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서준의 오른손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였다.
왼손의 게이트는 최대한 작게 만들어 두었다. 련에게 받은 대부분의 기운을 오른손에 쏟아 넣었다.
게이트의 크기는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유적이 무너지며 그 파편이 게이트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서둘러라! 이러다 진짜 죽겠다!
‘거의 다 됐어. 근데 용의 유적 파편이면 돈이 좀 되나?’
그 와중에 게이트에 몇 개 넘어가는 파편을 보며 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직 여유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적어도 유적이 무너져 자신을 덮치는 시간보다는 빨리 일을 완수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다 됐다!”
서준의 오른손에서 아주 커다란 게이트가 열렸다. 서준은 그것을 그대로 쓰러져 있는 악룡에게 던졌다.
악룡은 그렇게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괜찮겠어? 저러다 정신 차리면 어떡하려고?
‘사부님 말씀 못 들었어? 며칠 못 버틴대잖아. 아무것도 못 하고 거품만 쏟아내다 죽을 거야.’
용의 시체는 매우 큰돈이 된다. 굳이 팔지 않더라도 아주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아룡의 시체로 만든 무구들은 아티팩트보다도 더 상위의 물건으로 취급해 주었다.
심지어 악룡은 진짜 용이었다. 가짜가 아닌 진짜 용. 서준이 저것을 잘 활용한다면 련이 두려워하던 집단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됐고! 우리도 가자.
‘그래.’
서준은 그대로 오른손의 게이트를 닫았다. 그리고 왼쪽의 게이트로 넘어가려는 순간 련이 다시 넘어왔다.
“왜요? 이젠 진짜 못 버텨요. 여기 다 무너져요.”
“잠깐만.”
련이 악룡을 삼킨 게이트가 있던 곳을 향해 칼을 난도질했다.
“뭐 하는 거예요?”
“놈들도 차원의 흔적을 쫓아올 수 있어. 흔적을 지워야지.”
“아!”
역시 련은 철두철미했다.
“우리도 넘어가자.”
“네.”
련과 서준은 아직 남아있던 왼손의 게이트를 넘었다. 련은 약국에 도착하자마자 허공에 칼을 난도질하며 게이트의 흔적을 지웠다.
“욕심이 너무 과한 거 아니냐?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죽을 뻔했다.”
“그렇다고 용을 그놈들한테 뺏길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도 강한 놈들이라면서요.”
“하긴 그건 그렇지. 더 이상 놈들이 용을 차지하게 둘 수는 없지.”
련이 두려워할 정도로 강성한 집단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용의 유적에 집착한다고 말했다.
아마 직접 사냥한 용도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용의 시체를 더 이상 넘겨줄 수는 없었다.
서준이 강해지지 못 하는 걸 제쳐두고서라도 놈들이 더 강해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일단 며칠 더 보내봐야죠. 별의 영혼을 합치려면 다시 넘어가야 하는데 지금은 경계가 삼엄할 거 아니에요?”
“그렇지. 용의 유적과 동상의 위치 사이에 거리가 있긴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지금 놈들은 련을 찾기 위해 아주 혈안이 됐을 것이다. 이럴 때 넘어가서 좋을 건 없었다.
게이트 자체가 용의 유적으로 이어져 있었기에 지금 넘어가면 놈들과 마주칠 게 뻔했다.
시간을 좀 더 보내고 놈들의 주의가 산만해졌을 때가 적기였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니다.
“그래, 일단은 좀 쉬도록 하자.”
“네.”
전투에 참여한 모두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모두 지칠 대로 지쳐 뒤풀이할 여유도 없었다.
기절한 신비는 하루쯤 지나면 일어날 거라고 말했다. 기운을 모두 소모해서 기절했을 뿐이다. 일종의 탈진 현상이었다.
“저도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래 나는 티브이나 보다가 자야겠다.”
“네.”
모든 일이 다 잘 풀렸다. 유재학이 그렇게 가버린 건 아쉽지만 그 외에는 모든 일이 잘 풀렸다.
-사실 잘됐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야?
‘뭐가?’
-유재학 죽은 거 말이야. 어차피 지구로 데려올 생각은 없었잖아.
