...... 별이 봉인 당한 장소를 찾는 건 어려워 보이고.”

기억을 더듬어 별이 봉인당했던 장소를 찾아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별이 살던 성은 완전히 소실된 듯했다. 련이 말하기를 그렇게 거대하고 웅장한 성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확실히 별이 통치하던 시절이 이곳의 전성기인 듯했다.

“여기서 뭐가 좀 나왔으면 좋겠는데.”

서준이 작은 책상의 서랍을 열어봤다. 의장용 단검이 들어있던 서랍이었다.

그 단검을 손에 얻은 후로 별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서랍 속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이후 서준은 책상 위에 꽃혀있는 책을 집었다. 처음에는 해석할 방법이 없어서 그대로 놔두었던 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방법이 생겼다. 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역용 아티팩트는 아쉽게도 언어는 통역해 주었지만 글을 번역해주지는 않았다.

“사부님 이거 읽을 수 있어요? 여기서 뭔가 단서가 나올 것도 같은데.”

“어디 줘 봐.”

련이 자신 있게 책을 집어들었다. 본래 이곳의 주민이었다. 물론 이곳의 문자 체계가 통일되어 있지는 않았다.

대부분 나라의 국경이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지구에서도 국가마다 언어가 달랐다.

바로 옆 나라와도 언어체계와 문자체계가 달라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게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한 나라 내에서도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국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서로의 생활 반경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강력한 괴수가 있는 곳을 피해 터전을 잡았기 때문에 마을과 마을 사이에 거리가 엄청나게 멀었다.

해서 다른 마을로 이동할 때에는 통역을 데리고 다니는 게 필수였다. 통역용 아티팩트는 이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귀한 물건이었으니까.

“어디 보자....... 지금 쓰는 문자는 아닌 것 같고. 예전에 쓰던 문자체계 같은데?”

“그런가요?”

“어, 지금 쓰는 문자였다면 내가 완전히 알아보지 못 했을 가능성이 크지.”

처음 보는 문자라면 완전히 알아보지 못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련은 이 책의 문자를 뜨문뜨문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뜨문뜨문 읽힌다는 건 내가 쓰고 있는 문자와 관련이 있다는 거겠지. 별이 살았던 시대를 생각해 본다면 내가 쓰는 문자의 과거 형태라고 확신할 수 있지.”

신기한 일이었다. 마침 련이 쓰는 문자와 별이 사용하던 문자가 정확하게 일치했다.

보통 우연이 아니었다.

“통일 제국을 다스렸다고 했나?”

“뭐, 본인 말로는요. 기억 훑어보니까 뭐 틀린 말은 아니더라고요.”

“그렇다면 이게 공용어였을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 사부님은 별이 다스리던 제국의 후손이 되는 건가요?”

“아니, 내 고향의 문자는 이게 아니었어. 이건 어디까지나 그놈들과 함께한 후 사용하게 된 문자야.”

련의 고향에서 사용하던 문자와는 완전히 다른 체계의 문자였다.

용을 탐하는 집단이 련을 납치한 후 강제로 익힌 문자였다. 그 이후에는 그곳에서 일생을 보냈기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진 문자였다.

“그럼 그놈들이 별을 봉인한 놈들과 관련 있지 않을까요?”

“의심은 해봐야겠지. 용을 탐한다는 공통점도 있으니...... 그러나 시간의 간극이 너무 커. 한 집단이 그렇게까지 오래 유지될 수 있을까?”

“그렇죠.”

단일 국가가 오래 지속되어 봐야 천 년이 되지 않는다. 국가의 이름을 그대로 쓰더라도 통치자의 가문은 끊임없이 바뀌어 왔다.

국가 단위의 집단도 그러했다. 그런데 고작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이렇게 오랜 시간을 버틴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게이트가 열린 것을 보면 그놈들이 이곳에 남아있다는 건 분명한 이야기겠죠.”

게이트를 열어 다른 세계로 괴수와 씨앗을 전이시킨다. 참으로 악랄한 계획이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을 강제로 옆 나라에 버리는 것과 비슷한 행위였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결국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놈이 또 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거 같다. 그건 나중에 차차 생각해보도록 하고 이거 한번 읽어봐라.”

련이 서준에게 책을 넘겼다. 아무래도 책속에 무언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는 듯했다.

“아, 저 못 읽는데요?”

“아, 미안하다. 네가 멍청이인 걸 순간 잊어버리고 말았구나.”

말을 저렇게 하는걸 보니 알면서 저랬다. 서준이 책을 못 읽는걸 이용해 한번 놀려먹은게 분명했다.

“장난은 이쯤 해두고 종이랑 펜 있냐?”

“그냥 읽어주시지 그래요?”

“그러고 싶지만 익숙한 문자가 아니라 천천히 해석해가며 종이에 적는 게 편할 거 같네.”

아무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문자의 형식이 조금 바뀌었다 보니 술술 읽어내려갈 수는 없었다.

련은 서준에게 종이와 볼펜을 건네받고는 천천히 글자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