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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약사 백선생-126화 (126/150)

126화.

악룡의 시체에서 수확물을 얻어내는 건 조금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아니, 미뤄야만 했다. 지구에서 열리는 게이트는 날이 지남에 따라 더욱 많아졌다.

지금까지는 힘들지만 버틸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이제 대한민국의 헌터 전력으로 막아낼 수 있는 한계점에 다다랐다.

“하필 이 타이밍에 터져버렸네.”

“그러게요, 아쉽지만 급한 불부터 끄죠.”

안타까워하는 서준을 위로하며 김비서가 말했다. 사실 아직은 막아낼 수 있는 정도였다.

한계점에 다다랐긴 했지만 아직 한계를 넘어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게이트가 약국 근처에서 열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잠깐만요. 재난문자 좀 확인할게요.”

김비서가 스마트폰을 뒤적이며 말했다. 게이트가 열리면 곧바로 재난문자가 울린다.

예전에는 게이트를 미리 감지해서 열리기 전에 알려줬지만 지금은 열리고 나서야 재난문자가 울린다.

게이트의 발생 빈도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급증했다. 게다가 감지할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이제는 게이트를 먼저 감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흠……. 10km 안쪽으로 일곱 개나 열렸는데요?”

“일곱 개요? 미친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제가 여태껏 봤던 게이트 중에 이렇게 좁은 데서 많이 열린 건 제 기억에 없는 거 같은데요?”

10km 날이 좋아 가시거리가 잘 확보되는 날에는 한눈에 다 볼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 거리에서 일곱 개의 게이트가 열렸다.

이건 그냥 죽으라는 이야기였다. 전국에서 딱 이곳만 게이트가 열렸다면 모를까 헌터 병력이 전국 곳곳으로 흩어진 지금 이렇게 많은 게이트가 열렸다는 건 사실상 지옥이라는 얘기였다.

“각자 하나씩 맡으면 되겠네요. 우리 수가 마침 딱 일곱이네요.”

“여덟 아닌가요? 형님?”

서준이 말하자 오세근이 반문했다.

“스승님이 하시겠냐?”

“하긴…….”

련은 절대로 도와줄 사람이 아니었다. 게이트 폐쇄를 돕는 이유는 단지 자신을 속박했던 집단을 엿 먹이기 위함이었다.

지구의 위험을 걱정해주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련은 지구가 멸망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어차피 다 지척이라 뛰어가도 되는 거리네요.”

“네, 갑시다.”

서준과 일행들은 서로 맘에 드는 게이트를 하나씩 골랐다. 이들은 이미 게이트 하나쯤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이곳에 모인 인원들을 제외한 그 어떤 헌터나 초인들이 와도 손쉽게 이겨낼 자신이 있는 이들이었다.

게이트 하나를 닫는 것, 그것은 이제 무료한 일상을 달래줄 놀이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서준과 오세근 그리고 김비서와 모하메드가 각자 고른 게이트를 향해 달렸다.

어흥이와 캬앙이 그리고 크릉이도 남은 세 게이트를 향해 달려갔다. 일곱 개의 게이트가 열렸다.

이미 거리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피난 가지 못한 사람들의 비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젠장! 지원 요청 빨리하라고!”

“소용없습니다! 남은 인력이 없다고 합니다!”

“그게 말이 돼? 우리 혼자서 이걸 어떻게 막으라고!”

“여기까지 합쳐서 총 일곱 개가 열렸습니다! 길드가 배치되지 않은 게이트도 있대요!”

“씨발! 그럼 그냥 죽으란 거야?”

길드 하나가 게이트를 막아내며 끙끙대고 있었다. 애초에 혼자서 게이트를 막아낼 정도로 규모가 큰 길드가 아니었다.

등급이 낮은 헌터들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길드로 성실함이 강점인 길드였다. 성실한 모습을 어필하여 상위 길드의 잡일 처리를 전문으로 하는 길드였다.

이런 게이트 하나를 홀로 감당할 수 있는 길드가 아니다.

“어! 백서준이다!”

“뭐? 창천에서 지원 온 거야?”

서준이 선택한 게이트에 그들이 있었다. 성실함만이 강점인 길드, 화도 길드였다.