‘그렇다고 죽일 생각도 아니었어.’
서준의 심성이 그렇게 악독하지는 않았다. 비록 범죄자라고 하지만 죽일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물론 지구로 다시 데려올 생각 역시 하지 않았다.
‘그냥 단지……. 그곳에 남겨둘 생각이었어. 그걸로도 충분히 큰 벌이니까.’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보냈다. 리버스 모두를 낯선 환경으로 보낸 이유도 그것이었다.
문명에서 떨어져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 홀로 떨어져 살게 하는 것. 그것이 서준이 내린 벌이었다.
물론 그 입문과정조차 버티지 못하고 모두 죽어버렸지만.
-애초에 바다 한가운데 떨궈놓은 게 죽으라고 그런 거 아니냐?
‘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강한 초인들이었잖아. 서로 힘을 합쳤다면 살아나갈 수 있었을 거야.’
유재학이 자신의 부하들을 먹으며 버텼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함께 살아나갈 수 있었을 거다.
서로 힘을 합쳤다면 자리 잡는데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높은 자리에 올라서도 외부인이라고 배척받지 않고 자신의 세력을 만든 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모두 유재학의 이기심에서 나온 결과였다.
-어쨌든 죽어버렸으니 모두 끝이군.
‘그러게, 더 벌 받아야 하는 놈이었는데.’
힘들게 가꾼 모든 것을 잃은 채 숨어 지내는 것이 추가된 형량이었다. 백 년으로는 부족했다.
아니, 강한 힘을 가졌고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실제로 힘들게 보낸 건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추가된 형량이었다. 그런데 유재학이 죽어버렸다. 모든 게 끝이 났다.
-그래도 복수는 성공했네?
‘그런가?’
-테러범들, 너 암살하려 하는 놈들 다 죽여버릴 거라고 했었잖아.
‘그러게, 다 끝났네.’
최운혁을 비롯한 결사회의 멤버들은 대부분 초인 감옥에 갇혔다.
최운혁처럼 악독하고 강한 초인들을 가두기 위해 특별 제작된 시설이었다.
최운혁과 유재학에 의해 수감시설이 한 번 털린 적이 있었기에 재설계된 시설이었다.
최운혁 일당이 그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들은 아마도 평생을 그곳에 갇힌 채 살다가 생을 마감할 것이다.
이것으로 서준의 복수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젠 진짜 게이트만 닫으면 다 끝이구나.’
-겸사겸사 짐의 기억도 찾아주고 말이다!
‘그래, 드디어 네 기억도 찾을 수 있겠네.’
죽어가는 용은 재배지 섬에 보내놓았다. 며칠 시간을 보낸 후 넘어가면 아마 죽은 채 잘 보존돼 있을 것이다.
무려 용이다. 고작 일 년의 시간이 흐른다고 부패할 것이 아니다. 용의 시체는 실로 고결했으니까.
‘유적이 되는 건 아니겠지?’
한 가지 걱정되는 건 놈이 죽으며 유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악룡의 예언 따위 들어봤자 저주나 마찬가지일 테니 필요 없었다.
그것보단 놈의 시체로 무기를 만드는 게 중요했다. 유적이 되면 시체는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걱정은 그거 하나였다.
-수명을 다 한 것도 아니고 싸우다 죽은 놈이야. 게다가 오랜 기간 봉인되어 힘이 약화되었어. 유적을 만들 정도의 수준은 아니야.
‘유적도 수준에 따라 만들어지는 거야?’
-그래, 뭐 대부분의 용이 죽으면 유적이 만들어지긴 해. 나이를 먹는 것만으로 강해지는 위대한 종족이니까. 아! 위대하다는 말은 취소. 이 하늘 아래 위대한 건 짐이 유일하다.
‘너는 끝까지…….’
-어쨌든, 놈은 그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거야.
‘그건 다행이네.’
다행히 걱정거리 하나가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놈이 죽고 감시의 눈이 옅어지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 능력은 사기야.
‘어이구 위대하신 황제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본래는 긴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오십 년 만에 련이 나타났다. 놈들이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
그러나 서준은 시간 괴리를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단 며칠 보내는 것만으로 그 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새삼스럽게 뭘, 돈 번 것도 다 이 능력 덕분이잖아.’