그들은 서준이 창천 길드 소속인 줄 알고 있었기에 서준을 보자마자 창천 길드를 떠올렸다.

사실 이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준을 창천 길드 소속으로 알고 있었다.

“아닙니다! 혼자 오는 것 같습니다! 혼자 뛰어오는데요?”

“뭐라고? 그럼 왜 왔대! 혼자 와서 뭘 어쩌려고!”

창천 길드의 지원인 줄 알았다. 창천 길드라면 현재 대한민국의 최고 길드였다.

몇 년 전 갑작스럽게 몰락해 그냥 이름값만 좋은 길드 취급을 받았다면 GOTY 우승 후 자본과 명성을 이용해 유망한 헌터들을 싹 모아가며 최고 길드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현재 대한민국 넘버 원을 뽑으라면 열 명 중 아홉 명은 창천을 뽑을 정도였다.

백서준을 보며 이들이 기대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GOTY 우승자 아닙니까? 자신 있어서 온 거 아니겠어요?”

“야! 그래도 혼자서 뭘 어떡하냐? 백서준은 무슨 신이냐? 솔직히 말해서 우리 다 덤비면 백서준 이길 수 있는 거 아냐?”

“그건 그렇죠, 뭐.”

화도 길드 전투조의 총원은 열두 명이었다. 지금 전투조뿐만 아니라 보조팀까지 목숨 걸고 싸우는 중이었다.

이들의 총원은 스물세 명, 아무리 강한 헌터라도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보통 상급의 헌터를 중급 헌터 두셋이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무리 초인이라고는 하지만 쪽수를 당해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에이씨, 그래, 한번 해 보자! 돈 많은 놈이랑 같이 죽으면 장례라도 도매로 잘 치러 주겠지!”

“하……. 그냥 도망가는 건 어때요?”

“야! 도망가면 완전 매장되는 거 몰라서 그래? 심지어 백서준이 여기서 게이트 막다가 죽고 나서 우리만 빠져나간 거 알려지면 우린 진짜 끝장이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아……. 답이 없네요. 정말.”

이제는 정말 한계였다. 아직은 게이트에서 나오는 괴수들을 잘 상대해내고 있었지만 적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게이트는 꾸준히 괴수를 쏟아내고 있었지만 화도 길드가 죽일 수 있는 괴수의 수는 한계가 있었다.

화도 길드는 괴수에게 둘러싸인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 돼!”

괴수의 뿔이 화도 길드의 전투조장을 노리고 들어왔다. 전투조장이라는 직함답게 화도 길드에서 가장 강한 헌터였고 가장 앞에서 싸우는 헌터였다.

덕분에 괴수에게 둘러싸인 상태였고 이번 공격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뒤에서 전투를 돕고 있던 보조팀의 헌터가 그 광경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괴수의 뿔은 전투조장의 배를 뚫지 못했다. 괴수의 뿔이 전투조장의 뱃가죽에 닿기 직전 갑작스레 땅속에서 나무 넝쿨이 자라나더니 괴수를 결박했다.

“이게 무슨…….”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많아진 괴수들 전체가 넝쿨에 속박되어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정돈 해결할 수 있죠? 부탁 좀 할게요.”

“네? 네… 넵!”

당황한 전투조장이 말을 더듬으며 답했다. 넝쿨이 얼마나 질기고 단단한지 괴수들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박치기 한 번에 콘크리트를 뚫는 녀석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이 옴짝달싹 못 한 채 넝쿨에 묶여있었다.

아무리 강력한 공격을 할 수 있으면 뭐 하겠는가? 움직일 수 없다면 그저 커다란 표적일 뿐이었다.

아무리 단단한 갑주를 지니고 있으면 어떠한가? 움직일 수 없다면 약한 부분을 찾아 계속해서 두드리면 그만이었다.

인원도 적고 화력도 약한 화도 길드라도 이 정도는 혼자서 해결할 능력이 되었다.

“그럼 부탁할게요.”

서준은 그렇게 말하며 게이트로 넘어갔다.

“엇! 아직 절반도 나오지 않은 거 같은데!”

괴수의 수로 보아 아직 절반도 나오지 않았다. 게이트 안쪽에는 지구에 있는 괴수보다 많은 수의 괴수가 득실댈 게 뻔했다.

심지어 보스조차 아직 나오지 않았다. 서준은 그런 곳에 홀로 들어갔다.

“놔둬! 뭐 생각이 있으니까 들어갔겠지! 이걸 보고도 모르겠어?”

역시 전투조장이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해야 할 일을 알아챈 전투조장이 눈앞에 속박되어 있는 괴수의 머리통을 부수며 말했다.

“그냥 다 부숴버려! 오랜만에 스트레스나 풀자고!”

“네!”

그 모습을 보며 힘을 얻은 길드원들이 힘차게 답하며 괴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갓 입단한 신입도, 전투 능력이 없던 보조팀의 헌터도 괴수를 죽여나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는 괴수를 죽이는 일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단한 갑주를 뚫는 게 어려웠지만 어느덧 요령이 생겨 약점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보조팀 인원도 혼자서 괴수를 한 마리씩 뚝딱 처리하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 꽤 빠르시네요?”

화도 길드가 묶여있던 괴수들을 거의 다 처리했을 때였다. 게이트에서 나온 서준이 여유롭게 말했다.

“설마……. 벌써 끝내고 오신 겁니까?”

그 모습을 본 화도 길드의 길드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게이트 안쪽에는 더 많은 괴수들이 있었고 보스조차 있었다. 게다가 그 넓이도 얼마나 넓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서준이 되돌아 나온 것을 보면 다 잡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도망쳐 나왔다고 보는 게 더 설득력 있었다.

“네, 안에 있는 놈들 대강 다 처리했고 보스도 잡았어요. 뭐 24시간 동안은 그래도 게이트 열려있을 거니까 그동안 튀어나오는 놈들은 알아서 처리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서준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이쯤 되면 화도 길드는 서준을 신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화도 길드의 길드장은 마치 군대 선임을 대하듯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게 약국 근처에서 열린 일곱 개의 길드는 서준과 그 일행들의 손에 의해서 별 피해 없이 잘 마무리되었다.

[대한민국의 희망 창천 길드의 백서준 헌터! 홀로 게이트를 처치하다!]

[유명 길드의 오세근!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엇인지 증명했다.]

[이집트의 영웅 모하메드가 한국에 온 이유는?]

[오늘부터 대한민국의 마스코트는 호랑이.]

[헌터와 영수 하나당 게이트 하나! 가능한 일인가?]

같은 타이틀의 기사들이 온 신문을 뒤덮었다. 지면과 인터넷 뉴스, 긴급 편성된 텔레비전 속보까지 이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창천 길드의 백서준 유명 길드의 오세근 이집트의 영웅 모하메드 이들이 뭉친 이유는?]

<창천 길드의 백서준, 유명 길드의 오세근 그리고 이집트의 영웅 모하메드가 한자리에 뭉쳤다. 이들이 지근거리에서 열린 게이트 방어에서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이들이 호랑이 약국 근처에서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물론 단순한 루머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만한 파급력을 지닌 이들이 함께 모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일로 이 모든 게 사실임이 드러났다. 과연 이들이 함께 뭉친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이 셋이 길드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사실이라면 세계 길드의 판도를 뒤흔들만한 엄청난 후폭풍이 예상된다.]

위와 같은 칼럼들이 온 세상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음모론은 제기하는 칼럼들도 있었다.

[게이트를 닫고 싶다고 선언한 백서준과 모하메드, 무임금으로 괴수 처치에 나섰던 오세근 과연 이들의 만남이 우연일까?]

<이 셋은 이전부터 다른 헌터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왔다. 오세근의 경우에는 재벌의 취미 활동 정도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백서준과 모하메드의 경우에는 달랐다. 이들은 게이트를 닫겠다고 선언…….>

‘하아……. 또 시끄러워지겠구만.’

-그러게 적당히 나댔어야지.

‘방법이 없었잖아…….’

이럴 땐 두문불출하며 게이트 너머에 있는 게 최고다. 어차피 뒷일을 처리해야 했다. 서준은 잠시 지구의 일은 잊고 게이트 너머에 일에만 신경 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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