-그러니까 사기라는 이야기다.
덕분에 약초도 빨리 길러낼 수 있었다. 지금의 서준을 만들어 준 능력이고 서준의 길을 제시한 능력이었으며 앞으로의 서준을 이끌 능력이었다.
‘됐고, 나도 좀 자야겠다. 이젠 진짜 피곤해서 안 되겠어.’
-잘 자라.
‘그래.’
서준도 더는 못 버텼다. 온 힘을 다해 싸웠다. 탈진 직전의 상태였다.
거기에 남의 기운을 받아서 게이트까지 열었다. 열매의 능력으로 가능하게는 되었지만 힘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서준은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진 채 기절하듯 잠들었다.
“이렇게 보니 대단한데요?”
“그러게, 싸울 땐 몰랐는데 생각보다 훨씬 크구나.”
서준과 모하메드 그리고 김비서와 오세근이 재배지 섬으로 넘어갔다.
련은 넘어오지 않았다. 추적마법이 언제 울릴지 몰랐다.
“그래도 멀쩡한 걸 보니 놈들이 여길 발견하진 못 했나 봐요.”
“그렇겠지, 이곳에 머물렀던 시간이 너무 짧았던 것도 있고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했으니까. 다시 발동한 추적마법에 순간 오류가 있었다고 생각했겠지.”
뭐 서준의 단순한 추측이었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재배지 섬이 멀쩡하다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아직 이 장소는 놈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는 걸 뜻한다.
“그럼 일단 아티팩트부터 찾아볼까?”
“앗! 넵.”
김비서가 당황하여 말했다. 아무래도 용의 시체가 눈앞에 있다 보니 욕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누는 건 조금 이따 해도 되잖아요. 일단 중요한 거부터 해요. 우리.”
“하하, 티가 많이 났나 보네요? 어쨌든 미리 말해두지만 저는 오른쪽 어금니가 탐납니다.”
“어? 그건 내가 쓸 건데?”
오세근의 말에 김비서가 당황했다. 용의 시체 앞에서도 김비서는 오세근의 비서였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어……. 그럼 저는 왼쪽 어금니 할게요.”
“좋지!”
오른쪽 어금니나 왼쪽 어금니나 그게 그거였다. 아마 둘 다 창수였으니 창날로 쓸 생각처럼 보였다.
용의 어금니로 만든 창,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했다.
“그럼 저는?”
“이따 생각해요!”
안타깝지만 모하메드는 한발 늦었다. 뭐 시체가 저렇게 큰데 창날이든 창대든 못 만들겠는가?
못해도 수백 개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대충 보이는 놈의 이빨만 해도 백 개가 넘었다.
-어흥! 어흥!
용의 시체에 코를 박고 있던 어흥이가 갑자기 소리쳤다.
“왜? 뭐라도 찾았어?”
-어흥! 어흥!
일을 하나 해치웠다는 듯이 의기양양해진 어흥이가 기쁘게 소리쳤다.
모두가 달려갔다. 어흥이가 발을 올려둔 곳에 동그란 구슬이 있었다.
“이건가?”
-맞다! 맞다! 이건 짐의 물건이 맞다!
확실했다. 별이 흥분하여 소리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기억을 잃었는데도 기억하고 있는걸 보면 각별한 물건인 것 같았다.
-어머니께서 남겨주신 물건이다! 짐의 물건이야!
서준은 동그란 구슬에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용의 손에 쥐어져 있던 구슬은 작은 빛을 내며 서준의 손 크기에 맞게 줄어들었다.
“꼭 여의주처럼 생겼네.”
용들이 실제로 여의주를 들고 다니는지는 모르겠다. 애초에 용이란 생물이 실존한다는 것도 이곳에 와서 처음 알았다.
여의주는 지구의 전설일 뿐 이곳에서 꼭 그렇다는 법은 없다.
어찌 되었건 이 붉은색의 아름다운 구슬은 여의주를 닮았다.
-그런 저급한 물건이랑 비교하지 마! 어머니의 유품이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여의주는 실존하는 것 같다.